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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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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얘기다. 우린 밤에 취했어. 낮에 살면 낮의 규칙에 따라 살겠지. 우리는 밤에 사니까 밤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디온? 실제로 우리한텐 규칙 자체가 없어."_542쪽

 

당연한 소리지만, 밤은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 밝은 햇살 아래에서는 떳떳할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는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 합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버는 건전한 삶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밤 속에서 살아간다. 데니스 루헤인의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는 그 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리브 바이 나이트는 작가의 전작인 『운명의 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운명의 날의 주인공은 조의 형이다. 그러나 운명의 날을 보지 않더라도 리브 바이 나이트를 읽는 것은 문제없다. 나 또한 운명의 날을 읽던 도중에 이 책을 집어 들었지만 막히는 곳 없이 술술 읽혔다.

 

누군가는 낮을 사랑하지만 어떤 사람은 밤에 이끌린다. 이 책의 주인공인 조 커클린은 강한 형사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지만 항상 밤에 끌렸다. 조는 친구들과 강도짓을 하다가 에마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끌린다. 에마는 그 지역 조직 보스인 앨버트 화이트의 애인이었다. 에마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다가 에마는 사망, 조는 감옥에 들어간다. 조는 감옥에서 앨버트의 라이벌 조직 두목인 마소와 엮이게 된다. 아버지와의 관계, 지역 보스로서 조직 사업을 정비하는 과정, 사랑, 배신 등이 이후에 계속 이어진다.


소설은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시대의 미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거기다 암흑가라는 소재. 남성적이라고 할 법하지만, 땀냄새 나고 심심하면 총질해대는 식의 남성성의 과시는 없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폭력과 술이 삶의 수단이지만, 거기에는 판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조라는 인물이 약간이나마 깔끔한 엘리트 느낌이 있어서 더욱 거부감이 없었다.


"그럼 뭐가 문제지?"

"밤. 밤은 나름의 규칙이 있어."

"낮에도 규칙은 있지."

"오, 알아…… 하지만 난 낮의 규칙은 싫어."_217쪽


조가 밤의 규칙 속에서 살기로 결심한 후로 그가 걷게 될 길은 자명하게 느껴진다. 조는 깜깜한 밤 속에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외길을 걸어간다. 다른 곳으로 빠질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갈림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조가 비추는 손전등은 외길만을 비춰낸다. 내게 이 소설은 정해진 결말로 차근차근히 걸어가는 듯했다.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어서, 포스트잇을 빽빽하게 붙여버렸다.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매혹적인 한 편의 영화를 봤다. 이렇게 쓰고 보니 왠지 영화에 대한 기대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같은 기분. 디카프리오 주연이라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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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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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의 『능력자』는.... 그러니까. 음. 뭐라고 해야할까. 말을 골라내기 힘들다. 뭔가가 머릿속에서 맴맴 맴도는데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맴맴거리는 매미 언어를 번역해줄 능력자가 필요하다. 

 

 

그래. 그러니까 주인공 공평수 말이다. 

 

 

 

소설가와 챔피언

 

어두컴컴한 체육관의 조명 아래 링 위에 서 있는 초로의 남자가 흘리는 땀방울 하나가 클로즈업 된다. 그리고 배경음악으로는 장중한 매미소리가 깔리고.... 아, 이게 아닌가. 그러면....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한 젊은이가 글을 쓰고 있다. 통장에 남은 잔액은 3320원.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겠다며 열심히 글을 쓰는데... 소희가 옷을 벗는다. .....이것도 아닌가?

 

서술자인 남루한은 실패한 소설가이다. 등단은 했으나 변변한 작품도 없고 책도 안 나오고. 그런데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 그냥 가난한 소설가. 돈이 필요하기에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 공평수로 말할 것 같으면 과거의 영광은 내버리고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는 옛 복싱 챔피언이다. 지금은 그저 신성한 매미의 기운을 받아 초능력을 쓴다고 말하는 미치광이, 인생의 패배자일 뿐이다. 그 공평수의 인생. 
 

-초능력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_187쪽

 

-이젠 안 그럴 거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거라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건 초능력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초능력이란 말야 초능력!_189쪽

 

 


 

거칠거칠한 그의 인생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할 지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평범한,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감동적이다. 심플한데 웃기다. 번역서에서는 맛볼 수 없을 한국어의 찰진 문장과 재기발랄한 입담이 여기에 있다. 비극을 희극으로 포장해내는 기술이 대단하다. 이 거칠거칠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웃음과 한숨이 번갈아 나오며 나를 후려친다. 승리, 실패. 능력자. 

