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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5 - 4부 3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들리지 않는 함성은 차츰차츰 도시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추상적이던 가정부(假政府), 상해에 있다는 우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 존재를 실감하면서 무기력해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조국. 그 조국이 내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남녀노소 빈부와 계급의 차이 없이 누구나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보다 더 가증스러운 배신자, 반역자, 한겨레의 뿌리에서 나온 친일파 앞잡이들에 대한 응징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248쪽)
바로 <토지 15 (4부 3권)>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함성의 폭발이었다. 바로 <토지 14>에서 느꼈던 모래알갱이만큼 많은 사람들의 독립 의지, 숨죽여가며 겹겹의 모진 세월을 견디었던 사람들의 함성이 크게 울려 퍼져 전율하였다. 흥분의 도가니! 짜릿한 환희 속에 나 역시 함께 하였다. 그간 관수, 강쇠, 연학, 석의 이야기를 통해 짐작하면서도, 언제나 그 비밀스런 일들, 이야기 소기에서도 항상 쉬쉬하면서 전개되었던 일들이 이번에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물밑에서 조금씩 일렁이던 커다란 파고가 휩쓸고 갔다. 이쯤이서 예전 드라마에서 본 장면,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 장면 속 이야기가 이번에 터질 줄 전혀 알지 못했다. <토지>를 읽은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것이지만 갑작스런 전개에 깜짝 놀랐다. 명희와 찬하, 인실과 오가다의 이야기로 침울했던 분위기 속의 반전이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또한 그간 ‘김환’의 중심으로 했던 여러 사건들은 회상의 형식이었고, 무언가 하고 있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간이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이야기의 정면 등장은 온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간 길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드디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4권 3권의 차례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산사람들의 혼인과 장례식날 밤이었다. 누군가의 결혼과 죽음! 그 누군가의 이야기가 각각의 사건 속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미래가 없는 인연’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찬 전개 속에서 강쇠의 아들 ‘휘’와 관수의 딸 ‘영선’의 결혼은 그 자체로 활짝 핀 이야기꽃이었다. 그 과정 속의 작은 소동 조차도 기분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물망처럼 촘촘히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오가다와 인실의 이야기는 그들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제 시기, 반세기에 걸친 시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삶, 그리고 개개인의 삶 속 갈등과 좌절 그리고 시대의 모순과 팍팍했던 삶을 외면하기가 이젠 어렵게 되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진실,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여러 삶의 질문들이 나를 일깨운다.
이평의 장례 후, 두만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나 역시 질겁할 정도로 뜨끔하였다. 영만의 이야기는 두만이 아닌, 바로 ‘나 들으라는 소리’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그간 ‘제 앞만 쓸고 사는 인간’이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자꾸만 되묻고 있었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영만이 이야기를 통해 더욱 나를 돌아보면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생각들이 풀어진다. 그동안의 자기모순의 늪에서 방황하며, 자기변명에 급급했던 내 안에, 어떤 지혜와 용기가 조금씩 자리하며 나를 행동하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즐거운 비명들로 가득 들어차는 기분이다. 바로 이러한 작은 변화가 <토지>의 힘일까? 내가 읽는 이야기 속에서, 잃어버렸던 나만의 빛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는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