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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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포터는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통해, 놀랍도록 담담하게 이야기를 ‘뱉어낸다’. 이 행위 속에는 무기력한 주인공들과,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그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숨은 따뜻한 인간애들을 볼 수 있다.

 

포터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 같은 구멍을 갖고 있다. 그 구멍은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p.8) 크고 빈 공간이다. 이 구멍은 가끔은 동물(코요테)로, 가끔은 주인공(아술)으로, 가끔은 주인공과 내연관계에 있는 인물의 아지트같은 형태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드러난다. 이 구멍을 파고드는 끝에, 포터 소설은 진실의 형체를 오래도록 곱씹게 한다. 현상 안쪽에 가려진 진실,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진실의 모습이 무엇인지 독자는 오래오래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p.15)

 

#.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포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사건이 전달되고, 다른 인물들의 행위, 그것이 사회나 어떤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이 알려진다. 그러니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세상이 보여질 수 있는지,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생각들이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을 통제시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밝히고 있듯, 그들은 모두 자기 안에 갇힌 생각 때문에 세상을 너무나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무나 담담하게, 내가 ‘의심’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나는 아술이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p.77)

 

무채색의 주인공들 덕분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주변인은 온갖 색으로 덧입혀져있다. 그 색깔 역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밝혀진다. 비록 그것이 주인공들과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158)”.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무기력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수만도 없는 소시민들, 평범한 이웃들. 포터는 이 인물들을 조용히 소설 속으로 끌고와 담담하게 이웃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소설 안에 드러난 세 인물의 구도를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세상에 무기력해져버린 이유를 독자는 어느새 찾아버리게 된다. 주인공 헤더는 두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 로버트는 물리학과 교수이자 헤더의 선생이며, 매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세상에 임하는 인물이다.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 ” -로버트의 말 p. 97) 콜린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백하듯, '로버트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의대생이며, 수영선수이고, 젊고 활기에 가득차있다. 헤더는, 헤더는 결국 콜린과 결혼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에게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104)”) 콜린은 늘 예측가능하지만, 로버트는 예측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105))콜린은 바깥세상의 모든 것이고, 로버트는 바깥의 세상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있는 비밀스러움을 갖고 있다. 헤더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며, 로버트의 집에 찾아간다. 콜린과의 만남을 고대하지 않을 수록, 로버트와의 만남은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108)

 

세상을 사는 사람들, 우리들. 피상적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의 방황과 갈등, 인물에 대한 애착은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그것과 맞물린다. 바깥 세상과 닮은 콜린 -그러니 자본, 지위, 명예같은 바깥세상의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그것과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을 본능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p.120) 무력감에, 우리는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거의 대등한 위치에 두고있다. 그러나 독자는, 우리는 이 놀랍도록 무덤덤한 문체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등줄기에 땀을 쥐어낼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과 밀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버트가 갖고 있는 이상과 그 이상에 대한 갈구를 비밀스럽게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p.122)

 

진실은 어디에 가려져 있는가. 과연 우리가 겪고 듣고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진실에 얼만큼 닿아있는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유일한 진실이 우리가 숨기는 비밀에 있다(128)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129)뿐이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더는, 어둠 속에 앉아 오래도록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결국에 나는 (로버트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가슴이 멍울져 나를 크게 짓누르다가 빠져나간다. 진실을 알고 보는 것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시민적인 주인공들, 무채색인 그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들, 이 모두의 눈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 한다.

 

너는, 사랑할 준비가, 진실을 알 준비가,

되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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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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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정말로' 예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개정판.

들고 다니는 시간에 기분이 좋을만큼 예쁜 책.

 

소설의 기술에 대한 에세이, 대담을 묶어 만든 책인데 밀란쿤데라 소설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강의듣는 기분으로 읽었다.

 

소설을 쓰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어떤 이론적 상황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시 말하면, 소설을 '쓸' 때가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는) 작품을 구성할 때,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쓰기 전에 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소설이 무엇인가'와 같은 이야기를 해도 좋은 그런 시간이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라고 말한다. 33.

이 문장에 감명을 받아, 나는 방정맞게 별표를 쳐두었다.

