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A사. 지난해 이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과 연봉협상을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210분. 직원 수가 70 여명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한 사람당 평균 3분 만에 연봉협상을 끝낸 셈이다.
이 회사는 아예 하루 날을 잡아 직원들이 순서대로 사장실 앞에 기다리고 있다 차례가 되면 들어가서 준비된 계약서에 사인만 하고 나왔다. 대화도 협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연봉협상을 위한 평가기 준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 같은 연봉협상 관행에 환멸을 느낀 B씨는 6개월 후에 회사를 떠났다.
역시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D 사에서 경리를 맡고 있는 평사원 E 씨. 이 회사에 입사한 지 갓 1년이 안 되는 E씨가 받는 연봉은 3000만 원에 이른다.
입사시 연봉이 2000 만원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다른 회 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았다고는 하지만 몇 개월 사이에 무려 500만 원 정도 올라 입사 5~6년차의 대리 보다 약간 적게 받고 있는 정도다. 단순히 회사자금 출입을 관리하는 업무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연봉이다.
또 이 회사의 대졸 초임 평균연봉은 1800만원, 올해로 입사 2년차인 한 직원은 2800만원, 35세의 어떤 과장은 5000만원이다. 개인별로 연봉이 천차만별이다.
샅바 싸움과도 같은 연봉협상 시즌이 돌아왔다. 한 해 몸값을 결정하는 순간인 만큼 밀고 당기는 수준이 예사가 아니다. 마치 스포츠 선수들의 스토브리그를 연상케 할 정도로 치열한 신경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연봉협상에 임하는 직원들의 만족도는 떨어지기만 한다. 특히 일부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경우 에는 인사제도에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연봉협상시 적절한 평가시스템을 갖 추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CEO의 주관에 따라 연봉 수준이 결정돼 직원들 간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직장인들의 이직현상을 부추 기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 최근 정보기술(IT)전문 취업 사이트 ITJobpia(www.itjobpia.co.kr) 가 한국인사전략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국내 IT중소기업 65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IT기업 근무자 중 91%가 본인이 받고 있는 연봉에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봉 평가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는 직원이 80%를 넘었으며, 연봉 체계가 공정하지 못한 이유로는 기준이 합리적이지 못하다(84%)와 연공서열 중시(7%) 등이 꼽혔다.
또 이번 조사에서 설문대상 기업 중 83% 업체의 인사담당자도 공정한 평가방법을 모른다고 응답해 연봉협상에 임하는 직원이나 평가자 모두 현재 인사평가 시스템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다른 취업 전문업체가 직장인 27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중 80.8%가 연봉을 좌우하는 인사고과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답해 직장인 10명 중 8명은 인사고과 시스템에 상당한 불만이 있는 것으로 조사돼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회사 측의 페이스에 말려 서둘러서 연봉협상을 마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3분 만에 직원의 몸값을 매긴 A사의 경우처럼 기업이 제시한 연봉에 `사인`만 할 것을 요구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의 경우라면 첫 번째 자리에서 굳이 사인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시간을 벌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특히 자신의 실적을 수치화한 데이터를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취업포털사이트 관계자는 "능력 위주의 사회로 바뀌면서 연봉제를 도입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의 경우 공정한 인사 평가시스템이 미흡하다" 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연봉제도의 허실은 직장인들 사이에 이직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벤처 거품만을 야기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돼야 할 중소기 업과 벤처회사의 기반을 무너뜨릴 위험성도 안고 있다" 고 지적했다.
[헤럴드경제, 한석희ㆍ박홍경 기자, 0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