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1 - 드라마 대본집
박경수 지음 / 북폴리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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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을 때, 희곡을 두 편 읽었다. 중간고사로 하나, 기말고사로 하나. 전자는 희곡은 정말 재미없고 어려운데 무대에 올라간 뮤지컬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후자는 희곡은 게눈 감추듯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는데 연극은 보고 있자니 잠이 올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공연하고 극본은 별개인가보다.' 


문자로 재현되는 이야기와 영상으로 재현되는 이야기는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방식의 차이는 독자의 이해에 차이를 가져온다. 더구나 극본은 드라마, 혹은 공연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위한 수단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아무리 이미지의 재현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라고 해도 극본이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는 없고, 영상과 무대보다 감동과 재미가 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자체가 결과물인 소설보다는 당연히 덜 재미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다. 내가 이제까지 읽어본 희곡들은 그랬다. 공연보다 재미 없거나, 재미 없는 공연의 재료가 되거나, 어렵고 현학적이거나, 재미가 없거나. 




 



극본에 몰입하다


편견은 깨졌다.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대본은 웬만한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재미있는 극본에서 만들어졌다. 이야기의 서사가 재미있다면 그 서사를 스크린으로 옮기든 글로만 보든 그건 관계가 없었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사건의 연속. 단순히 글로만 보는 것인데도 머릿속에서 영상이 펼쳐지고, 끊임없이 가슴을 졸였다. 어째서 사람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그렇게 추천했는지 대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휘말려서 가슴 졸이며 읽었다. 영상도 음악도 묘사도 별로 없는, 그냥 대본인데. 왜 이렇게 흡입력 있는 걸까. 이걸 드라마를 보고 읽어야하나, 드라마를 보면서 읽어야하나, 드라마를 안 보고 읽어야하나 하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드라마 시청은 '이게 재미 없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에서 나온 고민이었으니까. 추적자는 다른 장치 하나 없이 '이야기' 하나만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저의 꿈은 제대로 된 '극'을 하나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기승전결이 맞아떨어지고, 사건의 개연성에 하자가 없고, 인물의 감정선에도 흠결이 없으면서도, 쉼 없이 사건이 몰아치고, 극이 계속 진행되고, 갈등은 계속 증폭되면서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달려가는 100부작짜리 극을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_1권 4쪽 작가 서문



이야기에 애가 타다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동생이 열심히 보는 동안 소리는 계속 들었고, 지나가며 장면 몇 개도 주워 보고, 대체 저게 뭐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그 땐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이 가끔 이야기해주는 걸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딸이 죽어서 범인을 찾는다고? 그래서 뭐? 가수랑 정치인이랑 어떻게 엮이는 거야? 






고등학생 수영이의 죽음이 어떻게 정치적 상황과 엮이는지, 범인을 잡아내고 진실을 밝히려는 아버지 홍석의 노력이 어떻게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가는지는 일단 보면 안다. 진실을 알리려는 홍석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해 내가 뭐라고 묘사를 할 수가 없다. 다만 보는 동안 함께 달리고, 안타까워 할 뿐이다. 진실이란 무엇인지. 진실이 대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괴로워 해야하는지. 나는 아마 홍석같은 이들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절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진실을 은폐하는 시도는 의외로 너무나 쉽다. 대의를 위해, 더 나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도 너무나 쉽다. 그러나 한 소녀를 짓밟고 간 그 길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결국 나은 세상이 아닌 자신의 세상을 만들 뿐일 텐데. 


홍석 : 진짜 미안해야 될 놈들. 강동윤, 서지수, 장병호, 이런 살마들은 한 번도 미안하단 말 안 하는데…

정우 : …

홍석 : 어쩌면요. 우린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놈들하고 싸우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2권 169쪽



정말, 읽는 동안 애가 타서 죽는 줄 알았다. 글로 느껴지는 긴박감이 이렇게 강할 수도 있구나. 극본이라는 게 이렇게 흡입력 있는 거구나. 몇 번이나 눈물을 글썽이며 얻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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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 개정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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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일상 속의 수수께끼라는 것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내 지우개는 어디 갔을까. 왜 통장에 벌써 돈이 없을까.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응? 이런 건 일상의 수수께끼라고 하기에는 좀 시시하지 않느냐고? 내게 있어 가장 미스터리한 일상은 저런 건데. 오늘만 해도 내 자가 사라져서 찾아다녔다. 항상 제자리에 없다니까. 범인은 분명히 집요정! 집요정이 몰래 내 물건 위치를 바꾸는 게 틀림 없다. .....내 기억력 문제지. 에라.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상의 수수께끼를 이야기한다. 일상 속의 미스터리라는데, 내가 겪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애초에 '안경 어디 뒀더라'가 일상 최대의 미스터리인 나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는 소설 속에서 건설회사의 사내보 편집장으로 변신한다. 그녀의 소설은 설정상 아마추어 소설가의 작품으로 변한다. 틈틈이 썼던 소설은 어구의 통일도 안 되어 있고 틀린 부분도 있지만 아마추어 소설가의 작품이기에 문제가 안 된다. 게다가 그러려고 일부러 틀린 부분도 있다고 한다. 영리하다. 