 

헤드가 멋대로 추리해서 말하는 공평수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세상을 비난한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을 좇고, 바라고, 초능력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데 내게는 없는 그 초능력이 정상일까. 우리가 바란다고 슈퍼맨이 될 수 있나. 실패와 승리는 결국 남이 아닌 내가 결정해야하지 않을까. 작가가 정신적 자위의 결과물이라고 내놓은 이 작품은 결국 독자들에게도 비슷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공평수가 그랬듯 승부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세상이 이겼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승리는 진 시합이다. 세상이 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목표한 수준에 도달한 경기는 이긴 경기고, 이긴 삶이다._220쪽

 

그런데, 아직 난 공평수처럼 자서전을 쓰지는 못하겠다. 그는 멋있었고, 영원한 챔피언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세상의 판정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나의 자서전을 쓸 준비가 되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내가 나의 링 위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면 그 때는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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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탐정 설록수
윤해환 지음 / 씨엘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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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잉여다. 트위터 타임라인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문자나 메신저나 전화보다 트위터 멘션에 답하는 게 빠르고, 트위터가 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조금 이상한 게 있으면 트위터에 올리고 본다. 트위터 계정은 세 개,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간밤에 올라온 트윗들 확인하기, 직접 만나는 사람보다 트친들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주변인들이 다들 나만 빼고 트위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시작했다가 지금은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파랑새. 저 요사스런 파랑새. 그렇다. 난 빼도박도 못하는 트잉여다. 

 

 

 

#내_셜록이_트잉여일_리_없어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리트윗으로 내 탐라에 온 트윗 하나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내 셜록이 트잉여일리가 없어'라는 말과 함께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서점에서 이 책을 찍은 사진이었다. 윤해환 작가의 『트위터 탐정 설록수』. 책을 읽지 않았던 시점에서의 나는 '에이, 그래도 그렇게까지 트잉여겠어. 트위터를 도구로 이용하는 수준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안일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책을 직접 읽어보니 설록수는 나보다 더 심한 트위터 중독자, SNS피로증후군 환자였던 것이다. 

 

"하루라도 SNS를 안 하면 불안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누가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궁금해한다. 댓글이 적으면 우울해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 폰부터 찾고 잠자기 전에도 당연하다는 듯 SNS를 확인, SNS피로증후군은 도박처럼 집착 등의 중독증상이 심하다.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사용 시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막 누가 RT를 해서 타임라인에 떴더군요." 

"그렇다면 환자분도 RT하시고 앞에 덧붙이시죠. 님들아, 저 의사가 SNS피로증후군이래요라고"_255쪽

 

 

#한국형_셜록홈즈

 

『트위터 탐정 설록수』는 셜록홈즈의 재해석본이다. 원작에 기반한 에피소드들은 현대의 한국에 맞게 다시 쓰인다. 설록수는 탐정이 없는 한국의 유일한 탐정. 김영진은 라식 수술 부작용으로 제대 후 충선대에 편입한 대학생. 설록수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DRWATSON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게 됐다. 설록수는 트위터, 싸이월드, 편지 등으로 사건을 의뢰 받으며 사건 해결에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제목부터가 '타임라인 연구'로 트위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트위터의 소모임인 **당들도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트위터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을 때, 트위터를 이용해봤을 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은 가볍다.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추리의 트릭보다는 셜록홈즈의 변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래의 셜록홈즈 에피소드에서 어떤 부분은 유지되며 어떤 부분은 사라지고 어떤 부분은 바뀐다. 친절하게도 원전 소설이나 소스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석으로 시시콜콜, 친구에게 말하듯 설명해주기까지 한다. 트릭을 파헤치는 재미보다는 한국의 셜록홈즈, 설록수라는 인물의 행동과 영진의 관계가 더 재미있다. 

