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어쩐 일인지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은 품절이다. 이 책 『생존의 비용』에는 「공공의 더 큰 이익」과 「상상력의 종말」 두 개의 글이 실렸다. 셋 다 제목 참 기똥차게 잘 지었다. 발표순으로 상상력의 종말이 먼저인데, 이 책에는 뒤에 실렸다(우리 나라 편집자는 대체 왜 그랬을까?). 뒤에 실린 상상력의 종말부터 먼저 읽기를 권한다. 왜냐면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읽는 도중에 "내가 전에 쓴 상상력의 종말에서는…" 이런 식의 인용이 몇 번 나오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종말은 핵폭탄에 관한 글이다(역자에 따르면 정치평론이라나. 그다지 평론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 지역 분쟁을 빌미로 1998년 핵실험을 했다. 카슈미르 지역은 현재 인도의 영토인데, 인도, 중국, 파키스탄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들이다. 그런 이유로 힌두가 국교인 인도와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에서 영토+종교 분쟁 중이다. 인도에 뒤이어 파키스탄도 질세라 핵실험을 했다. 로이의 글에 따르면, 인도 국방부장관은 "우리 것이 더 크고 강하다"고 국민들에게 말했다고. 마침 신문 헤드라인에는 핵폭탄과 비아그라가 뒤섞여 있었는데, 로이는 장관의 말이 어느 것을 지칭하는지 헷갈렸단다.

인도 정부는 핵폭탄과 평화를 같은 선상에서 언급한다. 우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는 것. 그래서 두 나라는 서로 핵폭탄을 갖고서, 종래의 재래식 전쟁처럼 총구를 마주하는 게 아니라, 서로 더 도발하지 않으면서 긴장에 긴장만을 거듭한다. 분쟁이 줄었으니 더 나은 걸까? 한 방이면 모든 게 화염에 휩싸일 건데. 그런 공포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게 과연 평화로운 걸까? 서구문화라며 코카콜라를 하수구에 처넣은 인도의 청년들은 주체적인 힘을 얻었다며 핵폭탄을 찬양했단다. 핵폭탄은 과연 인도 고유의 발명품인가? 핵이며 폭탄들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서구의 소설, 영화, 미술, 음악을 무던히도 거부한다. 이 무슨 억울한 코미디일까. 이런 희비극은 지도자들의 모든 걸 쓸어버릴만한 핵폭탄과도 맞먹을 무식과 관련하고, 그건 곧 상상력의 종말을 뜻한다. 핵을 앞세우는 한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은 나르마다 강에 댐건설문제에 관한 정치평론이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무수한 개개인들이 희생당한다. 수 만 명이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잃고 이주민 신세가 돼야 한다. 댐을 건설하면 물과 전력이 풍족해질 거라는데, 실상은 그와는 반대다. 인도 정부는 수 십여 차례의 댐 건설 후, 조사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로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건설비용의 몇 배나 되는 빚을 세계은행에 지게 되었고, 수자원은 전혀 득을 보지 못했으며, 댐 관리를 제대로 못해 드는 피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생태계는 파괴되며, 이주민들이 많아져서 (가뜩이나 인구밀도도 심각한 판국에) 빈민들이 양산되는데, 정부는 근거 없는 이득을 빌미로 자꾸만 댐을 만든다. 왜 이렇게 댐을 만드는지, 지배계층의 멘탈리티를 파헤쳐보니, 1960년대에 네루가 댐 건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했던 연설 때문이라고. 그러나 네루는 생전에 댐을 긍정했던 그 연설을 후회했다고 한다. 로이도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조사까지 했을까. 댐 건설 후 조사 한 번 안했다는 건 정부가 그토록 무책임하다는 증거다. 게다가 건설 전에 근거 없는 이익 예상은 대체 누가 다 하는 걸까. 그런 예상은 말짱 허구다. 나토가 공습하던 베오그라드의 동물원에서는 호랑이가 제 살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무수한 개인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정책은, 제 살 씹어 먹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다반사다. 얼마 전에는 천성산 관통터널공사 문제로 한 개인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개인, 개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덧붙임. 로이의 문장은 어떤 경우에 불필요하게 감정적이 되거나, 유치할 정도로 과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로이 자신은 그것을 잘 알고, 부러 끝까지 밀어붙인다. 독자는 충분히 이해해 줘야 한다. 그만큼 격하게 감정을 쏟고 물고 늘어져도 부족할만치, 부당함과 싸움을 하고 있으니.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5-02-2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는 충분히 이해해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매우 흥미롭습니다. ^^
 
열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용기 옮김 / 책사랑(도서출판)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엄청난 흡인력의 이 소설을 단숨에 읽고 몸서리가 쳐져서 시골방 책장 어느 귀퉁이에 봉인하고는, 그 책 대신 다른 책을 가방의 빈 자리에 채워 넣어 귀경했다. 이토록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인간의 양심을 불신할 수 있을까.

