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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적잖이 신성한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삶을 조망하는 시선, 가치에 대한 일대 변화를 일으키며,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이 던진 화두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 윤리란 화두에 대한 담론에 한 번 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 주목하였다.
대학 전공과도 연관되는 이야기지만 지금껏 생명과 유전학적 접근을 그다지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다소 나와 맞지 않아 큰 좌절을 맛보았고, 몽상처럼 흩어져 나를 휘두르는 생각의 실체를 확인-‘저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제대로 파악해 보려고 한다’(36)라고 말한 그 심리 그대로다- 하고, 깊숙이 자리한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 생각들을 좀 더 견고히 다듬고 싶은 마음이었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제목 그대로 ‘생명 윤리’를 여러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던져졌던 몇 가지 이야기를 되새기며 읽기도 하였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 하에서 소비자의 선택적 선호와 기호가 유전학적 강화로 개별적, 자발적 선택의 문제로 다루어진다면, 과연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가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문제가 의미 있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완전함, 완벽함을 쫓지만 그럼에도 ‘불완전’한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20세기 우생학의 그림자가 오늘의 생명공학(유전공학과 강화)의 논란 위에 드리워져 있다는 말에 공감하며 자유 시장 경제, 무한경쟁 하에서 우생학의 변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의 윤리’란 화두를 두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였다. 인간의 욕망의 끝을 헤아릴 수 없거니와, 삶, 생명의 소중한 가치, 인간 존엄성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물질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 그리고 과잉 양육 등의 다양한 문제가 함께 화두로 떠오른다. 진정 어떤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일지를 고민하다보면, 각자의 개성, 고유성을 지키면서 사회적 틀(시선)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는 없는지 자문해본다.
자식은 결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선택권이 부모에게 정당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이에 대한 선호와 기호가 자발적 선택의 자유에 해당한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이 온전하게 유지될까? 단지 부모의 능력(부와 권력)이란 잣대에 의해 자식의 유무가 다름 아닌 소유의 선택 문제로 전락하는 것을 아닐까? 이런 저런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자녀의 유전학적 우연이 모종의 사회적 약속에 의해 단일화, 획일화되는 듯 아찔한데, 인간의 존엄성이 사회적 틀에 의해 끼어 맞춰진다는 경고의 메시지에 숙고하게 된다. 세상에 맞추기 위해 본성을 바꾸는 것은 자유권을 포기한 극단적 형태란 충고와 우리의 유전적인 능력을 가지고 ‘인간성이 왜곡된 부분’을 곧게 펴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재능과 제한에 좀더 친절하고 사회·정치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해야 한다(144)는 ‘마이클 샌델’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본다. 나는 교정하지 않은 채, 뻐드렁니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치아 교정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때론 우리 부모님은 내게 치아 교정을 ‘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망을 들었던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왠지 부모로서 마땅한 책무를 하지 않은, 경제적 무능으로 취급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뻐드렁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곤 할 수 없다. 아니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단연코 내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아빠의 뻐드렁니가 아닌 엄마의 고른 치아를 물려받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굵은 목을 닮지 않고 아빠의 가늘고 긴 목을 닮아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식으로 부모님과 나의 외형적 유사성을 두고 유전학적 분석을 하며 불평 아닌 불평으로 우스갯소리에 웃고,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그런데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내가 나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런 나의 고유성이 부모의 무작위적 결합에 의해 우연히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란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와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자의 다른 이야기는 잊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란 고유성의 가치가 내 안에서 드높아지면서 생명에 대한 겸손과 경외감에 고취되었고, 생명을 선물로 받아들여 감사하는 마음이 한 가득 내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