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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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편 지하철 안에서면 충분했다. 가슴속에서 멍울져 파고드는 읽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글. 아, 읽다 말고 피식거리는 나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김영하의 글`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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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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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을 지하철 안에서 읽으면서 우는 애가 또 있을까.

김애란의 문학적 자서전과 수상 소감을 읽으며 뚝뚝 나와 떨어지는 눈물을 나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김애란이 부모에 대해 쓴 문학적 자서전을 보면서는 감탄했고,

편혜영이 김애란에 대해 쓴 작가론을 보면서는 부러웠다.

상을 타서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 보다는 마음껏 글을 쓰니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에 가까웠다.

 

'손재주가 좋은 부모님과 달리 나는 카드를 가지고 하는 종류의 놀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공기나 고무줄도 잘 못했고, 산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힘들어했으며, 중학교에 올라기서는 가정시간에 저고리를 만들다 잘 안돼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종알종알, 패를 맞추듯 말을 맞추며 뭐라 떠들어대는 것은 좋아했다.' (71)

 

'얼마 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깨쳤다. 가벼워 민첩한 대신 흩어지고 사라지기 쉬운 '소리'를 글자로 적어 지상에 남겨두는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음 열 네개, 모음 열 개, 이렇게 스물네 개의 활자가 적힌 낱말카드가 그 도구였다. 그리고 그때 느낀 모종의 경이, 재미와 설렘은 다른 소설 안에 (두근두근 내 인생)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72)

 

낱말과 언어에 대한 김애란의 애착. 애증과 결핍이 만들어낸 귀한 결과물인 낱말의 조합들이 놀랍게 응축되는 과정들을 지켜보며 독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선물 받았다.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특정한 설정에 마음껏 상상력을 불어넣은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를 읽다보면, 기존에 김애란이 추구하던 여러가지 소설 기법들에서 작가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하려는 몸짓을 찾을 수 있다. 아마 그 지점이 될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허물을 벗어 날아오르려고 꿈틀대는 그 순간이란. 작품 속에서 소수언어를 쓰는 서로 다른 부족 출생 둘이 중간 지점의 아이를 낳지만, 곧 그 아이를 버린다는 설정에서, 독자는 묘하게 억압된 언어에 대한 제국주의와 사람들의 욕구를 읽게 된다. 하루에 몇백개씩 소수언어가 사라진다는 뉴스를 몇년전에 읽으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던 독자로서의 내가, 이제 허물을 벗어던지고 능동적으로 침묵의 미래를 파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예술가는 스스로 보상받는다는 심사위원의 글을 보면서 유용하지 않아 자유롭다는 김 현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귀중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앞으로도 많이 기대되는 작가임에도 틀림없다.

 

글로 푸는 문학이, 조금 느린 문학이 비록 영상물에 의해 상업적으로 지배받고 있거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여도,

여전히 글은 힘이 세다.

 

 

사설.

 

누구든 나를 발견했을테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지하철역 출구 계단을 걸어올라오며

젖어든 눈물을 다시 삼켰다.

내가 쥐고 있던 낱말카드를 다시 꺼내 허공에 뿌렸다.

그것들은 천박하게도 4월의 벚꽃처럼 흩날라갔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연구원행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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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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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제야의 종소리를 듣지 않고 첫 페이지를 넘긴 소설.

'내 심장을 쏴라'.

 

12월에 읽었던 한강의 두 소설과 정유정의 소설의 형식상 가장 큰 차이점은, 역동성과 문체의 내면화에 있다.

심사평에서도 이미 쓰인바 있듯, 300쪽을 훌쩍 넘는 이 소설은 (물론 단숨에 읽히지는 않지만) 내면화 되지 않은 문체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9년 세계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왜, 이 소설은 내면화된 문체보다 역동적인 문장이 훨씬 잘 어울리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상 순수 소설가 한강과 (자의든 타의든) 상업 소설가의 기질이 다분한 정유정은 줄긋듯 구분되는 문학적 차별성을 갖게 된다. 정유정은 이야기꾼이고, 한강은 소설가다.

정신병원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작품 '내 심장을 쏴라'. 작가의 치밀한 자료수집과 상황묘사에 들어가는 실질적인 소재들을 보며, 새삼 간호사였던 작가의 전직이 부러웠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꾸 사회경제연구소를 다니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거다. 단지 사람들은 정신병동의 간호사가 연구원보다 역동적이라고 생각할테지만.

 

*정신병동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정의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자. (213)'

 

정신병동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떠돌던 때가 있었다. 멀쩡한 사람인데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를 탔더니 그 차가 정신병동가는 차였더라는. 그래서 그 뒤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사람이야기.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부류의 사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작품은 정신병동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정상적인 사람들을 구분해놓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 틈에서는 정상인 사람이 이상한 거다.

