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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관 약전(略傳)
성석제 지음 / 강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매우 재밌는 소설집이다. 일전에 성석제의 소설이 재미없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소설집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무진장 재밌다. 성석제의 소설이 단순 도락만으로 읽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주인공들은 죄다 서민들이다. 세상의 법칙이 정해놓은 한계선을 향해 열심히 달리다가 어쩌지 못하는 벽에 부딪혀 주저 앉거나 삐뚜름해지거나 샛길을 가거나. 그런 주변인들의, 그런 주변인들에 의한, 그런 주변인들을 위한 소설집이다.
「조동관 약전」은 별명이 '똥깐'인 시골 망나니의 일대기를 축약해 구전처럼 쓴 소설. 너무 허황스럽다. 대개 구전이 다 그렇지 않은가? 마무리가 '약전'이라는 제목에 걸맞았다.
「경두」는 이인칭 소설. 문장 끝에 '경두', '경두' 붙이는 게 거슬리긴 한데, 급속도로 읽히는 문체에 운율을 맞춰줘서 읽는 재미가 살아 있긴 하다. 대한민국에서 보호자 없는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고 상처받고 처참하게 되는지를 속도감 있는 문체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적 근력을 중시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성적 근력을 중시하는 인간은 늙으면 근력이 없어지니 약해질밖에. 무게 중심을 근력에 두지 말아야 한다. 제발 애들 키울 때 패지 마라 인간들아. 가정의 폭력이 가장 악질이다. …이렇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 오, 작가가 제목 참 잘 지었단 생각.
「이인실」도 마초가 등장하고 그 마초를 바라보는 이가 서술하는 형식. 이쯤되면 앞의 세 소설들과 흡사한 인물의 등장에 질리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변주해 우려 먹는 데에 대해 약간은 감탄.
「통속」은 말그대로 통속소설. 우연히 할인마트에서 중년 남녀가 서로를 알아본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난 연인. 남자는 그 시절 암만 애원하고 공략해도 끝내 안 주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레 질펀한 섹스를 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무상함(?)을 느끼기도. 끝내 안주던 처녀성을 갖고 행정고시 패스한 놈이랑 결혼했었지, 뇌까릴 땐 참, 씁쓸하면서도 통렬하게 웃었다. 대한민국에서 유교적 사관으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그대로를 따르는 여성의 답답함을 그대로 풍자해놓았다. 통속소설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유랑_취생옹(醉生翁) 첩실(妾室) 하세가와 도미코의 봉별서(逢別書)」는 조동관 약전과 비슷했던 거 같다. 서술 형식이. 기억이 잘 안나네….
「고수」는 바둑 고수를 뜻한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절제다. 내가 바둑에 한창 빠졌을 때 주위에 이런 인간들이 많았다. 뵈기 싫은 폐인들……. 그래도 객기는 아직 살아 있는 모양…, 이것 역시 성석제의 은근한 풍자다. 듣기로 성석제는 문단에서 기력이 가장 강하다고.
「칠십년대식 철갑」에서 '철갑'은 처녀성. 연애이야기다. '통속'을 약간 변주한 듯. '야, 니 철갑 여전하냐?', '왜? 니가 관심이라도 있었어?', '항상 원했지', '달라고 해 본 적 있어?', '달라 했으면 줬어?', '병신' 그리고 여자는 결혼하러 가버린다….
「비밀스럽고 화려한 쌍곡선의 세계」는 제법 긴 소설 같았는데 기억이 없다. 왜냐면 '칠십년대식 철갑'과 비슷하기 때문에. 비스무리한 것들을 각각의 색을 입혀 변주한 역량에 대해선 박수를……!
재밌다. 재밌는 책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
덧: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민음사, 1997년)는 이 책의 구판이다. 민음사는 절판 혹은 품절 되면 책을 잘 안 찍는 거 같다. 그래선지 타출판사에서 표지와 표제만 달리하고 책이 새로 나왔다. 실린 순서와 뒤에 실린 해설도 그대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