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역사 '신고서점'을 가다  [04/11/01]
 
[그곳에 문화있다]19년 역사 '신고서점'을 가다

'곰삭은 지식'의 향기 솔∼솔

모든 상품은 시장에 나오는 즉시 중고품이라 할 수 있다. 고로 모든 ‘새것’은 ‘헌것’이다. 누군가가 “모든 책은 헌책”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직업상 책을, 그것도 신간을 항상 접하다보니 느끼는 게 있었다. 1주일 단위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책들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저 지식과 감동의 보고(寶庫)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역할 수행에 가장 근접한 헌책방에 가보자는 생각이 든 건 그래서였다. 한국외국어대 근처에 있는 헌책방 신고서점을 지난달 28일 찾았다. 열린 문을 통해 서점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종이 냄새가 끼쳐온다. 방금 인쇄한 따끈따끈한 신간이 풍기는 잉크 냄새와는 또 다른 세월의 깊이가 묻어 난다. 헌책방에 ‘향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보다 제법 큰 규모다. 8만권이 넘는 장서가 오밀조밀하게 배치돼 있었다. 창고에 보관된 책까지 합하면 20만권이 넘는다니, 일단 세상에 태어난 책은 어떻게든 갈 곳이 있는가 보다. 소장자가 직접 가져와 팔거나 출판사 사정으로 헐값에 넘긴 책, 고물상이 가져온 책들이 모여 이런 고풍스러운 문화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두꺼운 법전에서부터 어학수험서, 소설, 실용서적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책들이 옛 주인의 손때가 묻은 채 새 주인을 기다리며 앞다퉈 손을 내밀고 있는 듯하다.

취재 중에도 머리가 허연 노신사부터 가방을 멘 대학생까지 십수명이 다녀갔다. 서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적을 때는 하루 50여명, 신학기 개강 등 ‘대목’ 때는 그 10배까지도 손님이 몰린다고 한다.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 노화영(46)씨에게 말을 걸었다. “헌책방을 뒤지다보면 이전 주인의 냄새를 느낄 수 있어 좋지요. 책 속의 글귀나 메모를 발견하고는 옛 추억이나 감회에 빠져들 때가 많아요.”

사회과학 분야 원서들을 뒤적거리는 노씨, 상당한 수준의 독서 내공을 갖춘 모양이다. 기자의 무식이 탄로날까 봐 얼른 자리를 피했다.

한쪽에서 책을 들여다보는 대학생에게 다가갔다. 알고보니 한국외대도 아니고 멀리 광운대에서 원정온 학생이다. 이양원(26)씨는 “이곳에 책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리포트 작성에 참고할 자료를 구입하러 왔다”며 “가격이 저렴해 헌책방을 자주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또래 대학생들이 헌책방을 자주 이용하냐는 물음에는 “나 같은 사람은 많지는 않다”고 말한다. 우문이었을까, ‘새책방’도 잘 안 가는데 헌책방에 자주 갈 리가 있겠는가.

헌책방은 보물찾기 놀이터

헌책방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뭐니 해도 새책방에서 찾아보기 힘든 절판된 책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새책방처럼 체계적으로 분류돼 있지는 않은 터라 여기저기 뒤지다보면 “이런 책도 다 있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면 으레 했던 ‘보물찾기’가 연상될 정도다. 좋은 책은 우리가 아는 책보다 모르는 책들 중에 훨씬 많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책값이 만만치 않은 요즘 여러 권 맘껏 골라도 ‘단돈’ 만원이 넘지 않는 경제성 역시 헌책방만의 매력일 것이다. 헌책방 책값은 딱히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대략 절반 이하로 보면 된다. 비교적 신간이면 정가의 50% 정도, 10년 정도 묵은 책이라면 10∼40% 정도를 받는다.

하지만 헌책방이라고 해서 ‘구닥다리’로만 본다면 착각이다. 인터넷상에서 책을 판매하는 등 사이버 시대에 적응해가고 있다. 신고서점은 이미 5년 전 웹사이트(www.singoro.com)를 열어 매일 100권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점심 이후 오후 시간대에는 인터넷 주문분량을 발송하느라 분주해진다.

용산에는 25년째 영업을 해온 뿌리서점이 있다. 지난달 29일 비교적 한적한 노변에 위치한 이곳에 들렀더니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문구가 걸려 있다.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내부에 들어서자 그 말대로 아주 많은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만여권의 책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히 쌓여 있어 5갈래로 나뉜 통로가 비좁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지나기 힘들 정도다. ‘책더미에 파묻힌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른 곳에서 5년을 합쳐 30년 넘게 헌책방을 꾸려온 뿌리서점 주인 김재욱(59)씨는 책방에 들르는 손님들에게 자판기 커피를 대접한다. 김씨는 “훌륭한 서점도 아닌데 뭐하러 찾아왔느냐”며 취재를 거부하면서도 작금의 독서문화에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갈수록 책을 안 보는 즉자적인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어 문제”라며 “책을 많이 봐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조모(45·자유기고가)씨는 “옛 책 중에 좋은 책을 고르는 재미에 헌책방에 자주 온다”며 “아이들 참고서도 싸게 살 수 있고 발품을 팔면 괜찮은 책을 건질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10년째 뿌리서점 단골이라는 주부 김윤숙(34)씨는 “책을 소중히 다루는 주인 아저씨의 모습이 아이에게 교육적 가치도 있어 아이와 함께 자주 온다”고 말했다. 이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오래된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음악 CD 등도 취급하고 있다. 책방 면적에 비해 장서 수가 많아 일이 많음에도 노부부 둘이서 꾸리고 있다.

헌책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헌책방에는 대형 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늑하고 푸근한 특유의 운치가 있다. 오늘, 시간이 안 난다면 이번 주말 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 집 근처 헌책방에 한번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청계천 헌책방 거리도 좋다.

책은 사지 않아도 상관없다. 쌓인 책더미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바쁜 사람은 웹상에서 헌책방에 들러보자. 고구마(goguma.co.kr), 헌책사랑(usedbooklove.com) 등이 유명하다.


(세계일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4-11-0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인터넷에서 자주 찾는 헌책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