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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보면 문득 ㅣ 창비시선 29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가을이다! 가을 하면 왠지 모르게 쓸쓸함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휘몰아 닥친다. 몇 해 전부터 드높은 파아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그 청명함에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집들로 즐비한 곳으로 발걸음이 절로 향한다.
돌아다보면 문득!? 제목이 무척 감미롭다고 할까? 어떤 그리움을 가득 안고 애처롭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선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돌아다보면 문득 무엇을 그리게 될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무엇, 뭔가 툭툭 떨어지는 느낌은 수없이 꽂혀 있는 다른 시집들 중에서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가을의 헛헛함을 풍성함으로 바꿀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보름 가까이 곁에 두고, 펼쳐보고 펼쳐보았다.
<<돌아다보면 문득> 이 시집 말이다. 착착 감긴다. 한 구절 한 구절 시·공간을 넘나들며 생경하게 다가오면서, 끊임없이 혀끝을 맴돈다. 뭐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톡톡’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긴 여운을 남기며 깊게 울린다.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는 서시「희망」은 마구마구 가슴을 뛰게 하였다. ‘희망’이란 것을 난생 처음 느낀 듯! 어둠 속에서나 그 빛을 발하는 별들처럼, 희망이란 것이 본디 절망과 고통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니, 그 어둠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명쾌한 진리가 쿵쾅쿵쾅 심장을 뛰게 하였다. 그리곤 곧장 희망을 에두른다. 어둠속에서나 드러나는 별, 그 빛 안에 어둠이 있다고, 그 어둠 속에서 홀로 쓸쓸했다고 말이다.(「어둠속에서」)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문제인 냥, 홀로 자신이란 벽에 갇혀 세상을 등지기 일쑤이지만, 그럼에도 그 쓸쓸함을 찾아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란다. 그 곳의 소나무 한 그루와 작은 벤치엔 먼저 온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단다.(「바닷가 벤치」)
서시 「희망」,「어둠속에서」와「바닷가 벤치」이렇게 연달아 있는 세 편의 시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마음 속 가을의 묵은 감정들을 씻어주었다. 나만의 쓸쓸함, 외로움이 마지막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바닷가 벤치」)는 구절에서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가슴 속 응어리가 한 순간에 풀린 듯하다.
제1부 마지막 시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희망공부」)을 통해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된다. 좌절, 열패감 속에서도 희망의 작은 싹을 틔우고 또 틔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그렇게 ‘희망공부’에 끝없이 매진하라 소리 높인다.
‘나의 고향은 공간 속에 있지 않고/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 어린시절 부르던/ 흘러간 노래 한 소절과/ 그것이 떠올리는 시간/ 아득히 먼 별에 숨어 있는 한 송이 꽃처럼/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 「나의 고향은」이란 시가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가장 진귀한 보석처럼 가슴 속에 박혔다. 고향과 유년시절의 추억, 무의식 속의 처절한 그리움이 지금 순간순간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득한 상실의 아픔이 「나의 고향은」을 통해 치유되고 위로받았다.
2008년의 시간을 거슬러 그 당시를 시를 통해 뒤돌아본다. 현실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시인, 그의 통찰과 연민과 애증은 여전히 뿌리 깊숙이 자리한 우리의 사회 문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희망을 이야기하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 현실 인식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젠 달력도 11월이다. 11월~ 벌써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 동안 뭘 했던가?’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아쉬움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자꾸만 뒤돌아본다. 그럼에도, 자~ 이젠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란 시를 통해 힘을 내보면 어떨까? 큰 소리내어 읊어보련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누끼네’
쓸쓸함과 외로움에 파묻히기 쉬운 이 가을, 나는 정희성의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을 통해 한결 뽀송뽀송 가벼운 마음과 포근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가슴 속 희망의 불꽃이 일렁이며, 힘을 내었다.
몇 번이고 들락날락 갈필을 못 잡고 버둥거리는 내게 쉼 없이 맑게 갠 얼굴로 묵묵히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었다. (‘시는 맑게 갠 얼굴로 제자리에 있다’ 91, 해설 박수연). 마치 느닷없이 가을산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다가 어떤 위안을 찾듯이, 정희성의 시는 그렇게 산처럼 어디 안 가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곤 갈팡질팡한 마음을 감싸주었다.
‘가까이 갈 수 없어 /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 산이 어디 안 가고 /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