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6 - 4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6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토지>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달린 후, 잠시 숨고르기를 하였다. 무척 흥분하여 열띤 이야기 속에 빠졌다가, 우울하고 절망의 시절과 마주하기가 왠지 거북했던 것인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친 듯, 나 몰라라 <토지 16>권을 방치하였다. 하지만, 추석 연휴를 통해 다시금 읽기 시작한 후, 역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번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식자들의 따분한 이야기, 현실성을 잃고 방황하는 장황한 이야기들로 비쳐지면서 자꾸만 마음속이 어지럽기도 하였다. 허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만주 일대로 바뀌면서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옥이와 두메의 이야기는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한다. 토지를 읽다보면, 자꾸만 그 혹독했던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뭇사람들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교과서나 위인전 속 열사, 투사들의 범접하기 힘든 이들의 크나큰 노고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그 시대를 생생하게 낱낱이 증명하고 있었다. 독립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는 김두수(거복) 같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이름 한 자 남겨진 일 없이 살다갔지만, 소리 없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희생하며 숨죽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피부로 와 닿는다. <토지>의 가장 큰 힘은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숭고한 삶의 증명이 아닐까?

 

첫 시작인 7장 ‘중매’의 영호와 숙의 중매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였다. 한복의 아들 ‘영호’의 학생 운동과 그로 인한 한복과 평사리 사람들의 화해로 영호에 대한 기대가 내심 컸던 것일까? 그의 행동은 예상 밖으로 너무도 빗나가 있었고, 그로 인해 한복의 삶의 진정성, 그가 원하고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부모로서 자신의 삶을 항시 자각하고, 굳은 심지로 바른 길을 가고자 한 한복의 삶, 그가 살아낸 그 끈기와 인내의 시간들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내 한은 옷으로도 못 풀고 밥으로도 못 푼다.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다. 나라에 대한 충절심이 남달라 그러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식놈이 또 한을 냄길까봐 그기이 무서븐 기다. 자자손손 얼굴 치키들고 살 수 없게 될까 싶어서 두려븐 기라. 형이 그러는 것도 부끄러버서 시시로 가심이 철렁철렁하는데, 니 할무이가 우떻게 돌아가싰노. 자식 놔두고… 세상에 얼굴 들 수 없어이.”

“남자의 뜻이 멋꼬?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남자의 뜻이란 대로(大道)를 걷는 기지 잔재주 부리감서 지름길로 가는 거 아니라 하싰다. 길이 아니믄 가지 마라, 그런 말도 하싰다.”(163)

 

이야기의 배경은 평사리에서 만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홍이가 떠난 시간을 기점으로 만주의 이야기는 그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접해 들을 수 있었고, 궁금했던 홍이는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홍이 등장하였고, 그것은 김두수와의 만남으로 시작하여 더욱 마음을 간질였다. 그러면서 또한 임이의 등장, 언젠가 조선으로 돌아왔던 임이가 소문을 타고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만주로 돌아온 임이, 송애 그리고 김두수의 악행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슴을 졸이며 애를 태우게 된다. 그에 비례하여, 홍과 석이, 그리고 길상을 기다리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면서 다음을 기약한다. 암울한 시기, 그 처절한 속살과 마주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기대하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에서 삶의 열의를 느끼게 된다. 잔인함에 비례하여 삶의 뜨거움이 나의 손 끝에 오롯이 전해진다고 할까?

 

“옛날, 한창 혈기 왕성했을 때 헌병대에 잡혀가서 반항하다가 겪은 고통을 홍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오는 동안, 분노를 자제하는 힘은 그 고통스런 기억에서 온다. 바보짓 하지 마라! 해서 홍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

바보짓 하지 마라! 스스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고, 한복의 그 마음을 지향하면서 내 살아온 삶의 여정을 수시로 자각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깊숙이 자리하였다.

 

오가다와 인실의 여정이 <토지 16>권의 한 축이기도 하였다. 그들 사이의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내심 궁금하다. 수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서울로 돌아온 찬하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다. 또한 4부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조용하의 자살’은 그저 그간의 그의 행적만큼 날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많은 일본인들의 만주에서의 삶의 단면이 그려졌다. 그 속에서는 전체 일본인으로 매도할 수 있는 왜곡된 시선에 대한 날선 비판이 함께 있어,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일본의 우경화, 독도 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내재한 분노, 그 일시적이고 감상적일 수 있는 애국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고, 오가다와 인실의 사랑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궁금해 다음 이야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진다. 또한 상현을 집을 찾은 길상과 환국, 윤국, 그리고 양현의 이야기는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그것도 쌍둥이같이 닮은 남매 양현과 민우, 양현을 단박에 알아본 상현의 아내, 그리고 만주를 떠돌고 있는 상현의 이야기가 내심 궁금해진다. 항상 우울과 좌절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상현, 그래서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그의 이야기가 이젠 궁금해진다. 그 기나긴 수렁에서 벗어나있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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