 

*愛: 정신병동의 사랑을 말하다

제로키 인디언들이 자작나무를 뭐라 부르는 줄 알아?

서 있는 키 큰 형제.

태양의 자식이란 점에서 나무와 사람은 형제라는 거야. (236)

 

열정적인 남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등장하는 형제애, 전우애, 그놈의 愛. 동양철학에서는 사랑 愛가 사실 '아끼다'라는 단어로 쓰인다는 것.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갇혀서 미쳐가는 승민과 미쳐서 갇혔지만 전혀 정상으로 보이는 우리의 주인공 수명 둘 간의 愛가 피보다 진하게 얶혀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가끔 독자는 잊게 된다. 여기가 정신병동이었던가? 특히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런 말을 내뱉을때.

미친 새끼들.

 

*내 심장을 쏴라.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240)

 

수명은 환청을 듣는다. 가끔 현자인 적도 있는 애증의 관계에 있는 수명의 어딘가에 붙어 있는 그 놈. 독자는 알고 있을까. 니가 누군지 정말 곰곰이 잘 생각해보며 사는 독자는 얼마나 있을까. 어딘가 숨어 있는 너의 분신말고, 세상에 내몰려 견디는 다른 나 말고. 진짜 나를 찾아본 적 있을까. 이야기가 한껏 고조되는 때 호수 한 가운데 정신병동을 벗어나겠다는 두 남자가 보트를 젓다 말고 호수밖을 향해 외친다. 너, 너를 아느냐고. 정유정 소설의 힘이 여기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구절이다. 이 긴 호흡의 소설을 만들어 낸 이유를 알 수 있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소설의 본질이 여기 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은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이놈은 스스로 죽을거야. (264)

 

정유정 소설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다.

질질 끌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왜 영화계가 정유정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것 같았다.

7년의 밤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영화같은 영상미가 도드라질 것 같다.

이 정도 내공, 어쩐지 빅 픽쳐에서 받았던 인상과 비슷했다.

장편소설을 잘 쓰는 작가와 단편소설을 잘쓰는 작가는 문체가 다르다.

정유정은 장편소설을 잘 쓰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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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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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읽고 싶었다.

‘알랭 드 보통’을 대체 언제적부터 들어본 건지 모르겠다.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 몇년 째 서점을 들를 때마다 잊고 있다가, 불현듯 떠올라서 구입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실 ’가장 평범하고 흔해빠진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히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느끼고 이별하는 남자의 감정선을 묘사한다는 것이 이 소설 모티프의 전부이다. 다만, 이 책의 묘미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 보다 줄거리 사이사이에 있다. 사랑의 각 단계에서 우리가 느끼고 겪고 체험하는 모든 감정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흩뿌려놓았다. 철학이 사랑이 되는 그 순간, 사랑을 철학으로 풀이하는 그 순간 순간을 잡아내는 포인트에서 우리는 거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글자의 묘미에 빠져들게 된다.

 

사랑을 하다보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는가. 왜 그는 나를 좋아하는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철학적인 대담으로 끌어넣은 작가의 실력이 수준급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필연적으로 영화 '500일의 섬머'가 생각났다. 사랑이 지나고, 또 다른 사랑이 온다는 설정 자체와, 처음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삶의 모든 것을 채우다가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허무감을 철학적이고 위트있게 처리하는 수법 하며, 마지막에 결국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생기를 찾는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이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면, 가장 흔한 사랑을 가장 흔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에 덧댄 사랑의 감성이라고 할까.

 

아래는 쭉, 책에 나온 글귀들만 모았다. 누구든 겪는 사랑에 관한 감정적 사설을 사설스럽지 않게 고찰해놓은 천연덕스러움 덕분에, 별다른 설명없어도 충분히 이 책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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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만다. 41.

 

[마르크스 주의]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 (Grcho Marx, 1890-1977) 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화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67.

 

[틀린 음정]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머릿속에서 작곡한 놀라운 심포니를 나중에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같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연주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에 감명을 받기는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연주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공상이 실제 연주되는 순간, 의식 속을 떠다니던 천사같은 존재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자기 나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역사를 가진 물질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79.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왜 너는 연극을 그렇게 따분해 하니? 왜 너는 꼭 백년은 된 것같은 저고리를 입으려고 하니?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자꾸 배게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91.

 

[회의주의와 신앙.]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없이 의심을 하는 것 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130.

 

[친밀성.]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충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충성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136.

 

[마음의 동요.] 나는 클로이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갈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할 때에는 무한정 뻗어나갈 수가 없다. 그들의 특질은 이미 도표로 정리되어 있고 따라서 갈망에 필요한 신비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몇 분동안, 또는 몇 시간 동안 보았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얼굴은 정리할 수 없는 꿈, 규정할 수도 없고 꺼버릴 수도 없는 욕망에 필수적인 촉매가 된다. 163.

