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4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를 읽노라니, 지금의 우리들의 삶과는 다른 100여 년 전으로 훌쩍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이야기에 홀딱 정신을 팔기도 한다. 땅에 붙박인 운명을 지고 태어난 평사리의 사람들, 그 삶의 살풍경들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역병이 휩쓸고 가뭄 뒤에도 살아남은 사람들, 그 메마른 땅에서도 한줄기 생의 불씨를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목덜미를 잡아끌며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그토록 바라던 양아들 한경을 얻은 김 훈장, 수동의 죽음으로 더욱 활개를 치는 조준구의 횡포, 그리고 서희에 대한 병수, 길상에 대한 봉순의 애틋한 마음들과 더불어 용이와 월선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호기심을 끌었다. 물론 2권에서 깔린 조준구의 한조에 대한 잔인한 보복의 결과도 확인하였고, 구천, 환의 이야기가 다시금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토지 1부 4권>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평사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사정들을 풀어놓으면서 팽팽한 긴장감과 호기심 속에서 혼란의 시대를 생생하게 펼쳐주었다.

 

서희와 조준구의 팽팽한 기 싸움, 솔직히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상황,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볼모처럼 별당에 갇힌 서희, 하지만 여전히 당찼다.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한 서희’라지만 자신의 야심과 집념, 그리고 명석함으로 한 수 위인 서희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될 수밖에 없다. 기회를 엿보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쥐락펴락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는 서희!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번에 특히 주목한 것은 ‘임이네’다. 줄곧 그려진 임이네는 진정 ‘잡초 같은 질긴 생명력’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끈질긴 생명력, 그 잔인하도록 꿈틀거리는 생의 욕망은 절박함의 또 다른 외침으로 들리고, 그 몸부림이 조금은 애틋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그녀가 팔자 운운하며 기구한 삶을 푸념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롯이 자신의 지금을 살아내는 모습이 자신의 운명에 확고하게 맞서게 될 서희의 또 다른 모습처럼 다가왔다. 조금은 모나게 도드라질 수 있는 ‘임이네’의 모습은 불안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력하게 허물어질 수 있는 내게 강한 어조로 말하는 듯하다. ‘보라, 내 주변의 그 어떤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 들고 떳떳하게 내 질긴 운명을 고스란히 맞이하겠다’고.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을 ‘임이네’의 본능을 끌어내고 싶어진다. 이 봄날, 생이 마구 마구 움트는 날것 그대로의 삶에 나 역시 충실하게 살아내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린다.

 

여전히 선과 악의 대립으로 책을 읽게 된다. 그런데 평사리 의거 속 삼수의 이야기를 통해 박경리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악의 생리에 대한 일침이라고 할까? 삼수의 죽음이 악의 궁극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349)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한복의 이야기가 아직 덜 풀어졌다. 평사리 의거에도 참여하지 않은 이유가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 왜 한복은 남았을까? 살인자의 아들이란 멍에에도 불구하고 올곧은 심성으로 평사리에 자리잡아가는 한복의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서희의 일행에 합류하지 않은 봉순이의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여전히 기대와 흥분을 드높아질 뿐이다. ‘가냘픈 희망’을 안고 고국산천을 떠나게 된 이들의 삶과 온갖 수모와 설움을 견디며 살아야할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어서 만나고 싶다.

이제 1부의 평사리라는 공간에서 벗어나 간도, 용정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작, 출발선처럼 느껴진다. 그들처럼 나 역시 갈 길이 험하고도 멀게 느껴진다. 2부, 3부로 전개될수록,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얼키고 설키며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 내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다양한 사람들의 북적임을 살뜰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다른 책들의 눈길과 손길을 외면하며 나 역시 싸워야한다. 이젠 내가 평사리에 붙박인 두만네 처지가 된 듯, 그럼에도 마냥 들뜨고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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