 

 

 

#트잉여_공감물

 

그리고 트위터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트위터 이야기가 웃겼다. 객관화 된 트잉여, 설록수의 태도가 비정상적이라며 웃다가 트잉여인 나는 외부인에게 이렇게 인식될 수 있구나 하는 깨닫는다. 물론 설록수의 트위터 환경은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타임라인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요새는 #**당 태크도 보기 힘들고, 싸이월드는 버림받고 모두가 페이스북으로 넘어간 상태니까. 그러니 지금보다 몇 년 전이 더 소설적 배경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래도 기본적인 트위터 사용 태도가... 그래. 공감 간다. 

 

"LTE가 안 터져. 저 버스 때문인 거 같아."

"타세요."

"타임라인 감시를 해야 해. 백수당 당주 백백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통도사에 대한 멘션을 RT하고…… 있다가 리밋에 걸렸군!"

"잘됐네요. 이제 더 이상 업데이트는 없겠네요. 어서 타세요."

"그럴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나중에 리밋이 풀린 후의 백백수를 감시할 수 없잖은가!"

"리밋이 내일 풀릴 텐데 무슨 소리예요."

"부계정이 있을 거야! 부계정을 찾아야해!"_264쪽

 

 

마지막으로...트위터를 이용하지 않는 분들이 이 소설로 편견을 가지셨을까봐 변명을 조금 해보겠다. 트위터 사용자들도 다들 사용하는 법이 다르다. 나는 나와 성향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류, 원하는 정보의 구독이 트위터의 목적이라 팔로워는 많이 신경쓰지 않는다. 내 친구는 모르는 사람이 팔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프로텍트도 걸어놓고 소수의 지인들과만 메신저처럼 사용한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 나오는 트위터리안처럼 팔로워와 영향력에 신경을 엄청 쓸 것이다. 팔로워 한둘 떨어지는 걸 알아 채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역시 진실이 많이 담겨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네. 

 

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버스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친구가, 연인이 앉아 있음에도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핸드폰 액정 화면뿐이었다._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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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파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4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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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신상을 캐내내는 걸 보면 정말 무섭다. 그래서 가끔 내 아이디나 닉네임을 구글에서 검색해보고는 한다. 대체 어떤 정보들이 뜰지, 나는 인터넷에 얼마나 많은 신상을 흘려댔을지 걱정하면서. 트위터와 블로그에 떠들어댔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나에 대해 알아내는 게 식은죽 먹기이지 싶다. 누군가 내가 헛소리 한 걸 캡쳐해둔 뒤에 그걸 가지고 협박하면? 나같은 잉여인간이 그런 일을 당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흑역사는 무서운 법이다.






최혁곤 작가의 『B파일』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네 명이다. 한국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는 조선족 리영민은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리영민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사람들과, 그를 붙잡으려는 검은 양복들을 피해 도주를 시도한다. 문화부 고참기자인 윤순철은 편집국장에게 이상한 CD의 조사를 의뢰받는다. 그리고 편집국장은 죽어버린다. 해결사 일을 하는 미호는 어떤 CD의 회수를 의뢰받으나 의뢰에 차질이 생겨버린다. 신참기자 에스더는 특종을 찾다가 리영민의 연락을 받게 된다. 이렇게 네 사람이 얽혀 어떤 거대한 음모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네 명의 인물이 제각각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기 때문에 초반부에 몰입이 힘들었다. 은행원 리영민의 도주 이야기가 전개되더니 고참기자 윤순철이 맡은 일로 넘어간다. 그리고 킬러 미호로, 다시 신참기자 에스더로. 한창 전개되다가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뚝 끊겨버리니 맥이 풀려버린다. 특히나 아직 서로 얽히지 않았을 초반에는 더. 중반부터 인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조금씩 엮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결말이었다. 리뷰에서 자세하게 쓸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 이야기해보자면, 주인공 중 그 누구도 영웅이 되지 않고, 영웅이 되려고 들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헐리우드식 서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비현실적이면서도 극히 현실적인 그 선택에서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신상정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트위터에서 계속 떠들어대듯이 어쩌면 우리는 그런 걸 걱정하는 '척'만 하지 행동은 하지 않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 대신 일을 처리해줄 영웅은 바라면서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를 바라는 것. 진실을 궁금해하지만 그 이상은 행동할 생각이 없는 것. 


