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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앤드류 포터는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통해, 놀랍도록 담담하게 이야기를 ‘뱉어낸다’. 이 행위 속에는 무기력한 주인공들과,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그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숨은 따뜻한 인간애들을 볼 수 있다.
포터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 같은 구멍을 갖고 있다. 그 구멍은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p.8) 크고 빈 공간이다. 이 구멍은 가끔은 동물(코요테)로, 가끔은 주인공(아술)으로, 가끔은 주인공과 내연관계에 있는 인물의 아지트같은 형태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드러난다. 이 구멍을 파고드는 끝에, 포터 소설은 진실의 형체를 오래도록 곱씹게 한다. 현상 안쪽에 가려진 진실,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진실의 모습이 무엇인지 독자는 오래오래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p.15)
#.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포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사건이 전달되고, 다른 인물들의 행위, 그것이 사회나 어떤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이 알려진다. 그러니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세상이 보여질 수 있는지,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생각들이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을 통제시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밝히고 있듯, 그들은 모두 자기 안에 갇힌 생각 때문에 세상을 너무나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무나 담담하게, 내가 ‘의심’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나는 아술이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p.77)
무채색의 주인공들 덕분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주변인은 온갖 색으로 덧입혀져있다. 그 색깔 역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밝혀진다. 비록 그것이 주인공들과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158)”.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무기력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수만도 없는 소시민들, 평범한 이웃들. 포터는 이 인물들을 조용히 소설 속으로 끌고와 담담하게 이웃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소설 안에 드러난 세 인물의 구도를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세상에 무기력해져버린 이유를 독자는 어느새 찾아버리게 된다. 주인공 헤더는 두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 로버트는 물리학과 교수이자 헤더의 선생이며, 매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세상에 임하는 인물이다.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 ” -로버트의 말 p. 97) 콜린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백하듯, '로버트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의대생이며, 수영선수이고, 젊고 활기에 가득차있다. 헤더는, 헤더는 결국 콜린과 결혼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에게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104)”) 콜린은 늘 예측가능하지만, 로버트는 예측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105))콜린은 바깥세상의 모든 것이고, 로버트는 바깥의 세상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있는 비밀스러움을 갖고 있다. 헤더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며, 로버트의 집에 찾아간다. 콜린과의 만남을 고대하지 않을 수록, 로버트와의 만남은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108)
세상을 사는 사람들, 우리들. 피상적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의 방황과 갈등, 인물에 대한 애착은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그것과 맞물린다. 바깥 세상과 닮은 콜린 -그러니 자본, 지위, 명예같은 바깥세상의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그것과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을 본능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p.120) 무력감에, 우리는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거의 대등한 위치에 두고있다. 그러나 독자는, 우리는 이 놀랍도록 무덤덤한 문체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등줄기에 땀을 쥐어낼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과 밀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버트가 갖고 있는 이상과 그 이상에 대한 갈구를 비밀스럽게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p.122)
진실은 어디에 가려져 있는가. 과연 우리가 겪고 듣고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진실에 얼만큼 닿아있는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유일한 진실이 우리가 숨기는 비밀에 있다(128)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129)뿐이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더는, 어둠 속에 앉아 오래도록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결국에 나는 (로버트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가슴이 멍울져 나를 크게 짓누르다가 빠져나간다. 진실을 알고 보는 것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시민적인 주인공들, 무채색인 그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들, 이 모두의 눈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 한다.
너는, 사랑할 준비가, 진실을 알 준비가,
되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