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 묵은 책 정리하셔야죠

지금은 그런 일이 드뭅니다만 20여년전만 해도 제가 살던 소도시에서는 여성이 시집을 갈 때 혼수품 형식으로 전집을 가져가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습니다. 20권은 족히 넘을 듯한 세계문학전집도 있었고 '왕비열전' '대망' '전설따라 삼천리' '법창야화'니 하는 책들도 있었습니다. 요리책도 필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요리책 전집을 사면 계량컵이라든지 오븐 등을 덤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들은 대개 할부로 거래가 됐습니다.

딱히 혼수품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 뭣 때문에 여성들이 챙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여하튼 동네 누님들의 결혼 때는 빠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남성들은 그런 책들을 좋아하는 여성들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몇몇 여성은 결혼때 가져온 책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집온 뒤 한번도 보지 않았으나 버리기도 아까워 책장에 그대로 두었는데 이제는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좀도 슬어 흉물이 됐답니다. 결혼생활 십수년에 몇번 이사를 했더니 그때마다 몇 권이 없어지기도 해 제대로 짝을 맞추기도 힘들 지경이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오래된 책들은 하나같이 본문이 세로로 편집되거나 한자가 섞여 있는 까닭에 아이들은 아예 쳐다보지를 않는다는군요. 요리책도 신혼 때는 마음먹고 몇번 펼쳐봤으나 점차 뒷전으로 밀렸고 이제는 있는지조차 모른답니다.

집에 책장이 없으신 분은 안계실 겁니다. 말 나온 김에 한 번 쭉 둘러보시죠. 거기에는 젊은 시절 고뇌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 있는 책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읽고난 뒤 베갯잇을 흠뻑 젖게 만든 감성적인 책들도 숨어 있을 겁니다. 몇 번을 읽었지만 또 읽고 싶은 책들이 들어 있을 터이고 책 제목만 봐도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들도 보일 겁니다.

책장에 꽂힌 책은 책 주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70, 80년대에 대학에 다니셨던 분이라면 암울한 시대를 준엄하게 꾸짖어 주던 사회과학책에 눈길이 한 번 더 갈 것이고, 가을을 넘어가려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신춘문예 열병을 앓으셨던 문학도는 손 때 묻은 소설책들이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 올 게 뻔합니다.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 짓던 분이시라면 시집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 됩니다.

반면 책장을 살피다 보면 "어, 이런 책이 우리 집에 있었나"하는 낯선 것들도 적지 않게 나올 겁니다. 낯설다는 것은 사랑이 식었거나 사랑을 한 적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의 속성상 언젠가는 한 번은 읽게되겠지 하고 내버려두시겠지만 제 경험에 비춰 보자면 존재조차 몰랐던 것들은 특별히 그 책을 찾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면 책 주인 손에서 굄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된장과 책은 묵힐수록 가치가 있다고 합디다만 오래됐다고 해서 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고서'는 아닐 겁니다. 채우려면 버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빈 공간만큼 곧 새로움이 자리하는 까닭이겠죠. 가끔은 묵은 책을 정리하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지금은 새 해 아닙니까.

(국제신문 염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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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무지 공감됩니다...

찬타 2005-01-0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