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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4월
평점 :
작가 ‘조정래’의 작품들이 새롭게 출간되고 있다. 그가 이야기를 풀어냈을 당시의 상황은 그저 교과서처럼 고루하고, 때론 잘 포장되어 그 삶의 이면의 피폐했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정래의 작품들이 새롭게 출간되면서 되도록 빠짐없이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날것 그대로의 지난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더욱 실감나게, 처절하게 당시의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아니 각각의 이야기는 의식 속에 각인되고 기억되면서, 나의 기억으로 철저하게 되새김질 되는 힘, 마력이 조정래의 이야기 속에 있다.
근대화 속 정치적 혼란과 각박했던 사회상, 온갖 부조리와 모순들로 가득한 인간의 면면들이 그의 이야기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 생소한 시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라 치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꾸만 나를 이끌고 있다. 그의 이야기에 마음을 졸이고 때론 격정에 휩싸이는 것, 그러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울분을 삼키게 되는 것은 그 이야기 속의 많은 삶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바로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인 것이다. 수시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숙연해진다. 그간의 삶의 흔적이 책을 통해 진솔하게 아로 새겨져, 그것을 손끝으로 듣는 기분이랄까?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니 뜨거워진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의 이기심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자족해도 되는 것인지, 그러면서 내 안의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거릴 때 한숨만 쉬는 나약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외면하는 벽>은 1977년에서 1979년에 발표된 8개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가슴 저미게 고달픈 삶을 그려내고 있었고, 처참할수록 이야기는 더 강렬했다. 그럼에도 희망 한 자락 엿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엿볼 수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고, 그 작은 희망의 불씨가 꺼질까봐 조마조마 애를 태우며 읽게 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바로 「진화론」과 「미운 오리 새끼」였다. 「진화론」은 가출한 엄마를 찾아 상경한 어린 소년 ‘동호’가 겪게 되는 온갖 고초를 풀어내고 있다. 무자비한 사회 속에서 어린 소년의 삶과 그 비극은 수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혼혈아들의 고민을 다룬「미운 오리 새끼」은 어렸을 때의 생경했던 경험에 비쳐지면서, 그들의 겪는 고통은 철저히 우리들의 냉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품는 희망이 「진화론」의 동호처럼 그저 비극으로, 암담함으로 끝날까봐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나는 결코 그들의 좌절이 이제는 끝났으며 하고 소원했다.
그런데 결코 이야기 속의 많은 고통과 절망의 수렁이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에 몸서리쳐진다. 8편의 작품들 속, 작가가 내비치는 이야기의 골자가 결코 70년대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 이야기를 통해 더욱 피부로 느끼게 된다. 자본주의 속, 가치관과 전통의 붕괴, 소통의 부재 등이 슈퍼박테리아처럼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름이 돋는다. <외면하는 벽>은 삶의 일그러진 이면 속 우리가 놓치고 외면하는 현실과 인간다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수없이 외면하고픈 마음, 그 벽 속에 스스로 갇히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또한 그로써 서로가 서로를 버리는 비극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