토지 17 - 5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7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긴 여정의 막바지에 이른 느낌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지만...)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토지 ‘5부’의 첫 시작인 <토지 17권>은 다섯 장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간의 이야기, 각각의 인물들의 속사정을 토해놓는 듯, 여러 인물들의 지난 시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영광과 혜숙의 관계, 서울로 돌아온 명희, 4부의 많은 이야기 중 ‘산사람들의 결혼’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강쇠의 아들 ‘휘’와 관수의 딸 ‘영선’, 그리고 조준구의 아들, 곱새 소목장이 병수와 해도사, 소지감의 인연들, 그리고 한복의 아들 영호과 숙이, 그리고 숙이의 동생 몽치, 그리고 숙이와 영선의 인연 등, 각각의 인물들의 애잔한 삶, 그들의 팍팍한 삶, 그 속의 애증, 갈등 등의 이야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주, 서울, 진주, 통영 등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다시금 ‘평사리’를 구심점으로 한데 모이며, 그간의 한을 풀어놓는 시간인 듯하다.

 

그 중에서도 송관수와 그의 아들, 영광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간간히 등장했던 관수, 백정의 사위가 되어 그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그보다는 억세고 강한 인물처럼 느껴져 아슬아슬하면서도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만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의 삶, 부자간의 골이 깊어지면서 많이 어긋난 삶, 그리고 불현 듯 찾아든 그의 죽음은 월선의 죽음만큼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다. 그동안 숱한 죽음을 봤지만, 역시 남의 일처럼 요원하게 느껴졌는데, <토지>을 읽는 동안 만났던 죽음들은 그 어떤 이의 죽음보다 피부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월선과 관수의 죽음은 조금은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면서, 이번에는 아비의 죽음을 통해 어떤 애잔한 설움을 밀려든 것인지, 내내 애달프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죽음을 풀어낸 방법이 그저 슬픈 것만은 아니었고, 무척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관수의 유서, 길상이 되새기듯, 나 역시 되새기게 된다.

“(...) 자손한테 물리줄 전답 한때기 없는 처지에 무신 놈의 유서인가 할지 모르겠다마는 이대로 내가 가믄 남은 사람들 가심에 한을 심을 것 같애서... 와 이렇게 맴이 담담한지 참 내가 생각해도 이상타. 내가 죽으믄 모두 고생만 하다가 갔다 할 기고 특히 영광이 가심에는 못이 박힐 기다. 그러나 나는 안 그리 생각한다. 그라고 후회도 없다. 이만하믄 괜찮기 살았다고 생각하고. (...) 새삼시럽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이 정말 괜찮기 살았구나 싶다. (...) 고향 산천이 보고 싶고 작별하고 싶은 얼굴도 많다마는 어차리 사람은 혼자 가는 거 아니겄나.” (194쪽)

 

또한 영광과 양현의 슬픈 사랑이 이미 예견되어 있는데, 그들의 짧은 만남이 잠시 스쳐 지났다. 과연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그들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되지 더욱 기대된다. 신분의 한계를 온몸으로 자각하며 방황하는 영광, 서희의 품에서 나름 평안한 삶을 살아낸 듯하지만, 가슴 깊이 슬픔이 자리하고 있을 양현, 그 둘의 관계에 마음을 졸이게 될 듯하다. 벌써부터 왠지 모를 아련하고 절절한 사랑의 기운이 가득하다.

 

많은 이들 중에서, 또한 ‘서희’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자신을 사모했던 박 의사(박효영)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별당에 앉아서도.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어미와 구천(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서희를 통해 마음이 절로 뜨거워지고 애틋해졌다. 그리고 길상과 함께 한 자리에서 맥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과 대화 속에서 왠지 모르게 마음을 든든하게 하였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인사(人事)는 음산하고 각박했으나 가을은 찬란하고 자연은 풍요로웠다. 다만 인간만은, 조선땅에 태어난 사람들만은 날로 찌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조선땅뿐이랴, 조선사람뿐이랴. (308)

<토지>를 읽는 지금, 이곳도 가을빛으로 완연하다. 하지만 1940년대가 아니다. 그런데 드높은 가을 하늘이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엔 내 마음은 그지없이 팍팍한 것 같다. 과연 나만의 감상일까? 일제의 폭압이 최절정에 이른 시기를 배경으로 개인의 고달픈 삶이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견뎌야지. 모든 것을 다 견뎌야 해. (...) 물밑에 가라앉은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영광이 저 다리꼴이 된다. 얻은 것은 없고 잃었을 뿐이지.” (219)라고. 우개동의 횡포를 보면서 환국과 윤국의 대화, 그리고 환국의 대답이다. 단편적으로 한 개인의 삶을 통해서도 온몸이 들끓는 분노와 울분이 자리하기 마련인데 많은 인물들을 통해 긴 시간동안 풀어낸 이야기를 접하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그 팍팍했던 삶이 가까이 다가온다. 지금의 불평, 불만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견뎌내는가?’란 의문에 앞서 그저 견뎌내는 것의 진실함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그것은 <토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갈등과 번뇌 속에서도 묵묵히, 때론 치열하게 살아낸 삶에서 여지없이 생이 기운이 꿈틀되고, 생이 꽃피고 있었다.

 

많은 인물들의 못 다한 이야기, 그 후일담이 5부, 5권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진다고 한다. 시간을 훌쩍 건너 과연 그간의 일들을 어떻게 풀어내지 호기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리고 우개동의 행패를 통해 어떻게 그 암담한 암흑의 시대가 그려질지, 이미 17권을 통해 만났지만, 삼수, 조준구, 그리고 김두수를 잇는 우개동의 악행에 벌써부터 몸서리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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