 

[마음의 동요.]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은 갑자기 시작되었듯이 갑자기 끝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동의 운명에 호소함으로써 현재를 강화하려고 했다. 171

 

[마음의 동요.]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것이 훨씬 더 복잡하고, 궁극적으로는 덜 유쾌한 현실의 생략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173.

 

[행복에 대한 두려움.] 안헤도니아.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생기는 것으로, 고산병과 아주 흡사하다고 규정한 병이었다. 이곳의 전원적인 풍경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지상에서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 눈앞의 가능성으로 대두되면서, 그런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하여 격한 생리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77.

 

[행복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비난에는 복잡한 이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183.

 

[수축.]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190.

 

[낭만적 테러리즘.] 삐침 역시 삐치게 된 사건과는 별 관련이 없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용된다. 내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 때문에 너에게 화가 났다는 것은 나는 네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는 더 폭넓은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메시지를 상징한다. 210.

 

[낭만적 테러리즘.]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211.

 

[선악을 넘어서.]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223.

 

[선악을 넘어서.]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228.

 

[심리적 운명론.] 반복강박증...무의식에서 비롯된 통제 불가능한 작용. 이 작용의 결과 환자는 일부러 자신을 괴로운 상황에 가져다놓고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환자 자신은 이 원형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히려 환자는 그 상황이 현재 이 순간에 의해서 완전히 규정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233.

 

[예수 콤플렉스.] 가독교의 정점에 순교자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예수가 갈릴리에서 옷장이나 식탁을 만들며 조용한 삶을 보내다가, 말년에 가서 심장마비로 죽기 전에 <나의 인생론>이라는 얄팍한 책을 펴냈더라면 그가 현재와 같은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 로마 당국의 부패와 잔혹, 친구들의 배반 - 이모든 것이 예수가 신을 자기편으로 둔 사람이라는 증거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증거]를 구성하는 데에 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 249.

 

[사랑의 교훈.]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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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며 사는 삶 - 작가적인 삶을 위한 글쓰기 레슨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한진영 옮김 / 페가수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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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글을 쓰며 사는 삶이라는 것.

 

너무나 치열하게 글을 쓰며 살았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늘 괴로웠다. 글을 쓰는 것 자체는 내게 큰 힘이었지만, 반대로 너무나 큰 숙제였다. 나는 매일같이 나를 주눅들게했다가, 글로 치유받았다를 반복했다. 애증의 관계였다.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놓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깊은 상처를 여러번 건드리게 되고, 결국 풀리지 않던 숙제를 해결하게 된다. 정말 매일 이렇게 글을 쓴다면 괴로워서 죽을 지도 모르겠어

그래, 이제야 이해하는구나.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때문인지 나는 누구나 매일 그들의 머리와 심장을 짜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와는 다른 일을 한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85

 

얼마전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문예부 후배들을 만났다. 아이들에게 내가 했던 생각들을 늘여놓았다. 미친듯이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던 내 손을 묻어버리고 싶었던 내 심정. 글을 쓰고 싶어 시구하나라도 떠오르면 정말 어디서든 앉아 글을 썼던 나의 학창시절. 나는 매일같이 내 심장을 짜내며 글을 썼다.

 

글을 쓰며 살 수 있는 전공을 택하지 않았다. 타의적이었다고 했지만 자의였다. 아버지의 뜻이었지만 결국 내 선택이었다.

그리고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수없이 많은 길을 돌아 돌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방도들을 늘 마련해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글을 쓸 수 없었다.

학과 공부, 일, 통역, 번역, 여러가지 다른 업무들은 내가 글을 쓰며 사는 삶을 살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글을 쓰는 기간을 먼 후로 잡아 두었다.

그동안 경험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로 두고 그 순간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 얻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장작을 패고 있다면 온전히 장작 패는 일에 몰두해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다면 양치질에만 몰두해야 한다. 걷고 있다면 걷기에만 몰두해야 한다.

 

책을 쓸 때면, 언제고 이 작업이 끝나기만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또 다른 책을 쓰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러니 뭔가 기대하는 것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냥 쓰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서 얻는 미덕이다. 성공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저녁식사에 나이트 가운을 입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198

 

이 책을 우연히 구해 읽었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정말 미친듯이 솟구쳐올랐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생각을, 정말 쉼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소리내어 읽는 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원숭이 마음에 너무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글을 쓸 때 늪이나 진창에 빠진 느낌에 빠지곤 한다. 소리내어 읽어보라.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97

최초의 글감은 우리가 정말로 써야 할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냥 손을 계속 움직여 쓰면서 무엇이든 글로 표현하라. 글이 글을 쓰게 해야지,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안된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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