다만 친구 중에 미스터리풍 이야기를 쓰는 녀석이 하나 있어. 왜 그런지 단편을 좋아하는데다가 제법 시건방진 문장을 쓰지. 다만 본인도 말하듯,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은 없어. 하지만 자기가 체험했거나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에 생각지도 못한 해섯을 부여하는 묘한 재능을 갖고 있거든. 그러니 미스터리풍이라 해도 될 것 같지 않나? 와카타케 군은 대학시절에 살인이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는 벤케이가 나오지 않는 간진초라고 했는데, 나이를 좀 먹었으니 지금쯤은 생각이 달라졌겠지._11쪽




미스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오다


어쨌거나 사내보 편집장 나나미는 익명의 소설가에게서 사내보를 위한 단편소설을 받는다. 사나다 건설 컨설턴트의 사내보에는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총 열두 편의 소설이 연재된다. 선배의 주선으로 알게 된 작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벚꽃놀이, 동네 야구, 발렌타인 데이, 사람 이름 맞추기 등 아주 소소한 미스터리들이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사건을 미스터리로 해석해내기도 하고, 때로는 진짜로 미스터리한 괴담 같은 것도 들려준다. 괴담은 왜 있냐고? 마지막에 나온다.


어쩌면 이 '나'도 꽤나 명탐정 기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을 불러오는 사람 말이다. 아니면 사건을 직접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건이라는 건 해석하기 나름일 테니까. '나'는 정말 시시한 이야기도 웃기게 이야기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처럼 별 거 아닌 일도 사건으로 둔갑시키는 명탐정의 힘, 아니 소설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거창한 살인도 악랄한 범죄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미스터리로 바꾸는 힘 말이다.



정신이 들자 도서관 창문으로 붉은 저녁 햇살이 들이비치고 있었다. 나는 끝도 없는 상상을 접고, 책 더미를 안고 일어섰다. 어차피 상상에 지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 나는 녹초가 되어버렸다._59쪽


여기서부터는 나의 상상이다._304쪽







이야기 이면의 이야기


사소한 미스터리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익명 작가의 연재 단편 소설이 그 단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익명 작가를 섭외하는 데 오간 편지, 그리고 1년 후의 편집 후기는 단편 소설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맡는다. 열두 편의 단편은 개별 작품 내의 수수께끼만이 아니라 작품 밖의 수수께끼까지 숨기고 있는 것이다. 난 몇 가지 사실은 읽어가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그걸 어떻게 연결해 볼 생각은 못했다. 나도 참 둔한가 보다. 익명의 작가가 누구인지, 뜬금없이 느껴지는 단편 소설은 왜 여기에 끼어 들어갔는지. 나야 끝까지 다 읽고서야 '그런 게 있었어?' 싶었지만, 편집 후기를 보기 전에 나나미처럼 추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미스터리한 일상도, 일상을 미스터리로 바꾸는 것도. 나도 이런 식으로 스쳐가는 사건들을 해석할 수 있으면 생활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나도 이런 일상을 겪을 수 있다면! 근데 그런 식으로 관찰도 못 하겠고, 나는 명탐정이 아니라 사건도 안 오니까 그냥 안 미스터리한 일상이나 보내야겠다. 


그 대신 시간이 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평일의 텅텅 빈 도서관에 하루 온종일 죽치고 있을 수도 있고, 걸어서 다른 동네 주민회관에서 상영해 주는 옛날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전날 밤 기침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기분 좋게 일어났을 때에는 조금 멀리 나가 다마천까지 쑥을 뜯으러 갈 수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은퇴한 노인네 같은 생활이었지만, 그런 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했다. 즉 나는 혼자 놀기에 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뜻밖의 발견이었다._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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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만화로 읽다 - 학교, 미술관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진짜 미술 이야기
장우진 지음 / 북폴리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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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섰을 때 생각했다. '이거야? 별로 감흥이 없네. 생각보다 색도 더 칙칙하고.' 