자아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 그렇지만 절대로 답을 알 수 없는 과정. 나는 그것이 소설의 본질이자 삶을 통찰하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들이 사유하고 넘어가지 않는 부분. 철학자들이 이론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부분. 소설가는 유희와 이야기를 섞어 그것을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동감시키거나 무심한듯 던져놓는다. 그것이 소설이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비합리적인 체계가 이성적인 생각보다 얼마나 더 우리 태도를 좌우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만 하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어항 속 물고기에 대한 애착으로 내 신경을 건드리고, 어제 나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준 사람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불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95.

요새 내가 개인적으로 겪은 불신과 배신에 대한 경험을 소설은 유희스럽게 녹여넣는다. 그 '키치'가 꾸며진 것이라 하더라도. -비록 이것이 순수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없더라고 하더라도 김영하적 발상에서의 키치는 한국 문학사에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즉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에 있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116.

 

확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왜냐하면 확인할 필요가 없으므로) 소설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들의 생각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이기적이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 그 사람들이 얽혀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만큼이나 소설은 복잡하다.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환기되어서 우리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기는 하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138.

쿤데라는 스물다섯까지 문학보다 음악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많은 음악가들과 그 정서가 자신의 글에 영향을 주었다고. 무엇이든 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소설가의 일생이 그의 글에 녹아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가 '작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소설가'라는 단어를 고집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는 늘 자신의 작품 뒤로 숨어있는 작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악장의 길이가 거의 다 같다면 전체적인 통일성은 깨져 버릴 거예요. 135.

 

이 책 역시 통일성이 깨지지 않는 (모든 장의 길이가 다른)데, 6부에는 쿤데라 소설에서 사용된 단어를 낱말로 풀어주고 있다. 그 중 몇가지 고찰이 매우 독특한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죽음 노학자는 시끌벅적한젊은이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 강당에서 자유의 특권을 지닌 이는 자신뿐이며 그것은자신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사람이 자기 무리의 의견을, 대중과 미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이 들었을 때뿐이다. 나이 든 사람은 이제 가까이 다가온 죽음과 더불어 혼자이며, 죽음에는 눈도 귀도 없으며 그러니 죽음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 삶은 다른 곳에 중.

획일성 오늘날 획일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이란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이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주게 된다.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어떤 현상이 일반화되고 일상화되어 도처에 있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식별할 수 없게 된다. 획일적인 삶의 행복감에 도취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걸친 제복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 211.

소설을 쓰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역시 '사유'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단어에 대해, 인물과 공간과 시간과 사건에 대해 고찰하는 것. 그러한 사유가 녹아든 글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뿐 아니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소설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 바로 이 책, (다시한번 말하지만 표지가 아주 예쁜) '소설의 기술 (밀란쿤데라)'이다.

 

 

아래는 소설 기법에 관련된 인용구

 

저는 주제와 모티브를 구분합니다. 모티프라는 것은 주제나 이야기의 한 요소로서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항상 다른 맥락 속에서 여러차례 반복되죠. 무거움이나 키치같은 주제를 가로질러 가기도 합니다. 123.

 

-소설을 구성하는 것도 여러 다른 정서에 공간을 배열하는 것이라는 것, 제 생각에 이것이야 말로 소설가의 가장 섬세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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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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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소설 수업을 받아보지 않았다는 작가 정유정을 읽을 때면 늘,

그럼 나는 그만한 욕구를 마음속에 충분히 뿜어내고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도 애초에 이야기꾼은 아니었듯, 너도 기질을 발현시킬 때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긴 이야기는 결국 꿈같은 여행의 흔적이다.

평가자들은 리얼리티에 의문을 주었다지만, 내 외가가 있는 송정리 영광통과 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임곡이 나오는 이 소설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의 리얼리티는, '함께 따라갈 수 있느냐'에 있지 않는가.

 

몸의 피로와 출근 시간 상황에 따라, 삽시간이랄 건 없지만,

지하철안에서 잠자리에 들기전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4일 정도에 거쳐 읽었다.

그 사이에 은희경의 단편과 신춘문예집을 읽고 있다.

문장력이야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정유정이 이야기꾼으로서 발전하고 싶다는 말에 공감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 뒤에 나오는 소설 <내 심장을 쏴라>를 보면 공감이 간다. (개인적으로는 내 심장을 쏴라에 한표를 던져주고 싶다. 문장이 점차 뚜렷하게 몽울진다.)

