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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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다. 산도 싫고 여행도 싫고 도시도 싫고 벌레도 싫은, 싫은 것이 오지게도 많은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중 하나, 바로 산책이다. 느릿느릿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로 걷다보면 성질 급한 나에게도 여유란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책, 용산의 거리를 걸은 산책기라 생각했다. 에세이니까, 부담없이 편하게 이 밤 보내는데 좋겠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헷갈린다. 용산의 거리를 다녀온 건지, 저자의 머릿속을 다녀온 건지.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라는 제목은 정말 제대로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산문적인 곳이었던가. 내가 아는 용산의 키워드는 용산역, 국립중앙박물관, 홍등가, 전자상가. 이게 전부이다. 이태원까지 이르는 용산의 거리 속에 저자의 생각, 용산의 역사, 현재들이 모두 '현존'해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책이 아니었다. 세운전자상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엿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곳을 찾는 가장 절박한 사람 중의 하나는 개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짧지 않은 시간 어렵게 작업한 데이터나 소중한 기억들을 대신하는 파일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완벽한 무력감에 대하여.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또 알게 될지도 모른다. 기억의 하드디스크는 언젠가는 반드시 망가질 것이며, 누군가가 그것을 복원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몰락한 전자상가를 보며 참, 세월이 무상하구나 생각한 적은 있다. 컴퓨터 조립으로 호황을 누리던 때도 있었는데, 카메라 사려면 당연히 용산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옛말이구나, 싶어서 삶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느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컴퓨터 수리가 기억의 하드디스크까지 연결될 줄이야. 저자의 깊은 사색은 용산 곳곳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감탄을 자아낸다. 산책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지적이다. 길을 걷는 사색가, 정도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생각한다는 느낌은 단어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러했다. 새 용산역 주변의 아이파크몰과 홍콩의 하버시티, 부산의 센텀시티를 연결지어 사색한 점이다. '시티'는 외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그의 표현에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저 답답하고 숨막힌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시티가 가진 속성- 모든 가능한 것이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바깥으로 가는 길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이었다. 저자는 단어가 갖는 본질을 꿰뚫어 용산의 곳곳을 파헤쳐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용산의 여행객이 되어 저자의 가이드를 받으며 이 도시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나치게 산문적으로.


"여행객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장소의 스토리를 말해주기 전에는 그 장소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그 장소의 의미는 여행객의 시선 앞에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무화된다."


저자는 용산의 스토리를 말해주며, 용산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용산이라는 곳에 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용산의 스토리를 알게 되고 그 의미를 느끼고 나니, 용산은 더이상 그저 그런, 춘천행 중앙선을 타는 환승역이 아니었다. 이질적이면서 키치적이고, 식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타깝고도 먼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용산에 대한 감정이 생겨났다.


나에게는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었다. 저자의 사고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용산에 대한 내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럼에도 밤에 읽기에 참 좋았다. 산책은 밤에 하는게 아니지만, 사색은 밤이 제격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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