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성민 글, 이태진.조동성 글 / IWELL(아이웰)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올해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사실 1909년 10월 26일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책, 공연을 통해 접하면서, 그에 대한 작은 관심을 표한 정도라고 할까? <안중근 불멸의 기억>을 통해 많은 반성을 하면서, 안중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미쳐 알지 못한 많은 사실들로 심히 부끄러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라는 책을 접했다. 제목부터 알쏭달쏭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곤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한다'라는 문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단 부정부터 해야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야 했고, 뼈아픈 통한의 슬픔에 빠졌다. 아니 정신이 바짝 날이섰다.

 

친일파의 후손과 비교될 정도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의 열악한 환경을 다른 매체를 통해 많이 접했다. 역사의 모순일까?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여전히 짓밟히고 있는 그 현실을 마주하는 것조차 불쾌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자화상이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일! 그 뼈아픈 책임 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안중생'의 변절 아닐까? 최근 역사 청산을 위한 작은 노력, 그 결실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현실적인 움직임이 있는 것인지, 역사의 반목이 되풀이 되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낀다.

 

영웅의 아들, 그 빌어먹는 인생에서,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모순, 준생의 항변일까? 그 안타까움이 묻어나, 아찔했다. 자유를 위해 한 개인은 나라를 선택했고, 그 자유를 위해 한 개인은 자신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면서, 한 개인의 삶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과연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책임과 소명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이 짧은 이야기 속 목적은 칼날로 벤 것처럼 뚜렷하다. 안준생의 친일이란 비극적 역사 이외에도, 안중근은 의사가 아닌 장군이었다는 것, 즉 한 개인의 자율적 선택이 아닌(특히 '의사'는 요즘의 테러리즘처럼 개인의 독단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제에 의해 날조된 것) 독립군 장군 안중근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아닌 안중근 장군으로 기억하고, 그 숭고한 결의를 가슴 속에 되새길 것이다.

 

짧지만 강력했다. 역사의 비극이 아직도 되풀이 되고 있는 듯한 씁쓸함에 몸서리쳐졌다. 그 비극적 역사에 질타하며, 손가락질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역사 앞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묵직한 울림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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