영웅이 없는 이야기. 내가 이야기 속의 영웅에 너무 익숙했던 것이었던 걸까. 조금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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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여고 탐정단 : 방과 후의 미스터리 블랙 로맨스 클럽
박하익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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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고라는 공간을 특별하거나 특이하게 느끼지 않는다. 여중을 나와 여고에 들어갔던 내게 여고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이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종일 살던 그곳.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범했지만 사건은 계속 터졌던 것같다. 물론 그때도 무심함을 체화하고 있던 나는 내 일이 아닌 이상 그 사건들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주인공 채율의 첫모습은 그런 점이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하다. 채율은 다른 일은 다 신경 끄고 성적을 관리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한다. 이상한 남자가 자신을 물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양.

 

그러나 이야기는 그 무심함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시작되는 법이다. 가령 사건마다 얼굴을 들이밀어야하는 미도 같은 아이를 만날 때 말이다.

 

"탐정단에 들어와. 함께 무는 남자를 잡자."_21쪽

 

 

 

 

 

선암여고 탐정단 입단.

 

채율은 자기자신의 명예와 천재 쌍둥이 오빠 채준에게만 관심을 주는 어머니 때문에 상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세뇌가 제대로 먹혀들어갔던 것일까. 소위 말하는 모범생, 아니 우등생으로 꿈도 없이 그냥 정해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고입 실패로 도피성 유학만을 기다리며 무채색으로 살던 채율은 무는 남자 사건으로 이제까지의 학교 생활에서 벗어날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선암여고 탐정단'과 접점이 생기고 끌려가서 가입까지 해버린 것이다. 호기심 넘치는 탐정단 대장 미도, 음침한 오컬트 마니아 하재, 행동대장 성윤, 모델같은 외모의 예희. 채율은 이 네 사람과 어울리며 사건의 수사를 하게 된다. 탐정단이 재미있지만 한편 귀찮기도 한 이율배반적 감정 속에서 채율은 무는 남자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오빠와 엄마의 영향으로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지만 채율은 상당히 영리한 소녀니까.

 

 

 

 

발랄 씁쓸한 이야기.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사회적 문제와 결부된다. 성적과 시험지 유출, 미성년자 임신과 낙태, 학원 폭력. 채율의 문제 또한 따지고 보면 채율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런 민감한 문제들을 마냥 무겁지 않게, 하지만 그리 가볍지도 않게 풀어낸다. 분위기는 발랄하지만 마냥 웃고 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들. 읽는 동안 공감하고, 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특히 세 번째 문제, 왕따 관련 이야기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다. 왕따가 발생하는 지점과 꼬여가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까발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문제를 의외의 곳에서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되어 당황했다. 혼란 후에 찾아온 것은 감탄. '아, 이 작가 정말 제대로구나' 싶었다. 일반적으로 학원물에서는 연애나 취미생활만 하고 다른 건 뒷전인 줄 알았는데, 선암여고 탐정단은 한국의 현실에 단단히 발 붙이고 있는 이야기였다.

 

'유리 미로는 부서진 걸까, 아니면 더 크고 투명하게 확장된 걸까? 그날의 포옹과 화해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처벌을 면하기 위한 한 편의 연극이었을까.'_196쪽

 

"여자들에게는 그런 문화가 허락되지 않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애들은 친구와 싸워서도 안 되고, 경쟁해서도 안 된다는 식으로 양육되죠. 원래 미움이나 질투는 당연한 감정인데 그걸 억누르다 보니 음지에서 비겁하게 풀 수밖에요."_198쪽

 

 

 

 

약간의 로맨스도.

 

가끔 등장하는 로맨스는 이야기에 뿌려진 향신료. 로맨스가 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건 확실하다. 채준에 대한 미도의 애정은 일반적인 여고생의 애정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다. 미도라는 캐릭터가 가진 강한 개성 탓. 그렇지만 그 4차원적인 미도의 연애 감정에도 소녀심이 가득한 면이 있다. 미도와 채준의 연애놀이에 설렘보다는 개그적 요소가 강하다면, 채율과 하라온 라인은 조금 더 로맨스같다. 채율이 좋아서 그런지 이 커플 참 마음에 드는데. 썸으로 끝이라니.

 

 

 

새 책을 안 읽다가 간만에 읽은 게 선암여고 탐정단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발랄한 분위기 덕분에 접근하기 쉬웠고, 채율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며 몰입했고, 현실적인 사건들에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보게 됐다. 독서 의욕에 불을 붙여줬다고나 할까. 다음 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마저 일더라. 드라마나 만화로 있어도 재미있을 거 같고. 다음 권...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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