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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주변에 자연은 없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있을뿐. 우리는 자연을 잊고 지내거나 그리워 하거나. 붙박인 나무들보다 더 고독한 인간들. 동물성에 상처 입은 식물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런 사생활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일상에도 자연이 없다. 의심과 추적과 엇갈림과 폭력과 음모같은, 먹이사슬같은 동물성이 식물성을 유린한다. 동물성의 간접적인 가해자인 화자 기현은 오랜 엇갈림을 멀게 에둘러서야 남천을 발견한다. 남천에서, 야자나무를 본다. 그곳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인식된다. 그곳이 우리를 낳은 자연이다. 그런데 거기는 현실이 아니라니. 그곳에서 모든 게 연원했고 다시 치유받고 새로이 시작된다. 그 엇갈림도 오해도 삶의 비의도 비로소 화해한다. 기현은 식물성에 눈뜬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하는 게 아니라 위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식물들의 수런거림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도입부는 근래에 내가 읽은 소설들의 시작들 중 단연 최고였다. 진행되면서 진부한 삼각관계가 나와서 너무나 통속적이다고 섣불리 판단하고는 던져버릴뻔 했는데, 진행될수록 이승우식 대중소설의 진면목을 통감할 수 있다. 이야기를 여럿 벌여놓고 마무리에 가서 깔끔하게! 정리해버리는 이승우의 단정함은 놀랍다. 오, 그 멋진 마무리!
동생이 서술하는 것과 은근한 삼각관계도 그렇고, 기법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을 연상케 했는데, 그 내용은 물론 상당히 이질적이다. (둘 다 매력적인 소설이다!) 밑엣 인용글이 이 '사랑'소설의 주제다.
'사랑은 두 개의 몸이 최초의 하나의 몸을 찾으려는 욕망이고 추구', '처음에 사람은 얼굴이 둘이고 손과 발이 넷이고 눈이 넷이고 생식기도 둘이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신들에게 도전을 하니까 궁리 끝에 제우스가 사람들의 몸을 둘로 쪼갰다지.',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해 사랑을 하게 되는 거구요. 원래의 몸, 원래의 정신을 찾으려고, 원래대로 하나가 되려고……'(162)
덧: 대산문학상 수상으로 여러 나라에 번역된 이승우의 <생의 이면>은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승우가 아예 재미없고 사변적인 작가로 찍혀서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승우도 재밌는 너무나 재밌는 소설을 쓴다. 이승우의 소설 중 가장 쉽게 읽히고 재밌게, 빨리 읽히는 책이 바로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장담하는데, 베스트셀러들 보다 훨씬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