다 빈치의 <모나리자> 를 보고 생각했다. '다들 별 거 없다더니 진짜 별 거 없구나.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뭔가 느낄 수 있을까 한참을 봤지만, 결국 감동 없이 모나리자를 봤다는 인증샷만 찍고 돌아섰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들은 수없이 복제된다. 우리는 손 쉽게 걸작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예술이란 이미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왔다. 아우라는 상실되어 가고, 나는 유명한 작품들의 앞에서도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근데 진짜 아우라의 상실 때문인가? 그냥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아무 것도 못 봤던 것은 아닐까?




장우진 작가가 그리고 쓴 『미술, 만화로 읽다』는 미술을 읽는 눈을 빌려준다.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책 전체를 할애한다. 역사별로 달라져온 미술의 기준, 장르의 변화, 작품과 작가, 감상자의 관계. 미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수 많은 인물들을 끌어온다. 알던 이야기, 모르던 이야기가 나와 뒤죽박죽으로 미술에 대해 떠들어댄다. 작가의 식견을 대변하듯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책의 부제는 '학교, 미술관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진짜 미술 이야기'이다. '정말 알려주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약간 회의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학교에서 배우고 미술관에서 겪었던 내용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조금 관련된 전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전공자들에게 이 책은 많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술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에게는 『미술, 만화로 읽다』가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책은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미술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관해 가볍게 접근하려 한다. 마냥 가볍지도 않지만, 또 마냥 무겁지도 않다. 미묘한 균형을 지키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설명을 위한 장치로서의 만화이다 보니, 만화 자체의 재미는 놓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렵지도 않다. 어려운 이야기를 펼쳐놓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술술 읽히다가도, 생각을 해보기 위해 잠시 멈춰야 한다.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읽어보니 색다르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친근하다.

이제 사진과 영화가 회화와 조각보다 사실에 대한 더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기록이 된 것이다. 셔터만 누르면 손쉽게 실제 모습과 같은 환영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모방, 환영은 이제 환전히 끝나버린 문제일까?_317쪽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어렵고.

책은 플라톤의 그림자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미술이 그림자라면, 그림자를 읽어내는 노력이 있어야 실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색다른 관점에서 쓰인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미술을 볼 때를 대비한 기초를 다지기 좋다고 보인다. 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할 거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그렇다, 사색할 거리. 책을 읽는다고 미술이 그냥 쉬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가지 개념들이 들어온 만큼 괜히 더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이지만, 아는 만큼 어려워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미술의 개념이 이렇게 저렇게 발전해서, 그래서 지금은 뭐가 미술이라고?'스러울 수도. 그러나 답을 찾는 표지판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일. 개별 작품에 대한 설명보다, 미술을 더 잘 보기 위한 배경 지식을 넣어주는 데 주력하니 그 배경지식을 잘 쌓아 올려보자. 

작가와 공모해 상상력을 발휘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은 단순한 붓질, 물감 덩어리가 아니라 세상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결국 자연을 모방해 예술을 창작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모든 일이 심리적 차원, 즉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_149쪽



내멋대로 볼래요.

책을 읽고 나서 내린 결론 치고는 참 이상하지만, 남들 좋다는 그림을 굳이 즐기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같다. 미술 작품이라는 게 시대마다 기준이 다른 거라면, 좋은 미술작품의 기준이 개개인마다 다른 건 당연한 것아닌가. 난 <모나리자>와 <해바라기>에는 실망했지만, 클로드 모네의 <웨스트민스터 다리 밑의 템즈강>이나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모더니즘이든 아방가르드든 포스트 모더니즘이든 인상파든 건축이든 조각이든 간에, 내가 좋아하는 미술 작품을 내 방식대로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알면 더 재미있겠지만. 

세상엔 많이 알아서 병이 되는 경우도 있다.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나머지 그림 앞에서 아는 사실을 복습하거나 눈도장 찍기에 바쁜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는 체보다 애정 어린 관찰이 아닐까? _57쪽




+다비드상 종이 인형 놀이는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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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l: Paper Poetry (Hardcover)
David Pelham 그림 / Little Simon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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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많이 들어가는 그림은 현란하고 화려합니다. 색이 없이 하얀 공간은 순수하고 때로는 우아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웨딩드레스처럼요. 범접할 수 없는 순수함. 그런데 그 하얀 공간에 누군가가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저분한 흔적은 아닙니다. 은색의 가느다란 선은 순수를 더럽히기는 커녕 그 안에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팝업북 『TRAIL』 이야기입니다.



『Trail』은 하얗습니다. 은색 선을 빼면요. 책 속의 세계는 탈색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쓰이지 않고 그려지지 않은 하얀 종이는 접히고 잘리고 붙는 것만으로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표지의 구멍에서 나온 흔적은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뒷장으로 이어집니다. 



