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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새해 첫날 제야의 종소리를 듣지 않고 첫 페이지를 넘긴 소설.
'내 심장을 쏴라'.
12월에 읽었던 한강의 두 소설과 정유정의 소설의 형식상 가장 큰 차이점은, 역동성과 문체의 내면화에 있다.
심사평에서도 이미 쓰인바 있듯, 300쪽을 훌쩍 넘는 이 소설은 (물론 단숨에 읽히지는 않지만) 내면화 되지 않은 문체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9년 세계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왜, 이 소설은 내면화된 문체보다 역동적인 문장이 훨씬 잘 어울리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상 순수 소설가 한강과 (자의든 타의든) 상업 소설가의 기질이 다분한 정유정은 줄긋듯 구분되는 문학적 차별성을 갖게 된다. 정유정은 이야기꾼이고, 한강은 소설가다.
정신병원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작품 '내 심장을 쏴라'. 작가의 치밀한 자료수집과 상황묘사에 들어가는 실질적인 소재들을 보며, 새삼 간호사였던 작가의 전직이 부러웠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꾸 사회경제연구소를 다니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거다. 단지 사람들은 정신병동의 간호사가 연구원보다 역동적이라고 생각할테지만.
*정신병동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정의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자. (213)'
정신병동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떠돌던 때가 있었다. 멀쩡한 사람인데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를 탔더니 그 차가 정신병동가는 차였더라는. 그래서 그 뒤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사람이야기.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부류의 사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작품은 정신병동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정상적인 사람들을 구분해놓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 틈에서는 정상인 사람이 이상한 거다.
*愛: 정신병동의 사랑을 말하다
제로키 인디언들이 자작나무를 뭐라 부르는 줄 알아?
서 있는 키 큰 형제.
태양의 자식이란 점에서 나무와 사람은 형제라는 거야. (236)
열정적인 남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등장하는 형제애, 전우애, 그놈의 愛. 동양철학에서는 사랑 愛가 사실 '아끼다'라는 단어로 쓰인다는 것.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갇혀서 미쳐가는 승민과 미쳐서 갇혔지만 전혀 정상으로 보이는 우리의 주인공 수명 둘 간의 愛가 피보다 진하게 얶혀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가끔 독자는 잊게 된다. 여기가 정신병동이었던가? 특히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런 말을 내뱉을때.
미친 새끼들.
*내 심장을 쏴라.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240)
수명은 환청을 듣는다. 가끔 현자인 적도 있는 애증의 관계에 있는 수명의 어딘가에 붙어 있는 그 놈. 독자는 알고 있을까. 니가 누군지 정말 곰곰이 잘 생각해보며 사는 독자는 얼마나 있을까. 어딘가 숨어 있는 너의 분신말고, 세상에 내몰려 견디는 다른 나 말고. 진짜 나를 찾아본 적 있을까. 이야기가 한껏 고조되는 때 호수 한 가운데 정신병동을 벗어나겠다는 두 남자가 보트를 젓다 말고 호수밖을 향해 외친다. 너, 너를 아느냐고. 정유정 소설의 힘이 여기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구절이다. 이 긴 호흡의 소설을 만들어 낸 이유를 알 수 있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소설의 본질이 여기 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은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이놈은 스스로 죽을거야. (264)
정유정 소설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다.
질질 끌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왜 영화계가 정유정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것 같았다.
7년의 밤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영화같은 영상미가 도드라질 것 같다.
이 정도 내공, 어쩐지 빅 픽쳐에서 받았던 인상과 비슷했다.
장편소설을 잘 쓰는 작가와 단편소설을 잘쓰는 작가는 문체가 다르다.
정유정은 장편소설을 잘 쓰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