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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드디어 청년작가 ‘박범신’을 만났다. 그가 7,80년대 우리 문학계 아닌 문화계에 끼친 영향, 그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는 철저하게 -내게 있어- 낯설고 생소한 작가였을 뿐이다. 그리고 몇 해 전 그의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후 그의 작품들에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하지만 그의 신간 소식(고신자, 은교 등)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집었다가 이내 살포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아직은 시절인연이 아닌가 보다면 다음을 기약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비즈니스>라는 책을 만났다.
표지, 무척 강렬했다. 붉은 소파 위에 누워있는 야릇한 뒤태는 분명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남모를 아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뭐랄까, 그 강력함 속, 지친 어깨에선 쓸쓸함이 묻어나왔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보면 볼수록 가녀린 모습에서 아련한 슬픔이 차올라 내게로 스며든다.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욕망의 끝, 스스로 허망함에 무너졌던 기억이 투영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난 뒤, 표지의 강렬함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며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담고 있는 듯하다.
‘천민자본주의’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굵직한 이야기들이 최근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된 것 같다. <강남몽>(황석영)을 시작으로 <허수아비춤>(조정래)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비즈니스>였다. ‘박범신’이 풀어놓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우리들은 최근 자본주의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며 처절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열풍으로 설명된다고 생각하였다.
‘돈’의 노예가 된 이 세상에 도덕과 정의, 윤리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우리는 철저하게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긴급한 수혈이 필요한 어느 환자처럼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모두의 아우성이 메아리치다보니, 이렇게 하나의 흐름을 잇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떤 실체를 찾아 <강남몽>을 만나고 <허우아비춤>을 만나고 <비즈니스>를 만나게 된 것이리라. ‘세상의 주인이 자본이고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53)라 외치는 지금, 우리는 오늘의 현대성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거대한 모래성 위의 불안과 초조함을 대변하고 그 상관관계를 파헤치는 소설들을 만나면서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쳤다.
‘비즈니스우먼’, ‘비즈니스맨’을 자청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바닥의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 끝이 서서히 자신들을 옥죄어 오고 있음을 예감하면서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아들의 과외비를 위해 몸을 파는 어머니인 화자와 그 주변 인물들- 무력한 남편, ‘돈’만의 왕국을 추종하는 동기, 그리고 신출귀몰의 도둑 ‘타잔’ 그리고 타잔의 자폐증을 앓는 아들-과의 엉켜버린 인연, 그 속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빠르게 전개된다.
일단 그들처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 놀라운 흡입력이란 단 한 순간인 듯하다. 강간범, 살인사건 등의 강력범죄가 연이어 일어나는 ‘ㅁ’시, 그녀의 집 창문 밖으로 납치범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한 사건을 따라 길 없는 길을 정신없이 내달린다. 추리소설의 긴장감을 온 세포에 각인시키고, 과연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추측할 사이도 없이 진실의 문을 활짝 열렸다. 온 몸의 신경이 이 책 한 권에 쏠렸다.
사랑의 함정에 빠진 그네들, ‘자기 파멸의 욕망’에 허우적거리는 그네들의 삶은 팍팍하고 고단한 우리네의 삶에 현미경을 드리운 듯 섬세하고 날카로웠다. 그네들의 삶에서 우리들, 오늘을 투영하다보니, 정신없이 깊은 수렁에 빠진 그네들과는 사뭇 다른 하지만 본질은 같은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이야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그들의 삶은 그 어떤 이론, 원리에 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보다 많은 것을 담아내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절할 정도로 우리들의 욕망의 그 끝의 허상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 속 ‘프란시스 베이컨’의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70)라는 말이 끊임없이 혀끝에서 맴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로 ‘돈’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저당 잡힌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되묻는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백 번 천 번 인정한다. 그러나 ‘최선의 종’으로써 활용가치는 무한히 재생될 수 있지만, 과연 그 쓰임이 목적이 되지 않았는지, 이미 최악의 주인이 되어 ‘돈’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는가? 책을 읽으면서 매번 최악의 주인이 되어 삶을 변질시키고,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그네들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자본의 세계에선 당연히 사랑도 자본재였다’(59)는 고백과 ‘사랑, 의리, 또는 모든 윤리성도 이미 돈에 잡아먹힌 세상’(121)이라는 일침 또한 머릿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거침없는 일침에,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는 모습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러 흉악 범죄들이 매일의 뉴스가 된 오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전형화된 갈등 등의 온갖 자본과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들의 축소판인 소설 <비즈니스>는 가볍게 읽히면서도 묵직함으로 다가온다.
격렬했던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삶을 견지해야 하는지 자기 성찰의 시간이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어김없이 희망의 작은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있다. 바로 자폐증을 앓는 여름이의 변화된 모습이 첫 번째 희망이었다. 난도질당해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작은 희망일지라도 어느새 삶의 희열이 스며든 그녀의 변화된 모습 또한 두 번째로 엿본 희망이었다. 개발과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와 자본이라는 힘에 좌절과 환멸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 깃든 내면의 순수성과 삶의 열정, 그 본성은 좀 더 건강하고 당당하게 하루하루에 충실하고 싶다는 더 뜨거운 욕망들이 내 안에 꿈틀거린다.
박범신, 그는 현재 지금의 모습을 낱낱이 그려내는 현역작가, 현실 비판적 이야기를 풀어내는 ‘현역작가’를 꿈꾼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청년작가’라는 수식어가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흰머리가 내려앉은 그의 모습에서 푸른 기상을 느꼈고 가슴엔 불타오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현역작가’란 수식이 더욱 어울리는 내일, 그가 풀어낼 숱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로 들뜨면서도 미처 만나보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들을 만나러 잰걸음을 놓아 책 속으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