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주머니속대장경 10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여시아문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라는 제목만 보고 많이 당황했었다. 책만 보고 소설만 쓰던 양반이 불교강의라니? 도서관에서 책만 본 것도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거라 할 수 있나? - 이런 아둔한 선입견이 당장에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매우 좋은 책이다. - 이 말만 백 번하고 서평을 마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다.

'보르헤스'라는 이질적인 기표 덕분에 '불교'라는 선입견 덩어리가 비로소 느물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서양 사람이 불교를 강의하니 '객관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보르헤스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강의를 열심히 따라가고, 덕분에 나도 주관적인 선입견을 떨치고 그 객관적인 시각에 발을 맞춘다. 아주- 쉽고- 친절하고- 간결하고- 재미있다. 내가 평소에 진부하고 어렵고 컬트적으로 생각하던 불교 교리의 핵심 개념들을 아주 매력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서구에서 불교가 일으킨 반향의 상당 부분은 '니르바나'라고 발음되는 이 아름다운 말에 힘입는 바 큽니다. 그 말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엇입니까? 불이 꺼지는 것 혹은 소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마도 니르바나에 이르면 욕망의 불이 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222) 니르바나를 음운적 매력까지 언급하는 것은, 내게 무언가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었다. 설명하긴 좀 그렇다만.

'같습니다.'라는 추측의 말이 나오는 것은 보르헤스가 겸손하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르헤스는 매력적이다. 이 책 한 권은 불교에 대한 상식적인 궁금증을 거의 해결해 준다. 그 이상은 아닐터라도, 나 같은 중생에겐 너무나 좋은 책이다.

역자 또한 조예가 깊은 것 같다. 포스트모던의 다양성이 실은 보르헤스가 불교의 포용력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보르헤스 문학의 비밀은 불교에 있다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82쪽까지 역자의 해설인데, 224쪽부터 끝까지 '옮긴이의 말'이 또한 첨가되어 있어서 역자의 친절이 그저 고맙다. 역자의 탁월한 해설 '재미 있게 읽는 보르헤스' 편 덕분에 보르헤스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포스트모던의 핵심 개념들 역시 잘 요약해서 설명한 덕분이기도 하다. 내가 들은 소식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 전에 이 책을 들고 청도 운문사에 가서, 대웅전 뒤편 계단에 앉아 저녁 예불을 들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값도 턱없이 싸다. 이런 책은 많이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절묘하신 신의 솜씨를 보라!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책과 어둠을 동시에 주시다니!

보르헤스는 그의 「은총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집안의 유전적인 영향과 과도한 독서로 시력을 상실했다. 책을 좋아하는 그에게 실명(失明)은 치며억인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운명의 뜻인지 모른다. 과거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장님이었다. 그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한편으론 우주의 비밀을 엿본 데 대한 형벌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육안(肉眼)으로보다는 심안(心眼)으로 세계를 꿰뚫어 보라는 운명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20세기의 시대 정신은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매개체로 보르헤스라는 장님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234)

「……저녁은 참 위대하다. 태양보다, 달보다 더 먼, 저 너머에서 오는 별빛을 어찌 태양 광선이 막으랴. 영원에서 보내오는 온갖 종류의 전파가 땅을 폭격한다. 차라리 눈은 감자. 한 사람이, 바람부는 언덕에 홀로 서서, 심안(心眼)으로 보고 듣고 있다. 높은 언덕에 홀로 선 그의 온몸은 수신기가 되어 피안의 소식을 듣는다. 그의 손엔, 항상 그렇듯이, 지팡이가 들려 있다. 형이상학의 광야에 한 고독한 아르헨티나인이 홀로 서 있다. 눈먼 보르헤스. 장님에게 우주는 좁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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