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자 민음의 시 155
김언 지음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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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높고 청명하게, 푸르른 하늘과 울긋불긋 가을산의 정취, 황금빛의 가을 들녁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라 강하게 유혹할 뿐이다. 그렇게 생동하는 자연을 곁에 두고, 책과 씨름한다면? 법정 스님 말씀대로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계절인 것이다. 그래도 가을이다. 한 편의 시, 하나만으로도 어떤 두께의 책을 능가할 만큼, 마음을 살랑살랑, 잔바람에 일렁이게 하는 계절, 그렇게 시를 벗하고 싶은 계절로 금새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을에 시를 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소설을 쓰자>라는 시집을 만났다.

 

 제목 <소설을 쓰자>는 참으로 신선하다. '시'집이라면서, 소설을 쓰자라 하니, 뭔가 발칙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절로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런데,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빈 가슴을 채우려 했던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책과 그것도 '시집'과 씨름을 하고 말았다.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시를 기대했던 나는, 분명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 제목의 신선함 뒤에 감쳐진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런데, 날카롭고 정신이 번쩍 듣다. 시 속, 아니 시어 하나하나 속의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과 마주하면서 긁히고, 찔리고, 만신창이가 된 듯한데,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은 또 무언이란 말인가!

 

<소설을 쓰자> 속 시들 속 나의 가장 큰 느낌이라면, 날카로움 그 자체였다.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칼날을 들이대면서, 호되게 호통치고 있다. 작품 해설의 언어학과 존재론 같은 어려운 것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을 자각하고, 반성하게 한다. 여러 매체를 통해본 오늘의 우리 사회를 면밀하게 해집고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중국집 이름은 진짜루, 확인되지 않은 단무지와 양파와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 어제도 그제도 나는 확인되지 않은 논문을 읽고 확인되지 않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확인되지 않은 일기 예보를 빋고 나왔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가 그친 것 같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친구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진에도 찍혀 있다. 그 빗방울이.

- 미확인 물체 中

 

가장 극명한 것은 '말'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그 무수한 말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낳고, 그 상체를 들쑤시고 있는지를, 섬뜩섬뜩할 정도로 마구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도 냉소적인 것은 아닌가 싶은 정도로 그 날카로움에 혀가 잘린 듯하다.

 

사건 다음에 문장이 생긱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 어떤 문장은 매우 예지적이다.

어떤 문장은 매우 불길하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자신의 말에 일말의 책임을 진다. 그것은 조금 더 불행해졌다.

-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없다. 中



 

..... 촌각을 다투는 윤리의 싸움은 나의 입에서 크게 벌어진다.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건 나의 혀가 잘못 발음됐기 때문이다. 그는 실수로 나의 혀를 잘못 놀렸다.

 

한 사람의 부정확한 발음이 홍수로 시달리는 시내를 마비시켰다. 너무 많은 비와 한 사람의 시체가 떠내려간다. 폭동의 일부가 되기 위해 나는 여기 왔다.

 

모든발음과 증오가 소음 속에서 증발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입을 다물 수도 있다. 뚝 하는 순간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아니 죽을 수도 있다. .....

- 입에 담긴 사람들 中



 

분명, 감성을 자극하는 따끈따근하고 보드라운 시를 원했다. 그야말로 가을이지 않은가! 그런데 <소설을 쓰자>는 정말 '시'로서 하나의 이야기, 너무도 차가워 가까이 하기 싫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말'에 대한 것이다. 별 생각없이 하는 말들 속에서 얼마나 우리는 잔인해 질 수 있는가! 빈틈없이 지적하고, 반성하게 한다.

분명, 나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하였다. 하지만 '시'는 그 어떤 긴 말들보다도 간단하게 오늘의 우리를 이야기하고,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부끄럽게 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갖도록 살짝이 구슬리고 있다. 이 가을 아주 독특한 시를 만나고자 한다면, <소설을 쓰자>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단, 단단한 마음 하나는 준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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