 

정유정이 소설을 쓰기로 했을 때 두개의 종탑이 있었다고 한다.

한가지는 모험, 한가지는 스릴러.

이 두가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정유정은 이야기꾼으로서 스스로의 능력을 그동안 뭉클인채 탐구하고 있었나보다.

 

자 이제 작품이야기.

 

익살과 재치는 조금의 위악이 들어가기도 한다. 게다가 15살짜리 전라도에만 살던 아이가 아주 시끄럽고 복잡한 환경을 보며 잠실구장의 소리같다는, 경험도 못해봤을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숨가쁘고 격렬한 모험 속에서 삶을 통찰하는 능력은 변치 않았다. 그 힘이 정유정의 소설에 있는 가장 크고 무서운 힘이다.

 

어떤 장편소설을 읽다보면 그저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데 정유정은 늘 거기에 생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집어넣는다.

그게 기대되어, 400쪽이 넘는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게 스윽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7년의 밤 읽으면 정유정이 다 보이지 않을까.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 않는다면, 이 세권이면 작가의 글을 다 파악할 듯.

그러니, 이게 끝이 아니길 바란다.

 

닮고싶은 리얼리티가 들어간 문장.

아이는 어릴 때부터 곧잘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어딘가에 부딪쳐 상쳐를 입곤 했다. 밤에는 마당에도 혼자 나가지 못했다. 무지한 그는 몸이 약해 그러려니 하며 대처 한의원에서 보약만 지어다 먹였다. 그가 문제의 심각성을 때달은 건 아이가 열두살이 되던 해인 1980년 5월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주변 사물은 물론, 중심 사물도 명확히 보지 못했다. 그는 읍내로, 목포로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의사들은 야맹증과 시력 상실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데려가라며 소견서만 써주었을 뿐이다.

189

 

그리고 불쑥 불쑥 책장을 접게 만든 문장.

어쩌면 승주를 믿었다기 보다는 바라는 것을 믿으려 한 건지도 모른다. 209

눈을 떴다. 그러나 의식은 계속 꿈의 잔상과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배회했다. 355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이 더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다고 동의해줘.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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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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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혈투와 핏물이 낭자한 편혜영의 소설이 돌아왔다.

사육장 쪽으로는 사육장 '쪽으로'만 가고 있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란하고 즐기는 듯한 묘사로, 냉철하다못해 냉담한 시선으로 포착한 글이다.

 

다른 글들도 할말이 많겠지만, 우선 '사육장쪽으로'의 '사육장 <쪽으로>'가 이 책을 대변하고 있다니,

이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이 작품이면 이 책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다)

 

* 사육장과 집단화된 공동체사이의 비릿한 유대감
소설 속 '사육장'은 신락로에 난 마을의 옆에 어딘가 위치한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부러 내기 위해 소설은 사육장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나는 개짖는 소리는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주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개의 존재란 '가족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는'정도로만 여겨진다. 개들은 비좁은 철창안에서 같은 먹이를 먹고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팔리고 종내에는 처참하게 그슬려 죽을 존재로 (45) 만 그려지는 것이다. 사육장 속 사나운 개들과 신작로에 집단화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비릿한 유대감은 여기서 흘러나온다. 이미 작품 속에서 작가는 마을 사람들의 집을 형용하면서 '조립식 자재를 사용하여 거대한 레고블록을 쌓듯 모서리를 맞춰 나사를 조이고 자재를 끼워넣는' 일률화된 모습을 그려넣었다. (44) 혈투를 벌이며 싸우다가 도살되는지도 모르는, 엄청나게 사나운 사육장 개들을 묘사하던 작가는 공교롭게도 신작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 일률적이고 천진난만하게 그려넣으며 비교한다. 신작로 마을의 사람들은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비슷하게 살아가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각도와 횟수로 손을 흔드는 일률화된 사람들이다. 사나운 개들은 그 안에서 혈투를 벌이다가 사육장을 빠져나와 그야말로 미친듯이 주인공의 아이를 물어뜯는다. 그런 면에서 일률화된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도 사육장 안의 개들이요, 어디있는지 알 수 없는 사육장은 공상화되었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유같은 것이다.

