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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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접하면서 ‘사랑하면 떠오르는 공간은?’이란 질문을 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붉을 노을빛이 쏟아지는 공원 벤치였다. 누군가와 함께 황혼을 맞을 수 있다면, 아니 이렇게 늙어가 다시금 저 노을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니 그저 훌쩍 시간이 흘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이미지가 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탓이다. 누군가는 너무도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런 나의 열망이 알고 보니, <오래오래>란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다. 전설에 대한 욕구를 실현한 그들의 애틋하고 절절한, 때론 금기의 쌉싸름한 사랑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고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끝내는 이루어낸 사랑, 미완이 아닌 사랑의 또 다른 완성을 조금은 색다르게 풀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유전적 방랑벽을 극복하고 식물처럼 한 곳에 뿌리내려 붙박인 채 살아가길 소망했던, 단 한 번의 결혼과 그 백년해로를 정상이라 생각했던 한 남자 주인공이 바로 ‘가브리엘’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아등바등해야 했고, 그의 신념은 새해 아침이 밝아오는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휩쓸리듯, 한 여인에게 사로잡혔다. 그 여인이 바로 ‘섬 같은 여자, 법도를 품고 사는 여자’인 외교관 ‘엘리자베트’이다.

이들의 사랑을 속칭 불륜이다. 오래오래 관계를 꿈꾸기보다는 일상의 반복이 주는 단조로움에서 일탈을 꿈꾸듯, 순간의 사랑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랑인 것이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책 속에서도 수시로 정의를 내리지만, 그 무엇만이 옳다 그르다고 시비를 가릴 수 있을까? 진정 모범답안이 존재할까? 사랑이 어떤 떨림에서 시작한다지만, 그 떨림의 순간이 또한 순식간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오래오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이루어낸 사랑의 또 다른 일면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느 정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란 소설이 연상되었고, 다소 비슷한 설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지만 <오래오래>은 훨씬 적극적이고 얄궂은 사랑, 때론 이기적인 사랑을 그 긴 기다림의 시간, 결별과 재회의 시간 속 번민과 고통, 기쁨과 환희를 술회하면서 또 다른 사랑의 묘미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책을 받고 그 부피감에 깜짝 놀랐다. 예상을 뒤엎을 정도의 두께로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웠고, 책을 펼치기까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인공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하루를 오롯이 반납해야만 했다. 파리, 세비야, 켄트, 헨트 그리고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여러 도시의 정원을 오가면서 2천 번의 결별과 2천 1번의 재회의 시간을 600여 쪽에 담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3인칭 화자가 밝히듯, ‘이 책은 그러잖아도 너무 길‘어 부담스러웠지만 책 속에 응축되어 있는 사랑의 자잘한 이야기, 그 밀어들은 그들의 힘겨운 사랑이 선사하는 즐거움이었다.

 

한 가지 이 책의 독특한 매력은 바로 화자가 바로 가브리엘 자신이면서 3인칭 화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나와 그가 수시로 섞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직접 듣다가도, 어느새 그가 돼버린 가브리엘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기 힘들 정도로 부산해 몰입을 방해했지만 어느새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인 가브리엘과 ‘그’인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3인칭 화자는 불시에 내게 말을 걸었고, 그로 인해 나 역시 소설 속에 수시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를 듣는 청자이면서, 그들의 전설에 지지를 표하고 열렬히 응원하고, 그들의 전설을 증명해야할 벗이자 펜이 되어버렸다.

 

호르몬의 분비 기간, 그 사랑의 유효 시간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불혹의 나이에 시작되어, 그 불혹의 시간을 견뎌낸 사랑 이야기는 낯설 수 있다. 그렇기에 주인공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소원대로 전설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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