새, 도마뱀, 잠자리. 작은 생명들이 풀 숲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하얗고 투명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 비닐도 쓰이네요. 

이렇게 색이 배제된 팝업은 팝업 그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하얀 종이만으로 이렇게 화려하고 복잡한 느낌을 전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색이 없는 세계 임에도 형태가 분명히 보인다는 게 대단하지 않나요? 작가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까요.  




페이지마다 이렇게 짧은 문장이 실려있습니다. 휠을 돌려 가며 읽을 수 있습니다.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책 위에 흔적을 남겼던 건 달팽이였습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연못 옆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호수에 비친 모습은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그럼 이 하얀 세상은 본래 세상의 그림자였던 것일까요? 



팝업으로 만들어낸 시, Trail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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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드 매치드 시리즈 2
앨리 콘디 지음, 송경아 옮김 / 솟을북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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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드』는 매치드 시리즈의 두 번째 권. 

이 서평은 『매치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매치드 : http://dalaiaca.blog.me/110130085686




척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사회라면,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을 리가 없다. 삶이 억압당할 때면 자연스럽게 자유를 꿈꾸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사회가 믿을 수 없이 강력할 때, 그 사람들은 음지로 숨어들어 비밀 결사를 결성한다. 겉으로는 일상을 영위하며 뒤에서는 혁명의 꿈을 꾸는. 그런데 어두운 곳까지 숨어든 세력과 접촉하려면, 그들과 함께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어떻게 찾아야하는 것일까.






『매치드』의 다음 권인  앨리 콘디의 『크로스드』는 디스토피아 사회인 소사이어티를 떠나 봉기세력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카시아와 카이는 전 권의 마지막에 이별을 했다. 카이는 다른 어딘가로 분류되어 보내졌고, 카시아는 그를 찾아 나섰다. 총알받이로 보내졌던 소년 소녀들은 협곡으로 도망치고, 카시아는 카이의 흔적을 쫓아 간다. 소사이어티에 대한 반역과 인도자의 꿈을 꾸면서. 



카이와 카시아


크로스드는 모두 카시아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매치드와 달리 카이와 카시아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렇기에 '소사이어티'의 일면만을 보여주던 매치드와 달리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일탈자로서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카이의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카이의 과거, 그의 가치관. 카시아의 꿈과 카이의 꿈 사이의 어긋남. 카이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생각만큼 이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카이와 카시아가 미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젠더가 '게임'을 함으로써 세 사람은 여전히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우리가 카빙 대협곡에서 뭔가를 발견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누구를 이끌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_82쪽


'하지만 할아버지, 저는 제가 이해한다고 생각한 만큼 할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시 두 편이요. 저는 할아버지의 의도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제가 믿기를 바라신 건 어느 쪽이었어요? _232쪽

 





두 세계 사이를 잇는 강


매치드가 소사이어티 내부의 사회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면, 크로스드는 소사이어티 밖의 남겨진 세계를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만든다. 일탈자들 사이의 막연한 희망과 소문, 소사이어티의 통제에서 벗어났던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자연. 소사이어티 밖의 야생. 매치드에서만큼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여로를 따라 스쳐가는 풍경들은, 시스템보다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필연적 환경과 맞서싸운다는 느낌을 전해다 준다. 그리고 그 싸움, 그 추격은 과거와 이어지며, 희망과 이어진다. 크로스드는 소사이어티와 봉기 세력 사이를 잇는 선이며, 매치드와 다음권인 리치드 사이에 놓인 다리다. 


매치드에서 보여주던 선명한 색채는 이번 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빨강, 파랑, 초록색으로 완연했다. 단순히 세 가지 색이던 것이 소사이어티 밖으로 나오면서 색의 스펙트럼이 더 다양해진다. 카빙 대협곡의 붉음은 소사이어티의 빨강과 다르고, 그렇게 색채는 다양성을 되찾아간다. 소사이어티 안에서의 느꼈던 다채로움은 사실 의도된 것이었다는 듯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게 색깔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파랑."

어머니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물을 가리키면서 다시 '파랑'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고 했다. 하늘의 파란색과 물의 파란색이 늘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 색깔의 모든 색조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내가 오리아에 살게될 때까지-걸렸다. _290쪽




매치드 시리즈가 조지 오웰의 『1984』의 영어덜트 버전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 시리즈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의 통제 디스토피아 사회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YA소설답게 마냥 무겁지도 않고,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소사이어티라는 체제를 정말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권에서 앨리 콘디가 소사이어티의 어떤 이면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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