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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1 - 드라마 대본집
박경수 지음 / 북폴리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공연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을 때, 희곡을 두 편 읽었다. 중간고사로 하나, 기말고사로 하나. 전자는 희곡은 정말 재미없고 어려운데 무대에 올라간 뮤지컬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후자는 희곡은 게눈 감추듯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는데 연극은 보고 있자니 잠이 올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공연하고 극본은 별개인가보다.'
문자로 재현되는 이야기와 영상으로 재현되는 이야기는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방식의 차이는 독자의 이해에 차이를 가져온다. 더구나 극본은 드라마, 혹은 공연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위한 수단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아무리 이미지의 재현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라고 해도 극본이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는 없고, 영상과 무대보다 감동과 재미가 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자체가 결과물인 소설보다는 당연히 덜 재미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다. 내가 이제까지 읽어본 희곡들은 그랬다. 공연보다 재미 없거나, 재미 없는 공연의 재료가 되거나, 어렵고 현학적이거나, 재미가 없거나.
극본에 몰입하다
편견은 깨졌다.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대본은 웬만한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재미있는 극본에서 만들어졌다. 이야기의 서사가 재미있다면 그 서사를 스크린으로 옮기든 글로만 보든 그건 관계가 없었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사건의 연속. 단순히 글로만 보는 것인데도 머릿속에서 영상이 펼쳐지고, 끊임없이 가슴을 졸였다. 어째서 사람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그렇게 추천했는지 대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휘말려서 가슴 졸이며 읽었다. 영상도 음악도 묘사도 별로 없는, 그냥 대본인데. 왜 이렇게 흡입력 있는 걸까. 이걸 드라마를 보고 읽어야하나, 드라마를 보면서 읽어야하나, 드라마를 안 보고 읽어야하나 하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드라마 시청은 '이게 재미 없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에서 나온 고민이었으니까. 추적자는 다른 장치 하나 없이 '이야기' 하나만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저의 꿈은 제대로 된 '극'을 하나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기승전결이 맞아떨어지고, 사건의 개연성에 하자가 없고, 인물의 감정선에도 흠결이 없으면서도, 쉼 없이 사건이 몰아치고, 극이 계속 진행되고, 갈등은 계속 증폭되면서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달려가는 100부작짜리 극을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_1권 4쪽 작가 서문
이야기에 애가 타다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동생이 열심히 보는 동안 소리는 계속 들었고, 지나가며 장면 몇 개도 주워 보고, 대체 저게 뭐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그 땐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이 가끔 이야기해주는 걸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딸이 죽어서 범인을 찾는다고? 그래서 뭐? 가수랑 정치인이랑 어떻게 엮이는 거야?
고등학생 수영이의 죽음이 어떻게 정치적 상황과 엮이는지, 범인을 잡아내고 진실을 밝히려는 아버지 홍석의 노력이 어떻게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가는지는 일단 보면 안다. 진실을 알리려는 홍석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해 내가 뭐라고 묘사를 할 수가 없다. 다만 보는 동안 함께 달리고, 안타까워 할 뿐이다. 진실이란 무엇인지. 진실이 대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괴로워 해야하는지. 나는 아마 홍석같은 이들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절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진실을 은폐하는 시도는 의외로 너무나 쉽다. 대의를 위해, 더 나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도 너무나 쉽다. 그러나 한 소녀를 짓밟고 간 그 길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결국 나은 세상이 아닌 자신의 세상을 만들 뿐일 텐데.
홍석 : 진짜 미안해야 될 놈들. 강동윤, 서지수, 장병호, 이런 살마들은 한 번도 미안하단 말 안 하는데…
정우 : …
홍석 : 어쩌면요. 우린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놈들하고 싸우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2권 169쪽
정말, 읽는 동안 애가 타서 죽는 줄 알았다. 글로 느껴지는 긴박감이 이렇게 강할 수도 있구나. 극본이라는 게 이렇게 흡입력 있는 거구나. 몇 번이나 눈물을 글썽이며 얻은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