 

* 주변인으로서의 주인공
주인공이 태어난 곳이나 성장기를 지낸 곳, 결혼하여 살림을 낸 곳은 모두 도심 외곽의 변두리이다. 그런 주인공이 변두리에 집을 지은 것은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혹은 자연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 그러나 단독주택마저도 도시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꾸며낸 가공된 꿈의 표면일뿐이다. 진정한 도시인의 꿈으로서 단독주택을 사들인 주인공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꿈이었는지 타인으로부터 각인된 꿈인지 잊어버렸을 정도다. 도시에 직장이 있는, 주변인으로서의 주인공은 파산날 지경에 이른 집안사정때문에 어느날 제 시간에 출근하지 못하고 지각을 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천개의 퍼즐 중 한 조각이 빠졌다고 하여 누구든 그것을 쉽게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무단 지각을 해버린 주인공은 퍼즐처럼 박혀 도시의 생활을 하는 하루동안 집안에 있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바쁘다'는 행위때문에 집안일따위는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도시가 뿜어내는 아름다운 불빛의 포근함을 느끼며 집이 있는 신작로로 돌아서는 길에, 급기야 그는 도시를 떠난 것을 '후회한다'.

 

* 개와의 혈투, 아이의 죽음
어느 날 휴일, 지켜보는게 관심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54)이던 그에게 지켜볼수만은 없는 일이 생긴다. 사육장의 개들이 신작로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부스럼 인 살갗에 뭉텅뭉텅 털이 빠져나간 사육장의 개가 주인공의 아이를 포위한다. 이빨을 아이의 몸에 박은 개들은 이번엔 아이의 가슴과 팔뚝의 살점을 뜯어버린다. 아이의 몰골을 본 부부는 급히 병원을 찾아나선다. 아이가 개들에게 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이웃들은 다급하지만 무심하게 사육장쪽으로 가면 병원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만 뱉어낸다. 그러나 한번도 사육장쪽으로 가본적이 없던 주인공, 사육장이 있다는 언덕을 넘지만 똑같은 모습의 마을만 발견할 뿐이다. 자신이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주인공, 분신같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차라리 개들이 짖는 소리에 의지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59)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이 사육장인지, 아이를 치료할 병원인지, 아니면 아이를 물어뜯은 개인지 헛갈려한다. (59) 마지막 보루로, 그는 자신의 직장이 있는 익숙한 도시를 향해 차를 내몬다. 아이가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평범한 소시민인 그는 쉽게 속도를 내어 병원이 있는 도시를 찾지 못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앞서가는 트럭의 꽁무늬를 따라가는 것 뿐이다. 한편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가로등처럼 그를 인도한다. (61)

 

*사육장- 넘을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사람들
소설은 무섭도록 규격화된 도시인의 삶을 침착하게 그려낸다. 일상적인 소시민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개인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보편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리얼리티는 상징화된다. 도시에서의 포근함이 불안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작가는 사육장 너머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동시에 유일한 문제해결의 대상을 소설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그러나 소시민인 주인공의 눈에는 그 모든 불안해소의 요소들이 공포와 두려움을 낳는 신호체계로서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갈등요소들 덕분에 주인공은 극대화된 불안 속에서도 '트럭의 뒤꽁무늬를 쫓는'소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며 다시 편안해질 수 있는 도시로 회귀하려는 근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안개에 휩싸인 도시의 무거운 적막앞에 다시 좌절하고 만다. '사육장 쪽으로' 갈 수도, '도시를 찾아 나서는 여정'도 불안하기만 한 사람들. 불안의 근원을 찾고 진단하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사람들, 불안을 피해가며 하루를 사는 현대인들. 그 면면이 소설 속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꼬집힌다.

 

불안한 소시민들의 삶,

작가 편혜영이 가지고 있는 주특기는

그것들을 적절히 오무린 듯 글 속에 냉담한 시선으로 처리하는 압축된 경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읽는 단편마다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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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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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쓸수밖에 없었다`는 평론가의 평가가 잘 어울리는 자기만의 색이 뚜렷한 편혜영의 단편집. 작가가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으니, 독자는 그렇게 읽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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