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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평점 :
책을 받아보니, 그래도 사랑, 이라 적혀 있었다. 그래도 사랑이라. 사랑만큼 낯설고 진부한게 또 있을까 생각했다. 아, 죽음이라던지 자유라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은 죄다 낯설고 진부하지. 그래도 사랑이라니, 사랑거부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사랑이라는 말이 자꾸 눈 앞에서 걸렸다.
책장을 펴고 덮은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만 어쩐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말이 계속 가시처럼 남아, 나처럼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이 이런 글에 대한 답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책은 참 재미있게 읽었다. 궁시렁거렸어도 책장을 펴자마자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도 않고 말이다. 그럼에도, 아마 오늘 밤이 없었다면 영영 못쓸뻔 했다.
자다 일어나서 다시 잠들기를 기다렸는데도 눈은 말똥말똥.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켜는데, 못보던 암호가 걸려있었다. 귀찮다, 정말 이런거 정말 귀찮다, 분명 남편의 짓이다. 생일이라고 진수성찬을 차렸더니 나에게 암호 걸린 컴퓨터를 내놓다니. 짜증이 나면서 남편을 어떻게 깨우나 고민했다.
그 때, 무심코 눌러본 숫자 네자리. 내 생일도 아니고 남편의 생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혼 기념일도 아니고 아이 생일도 아닌 그 숫자는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짜였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뭐 이런 걸 다 기억하나 싶었다. 적당한 연애기간에 적절한 시기에 결혼을 한 우리. 지루할만큼 표준적으로 아이를 가졌고 누가 본다면 모범적인 결혼생활이다. 실상은 정글처럼 물고 물어뜯기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날은 차에 기름이 없다는 이유로 싸우고, 다른 날은 대답도 안한다고 폭팔한다. 정말 심심할 틈이 없이, 전혀 모범적이지 않게 살아내고 있는 우리다.
그런데도 0324라니. 그래도 사랑이구나, 싶었다. 지긋지긋하게 버리고 싶어도 함께 살아가는 이유는 그래도 사랑이었다. 책 제목처럼, 델 문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거야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돌고 돌아 보니 사랑은 나의 거울이라, 내 자신만큼의 사랑을 되돌려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심한 척 했지만 그래도 결국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암호 걸린 컴퓨터처럼 말이다.
하나 하나의 단편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 같아 안쓰럽고 뭉클하였다. 그래도 가슴이 헛헛하지 않은 건, 그들에게도 모든 것은 단 하나, 사랑이다. 사랑. 참 진부하다. 그럼에도,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