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실독증'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단순히 아둔함으로 치부하기엔 그들의 어려움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단순히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구조(?)상 글을 읽고도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의 장애, 단절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고, 소리내어 한 자 한 자 읽는 모습(어느 가정의 아이와 특히 한 외국인 신부님의 이야기)을 보면서,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외국의 책 읽기 프로그램도 소개하면서 '실독증'과 같은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는 사례를 통해 '책'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어느 tv 책 기획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책, 못 읽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비교적 가벼운 책, 소설 제목처럼 느껴지지만, 인문 교양서가 진열된 곳에서 보게 된 책, 한 눈에 쏙 들어왔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책을 못 읽는 남자'는 바로 작가란다. 그것도 베스트셀러 추리작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작가인데 책을 읽을 수 없다니, 선천적이라면 작가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한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

 

실서증 없는 실독증(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 alexia line agraphia)라는 진단명 자체가 어렵기만 할 분인데. 다행히도(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리지만) 그는 '뇌졸중', 그것도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왔던 뇌졸중으로 인한 뇌의 손실로 후천적으로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쓰러진 기억도 없이 그가 잠깐 잠든 사이에 다녀간 그 뇌졸중은 그의 삶을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내 형제의 보호자>라는 책을 마무리한 뒤, 어느 아침에 신문을(2001년 7월 31일자 신문)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키릴 문자처럼, 한글처럼 그러다 세르보크로아티아처럼 보이는 것, 그리곤 뇌졸중 진단과 함께 찾아온 시각 장애와 실서증 없는 실독증 진단! 기막히 운명의 장난아닌가!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은 책엔 용기와 힘,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손을 불끈 움켜지고, 힘있게 앞으로 내디딜 수 있는 힘!

 

<책, 못 읽는 남자>는 스스로를 '인쇄된 글에 중독된 환자'로 칭하고 있다. 그만큼 작가로서의 삶 뒤편에 끊임없는 독자로서의 삶(책 없이 지낸 시간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론다)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연극을 통해 글쓰기의 유희를 깨닫게 되고, 학창 시절 책으로 이끌어 주었던 많은 인연들과 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회 초년생 시절, 방송국 생활과 현업 출판 작가로서의 지난 삶을 정리(회상)하는 이야기가 1/3정도이다. 그리고 뇌졸중 후유증으로 인한 재활과정을 담고 있다. 읽을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느리더라도 읽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눈물 겪게 감동이었다. 그리곤 결국 자신의 탐정소설(주인공 '베니 쿠퍼맨'이 머리에 일격을 당하면서 병원을 배경으로 한)을 다시 기획하고, 책을 출간하게 되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 '올리버 색스'와의 만남 등등을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일 만큼 눈물 겪게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뼛속까지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사형 선고와 같았던 '실서증 없는 실독증'이란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은 책을 만나는 순간부터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었다. 상황 자체도 자체지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굴의 의지와 그 노력의 생생한 기록, 흔적은 삶의 대한 또다른 애찬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낸 작가 '하워드 엥겔'의 고군분투기! 바로 <책, 못 읽는 남자>는 모든 독자로 하여금 생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용기를 심어주고 있었다.

 

 

 

사는 게 그렇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때로는 힘들고 혼란스럽지만 그 다음 날에 일이 쉽게 풀리면 보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때도 쉬울 때도 모두 같은 것의 부분일 뿐이다. T.S. 엘리엇이 항상 지적하듯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때조차도 나는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나의 작품이 나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작품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195쪽)

 

 


 
 

이 책을 읽는 재미이자 알짬인 것이다.(209)

---> 알짬 :  여럿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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