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주민 1500명 모두가 ‘서점 주인’

[‘헌책방 마을’영국 헤이온 와이]마을주민 1500명 모두가 ‘서점 주인’

런던에서 자동차로 5시간 남짓 달려가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경계에 위치한 헤이온 와이(Hay-On-Wye)가 나타난다. 이 마을은 브레콘 비콘스 국립공원과 와이(Wye)강을 가까이 두고 남쪽으로는 웅장한 블랙산맥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산간마을이지만,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군림하고 있다. 바로 마을 전체가 헌책방과 골동품점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 헌책방 마을을 찾기전 세계적인 관광명소에 걸맞게 편리한 교통 및 숙박시설을 상상했다. 하지만 기자의 기대와는 달리 2차선에 불과한 국도는 꼬불꼬불 이어졌고, 한번 길을 잘못 들면 차를 돌리기도 쉽지 않았다.

헌책방 마을 ‘헤이온 와이’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시골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지식의 샘터라고 할 수 있는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 향기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헤이온 와이는 900년전 노르만왕족인 브라우스 2세가 세운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39개의 헌책방 마을이 줄지어 서 있다. 헌책방에는 아이들 책에서부터 어른들을 위한 책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책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40여 ㎞에 달하는 서가에 약 100만종의 책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헤이온 와이는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광산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산간벽지의 폐광촌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이 산간벽지의 폐광 농촌마을에 괴짜가 한 사람 나타났다.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23세 청년 리처드 부스가 1961년 헤이의 소방서 건물 한켠에 헌책방을 연 것이다. 책읽는 사람이 없는 곳에 책방을 연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정신나간 놈’으로 불리며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책읽기와 책향기에 빠진 그는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마을 설립에 열정을 불태웠다. 영국과 아일랜드,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희귀본 고서는 물론 다양한 주제의 헌책들을 모았고, 일목요연하게 목록을 만들어 공개했다.

삐거덕 거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서가에 책이 쌓일 때마다 그의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는 식료품 창고와 영화관 건물에도 차례로 서점을 만들었다. 처음에 비아냥 거렸던 이웃 사람들도 부스의 열정에 감동을 받고 점차 하나둘씩 서점을 내기 시작, 마을 주민 1500명 대부분이 헌책을 사고 파는 헌책방이나 골동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며 서점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리처드 부스는 1977년 4월 1일, 만우절을 기해 술집에서 ‘헤이온 와이 독립 선포’라는 농반(弄半)의 즉흥 발표를 실시했다. 특히 ‘괴짜 책벌레’ 부스는 스스로 ‘서적왕 리처드’로 칭하고 마을 술집에서 내각명단도 발표했다. 이같은 부스의 괴짜 행각이 각종 매스컴에 대문짝 만하게 보도되면서 헤이온 와이의 존재는 영국을 넘어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헤이온 와이의 헌책방 1호점(Richard Booth's Books)을 운영하고 있는 리처드 부스(67)는 “인터넷과 컴퓨터는 책의 경쟁 상대가 될 수가 없어요. 인생의 주요 과제는 정보의 단순 습득이 아니라 ‘이해’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곳에서 보내는 5시간의 일정은 너무나 짧다. 마을에 들어선 39개의 서점을 그냥 둘러보는데만도 서너 시간이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헤이온 와이를 찾는 기쁨은 바로 ‘책더미’라는 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고 직접 사보는 것이다. 1파운드(약 2200원)짜리는 물론 많은 책을 구입한 후 덤으로 달라고 흥정만 잘하면 책을 공짜로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10년 전과는 달리 헤이온 와이의 헌책방에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쌓아놓던 헌책들을 도서관처럼 서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고서’와 ‘희귀본’에 한해서는 일반 서점의 신간도서보다도 더 비싸게 팔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도 싼값에 책을 사는 재미에 푹빠져 ‘어린이책 희귀본’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가 무려 350파운드(약 77만원)라는 엄청난 가격에 놀랐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책을 샀다는 사실에 쓰린 가슴을 달래면서 책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기자에게 리처드 부스는 이런 충고를 던졌다.

“한국에서도 지금 저희 헌책방 마을을 모방해 파주출판단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헤이 온 와이는 파주출판단지처럼 새롭게 건물을 신축한 것이 아니라 옛날의 집을 약간 리모델링해서 전통을 살렸기 때문에 성공했지요.”

헤이온 와이가 ‘책 소비자’를 위한 천국이라면, 한국의 파주출판단지는 ‘책 생산자’를 위한 천국을 꿈꾼다. 과연 ‘우리도 헤이온 와이처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출판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런던으로 향하는 차에서 기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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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2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등장하는 헌책방 마을... 그곳처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우리 나라에 헌책 사랑하는 인구가 적다는 생각이 들어 반신반의했더랬지요. 파주... 성공할런지... 청계천에 그 많던 헌책방들은 다 어디로 갔을런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찬타 2004-10-2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헤이온 와이에 대한 기사들이 참 많이 등장하더라고요.. 싸이월드에 헌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카페도 있던데... 회원수는 많더라고요... 월마다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활동도 하고... 그런데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얼마 없는 듯... 파주출판단지는 일종의 책공장 같은 곳이어서 헤이온 와이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요... 나름대로 특화된 도시로서의 매력은 있겠지만 비교 자체가 안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