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대처하는 10가지 태도 - 이순신과 9명의 승부사들
이희진.장준호 지음 / 아름다운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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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대처하는 10가지 태도

 

 

 

요즘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임진왜란 때 선조와 이순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 나는 자꾸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순신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마도 어려운 시대는 있고, 그 어려운 시대를 이겨나가는 모습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영웅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백성을 사랑으로 책임을 이끌고 나가는 위정자가 그리워서일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각박해진 상황 속에 이순신 같은 영웅 내지 리더를 학수고대하는 마음 때문일까?

 

이순신은 타고난 영웅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고의 결과를 낸 사람이다. 임진왜란이란 난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전란은 그를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1591(선조24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라도 좌수사에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라좌수영 본영과 예하 부대의 군비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관할 지역을 직접 점검하고 관리 소홀로 규정 위반이 있을 때는 각 진의 첨사와 군관, 담당 관리와 자인까지 처벌하였다. 평상시 자기가 맡은 임무에 소홀함이 없이 엄격한 자세를 갖게 했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의 형평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거북선을 새롭게 건조하여 언제일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592415일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졌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이순신은 구원 출정을 다음 전 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첫째 전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차단하는 것, 둘째 지휘관 스스로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과 군사들에게는 필사적으로 싸워야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장수로서 책임감과 임무수행자로서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전투를 지휘해야할 자신이 두려움이나 혼란에 빠지면 군 전체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의 침략상을 군사들에게 환기시켜 왜적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냄으로써 적을 응징해야 한다는 전투의 동기를 심어주었고, 사생결단의 각오로 출전하되 물러서서 장수에게 군법의 지엄함을 보여 출정을

독려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엄수하면서 전쟁에 임해 매 전투마다 승리할 수 있었다.

 

선조는 자신이 살아야 조선도 있었다.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을 갔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결국 후손들은 이순신을 난세의 영웅으로 알았고 선조는 비겁한 군주로 생각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행운이었을까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배신을 당한 그 순간, 순간 포착을 잘 잡아 오다 노부나가의 권력을 차지한 그는 일본을 통일하였다. 히데요시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을 때, 스스로 힘을 키워 슈고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지역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세력, 센코쿠다이묘이다.

 

히데요시 그는 주군의 눈에 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그의 행보는 입지전적인 인물에게 갖게 되는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신분에 따라 거주지를 제한했고, 농민들의 무기 소지를 제한하여 자신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자신처럼 출세할 수 있는 통로를 막았다. 민초들이 힘을 합하여 권력에 저항할 길을 막았다. 거기다가 조선침공을 무리하게 감행해 내부의 불만과 위기를 외부로 화살을 돌려 잠재우려 했다. 7년을 끌다가 그의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버린 임진왜란, 히데요시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고 이를 개인적 욕망을 위해 이용했던 인물 이상 아무것도 아녔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장거정이라는 명재상을 기용하여 재위 10년 동안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여 쇠락하는 명나라 활기를 불어넣은 군주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복잡하고 냉혹한 정치 현실에 정치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국내외 발생한 변란에 재력, 인적 재원을 소비하며 쇠락해 결국 후금하게 나라를 내주고 만다.

 

류성룡은 전란을 맞아 후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관료였다. 군주의 질책과 붕당세력들의 견제, 탄핵, 실각 등의 정치적 파란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무했다. 통신사에 대한 잘못된 그의 판단, 그것이 임란의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면 주변의 신망이 두텁고 백성들의 존경과 신뢰가 두터울수록 반대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지속적인 견제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왕조차도 내외의 신망이 두드러지는 자를 경계하기 마련이다. 선조는 임란의 책임을 재상에게 떠맡겼고 관료들은 책임 문제를 권력투쟁에 이용하였다.

 

 

신립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류성룡을 비호하는 세력과 대립하면서, 아무도 나서려하지 않는 전쟁터를 류성룡이 나가겠다고 하자 신립이 경험 없는 문신들이 상전 행세를 하면서 부대를 인솔하려는 것을 반대하였다. 류성룡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신립을 그들은 오합지졸을 안겨 전쟁터로 내보냈다. 정작 죽을 자리로 신립을 보낸 것이다. 결국 신립은 충주까지 내려가면서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훈련된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일본군을 막아내느냐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밀리고 밀려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맞아 전쟁에 패했다는 말은 정장인 고니시까자 바보로 만드는 발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당시 일본 조총은 화약에 불을 붙여 장전해서 쏘면...화살보다도 느렸다고 한다. 조총 때문에 전쟁에 졌다는 말도 어쩌면 맞는 말이 아니란다. 신립만 배수진을 쳤다고 몰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편견을 만드는 꼴이라고 저자는 말이다. 이 전쟁이 신립이 잘못했다기보다 고니시가 압도적으로 전략을 잘 활용하여 선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나의 이익이 주군의 뜻보다 우선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이묘에서 성장하였다. 반대하던 전쟁 선봉장이 되었지만, 그는 전쟁을 서둘러 끝내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최대한 주군의 뜻을 관철시켜야 하는 협상에서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협상의 상대와 짜고 자신의 주군을 속이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무모한 것이었고 결국 실패했다.

 

만력제의 희망이던 이여송은 실리가 없으면 싸우지 않았다. 1952년 이여송에게는 명 제국의 명운이 달렸다. 그해 이월 영하에서 몽골 출신 보바이 난을 평정해, 이여송은 만력제의 희망이었다. 그러던 그가 임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어,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벽제관 전투에선 일본군에게 패하였다.

 

이여송에게는 보바이 난을 진압하던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국왕과 대신들로부터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신격화된 존재로 남았다. 그것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그를 임진왜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임란을 통해 바라본 역사 속의 인물들이, 새삼스럽게 다른 인식의 척도를 갖게 만든다. 각자 입지에 따라 난세를 극복하는 방식이 다 달랐다.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전쟁을 바라보는 눈을 갖고 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 새로운 의견들을 읽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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