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대우학술총서 [2004. 12. 24]
지난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착잡해 했던 이들은 기초학문에 매진하던 우리 사회의 ‘딸깍발이’들이었다. 분식회계와 부도로 나라에 ‘커다란 우환(大憂)’을 가져다준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등비빌 곳도 변변찮았던, 실로 불우부진(不遇不振)한 기초학문분야에 거의 유일하게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대우재단의 앞날에 대한 걱정 또한 만만찮았던 것이다.
“나는 버는 재주는 있으나 쓰는 재주는 없으니, 불우부진한 분야에 도움이 되도록 써달라.” 1980년 김우중 회장이 기초학술진흥사업에 써달라며 대우재단에 2백억원을 내놓으면서 했던 말이다. 이 사업은 지금까지 기초학술분야 1,500여건의 과제를 지원했고, 그 3분의 1가량이 학술총서로 출간됐다. 전권위임받은 학계의 중진들에 의해 기금이 운영되면서 대우학술총서의 저자가 된다는 것은 학자들에겐 자랑으로 여겨질 만큼의 권위를 갖게 됐다. 이렇게 나온 책에 대한 평가는 두 마디로 요약된다. “정말 좋은 책이군. 그러나 안 팔리겠군.”
1983년부터 모두 580권의 총서를 펴낸 대우재단이 독립재단으로 거듭난 2000년 이후 5년간의 성과를 담은 ‘대우학술총서’를 최근 펴냈다. 대우의 지원이 끊기기 전 해마다 33권쯤 나오던 것이 이후 5년간은 연평균 22권으로 줄었다. 대우재단은 앞으로 출간 규모를 매년 10~15권 안팎으로 줄인다고 한다. 이 총서가 아니면 나올 수 없었던 책들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일본의 양심과 지성을 대변하는 이와나미서점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 ‘국민양식의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출판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훈장은 좋은 책을 사고 읽어준 일본인들의 지적 탐구와 독서열에 대한 것일 터이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선물로 대우학술총서 한 권 포장해 본다면 세밑은 또 다른 훈기를 남기지 않겠는가.
(유병선 논설위원)=경향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