남편은 한결같은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일기를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쓴다. 부인과의 성생활을 일기에 노골적으로 쓰고, 또 그 성생활에 자극을 주기 위해, 사위가 될 사람을 이용한다. 일기를 통해. 그 일기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감춰두지만, 부인의 성품으로 보아 어떻게든 자신의 일기를 훔쳐보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훔쳐봤으면서도 모른 척 하리란 것을 안다. 어느 날부턴가는 부인도 일기를 쓴다. 일기로 일기에 대항한다.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 형식이 일기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글과 글의 대결이란 다반사다. 다만 다른 점은, 비공개된 대결이란 점이다)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를 훔쳐봤을까를 의심하며, 점점 더 대담하게 일기를 쓰고,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예상하고 남편의 일기처럼,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쓴다.

그들이 탐닉하는 것은 주로 성생활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오롯이 성생활만 남고,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과정만 부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대가다운 솜씨로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한다. 그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나는 이 작가가 대중소설가 아닌가? 당찮은 의심을 했다. 이를 테면, 대중소설기법을 도용한 순수소설이라고 할까. 게다가 뒤로 갈수록 추리적인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전장을 종횡하는 모사들 간의 계략싸움도 아니고, 무한경쟁시대의 정보전도 아니라, 그저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다. 때문에 독자에겐 더욱 지독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더 강한 자극을 바라는 남편의 일기대로, 부인과 사위는 간통을 하게 되는데, 남편은 옹졸하게도, 최후의 선(?)을 부인이 넘었을까 (그것만 안 하면 순결하다나 뭐라나) 고민하고 부인은 지독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것만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믿고 싶어한다). 부인은 부인대로 일기에,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고, 갖은 방식으로 최고의 쾌락을 희구하고 있다고 쓴다.

어느 날엔가 남편이 일기장에 표시한 흔적에 변화가 왔고,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고 확신한다. 남편은 부인이 일기를 쓰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절대로 훔쳐보지 않는다고 일기장에다 쓴다. 부인도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 손 댄 흔적을 발견한다.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걸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은 남편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다고 신에게 맹세한다.

남편은 부인과의 과한 성생활 때문에 쓰러지게 된다. 거의 식물인간이 되고, 부인은 계속 일기를 쓴다. "11시, 정원에서 인기척이 났다"는 문장이 거의 매일을 도배하다시피 한다. 그 인기척은 사위의 그것이다.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딸이 자신의 일기장을 남편에게 읽어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리고 그것을 일기에 쓴다. 이 소설은,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다. (샨샤의 소설 <바둑 두는 여자>처럼 번갈아 가다가, 뒤로 갈수록 부인의 일기가 많아지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부인이 두 일기장을 정리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처럼, 독자로서는 뭐가 뭔지 헛갈린다.

남편은 죽는다. 그 후 부인이 남편의 일기장을 참조하여 해명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쓴다. 부인은 신에게 맹세한다고 일기에 썼었지만,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의 일기를 훔쳐보았다. 일기에는 사위와 최후의 그것은 안했다고 썼지만, 실은 진작에 했다. 그것을 속이기 위해 그날 일기를 부러 길게 썼다. 이제 자신이 의심스러운 건, 사위와 딸이다.

일기는 말그대로 하루의 기록이다. 그런 일기에 언제부터, 비밀이란 것이 옵션으로 섞이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겪은 것을 언어로 옮길 때, 이미 최소한의 주관성이 첨가되고, 그 자체로 리얼리티는 줄어든다. 모든 일기는, 씌어지는 바,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전제한다는 (김현의 일기에 덧붙인 이인성의 글) 통찰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일기의 암묵적 특이성을 통해 한 남자는 파멸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이용해, 독자를 진저리치게 한다.

p.s 저자의 초기작 <문신>에도 발에 대해 에로틱하게 접근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소설의 남편도 부인의 발에 유난히 집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니체전집 1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8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구별해 보자. 아폴론은 태양신이다. 영생, 남성적, 정의, 체계, 질서, 바름, 명백, 이성, 예술, 오르페우스, 현악기, 낮, 빛, 주류 등등이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쾌락의 신. 부활, 여성적, 죽음, 혼돈, 모호, 비의, 자연, 예술, 마르시아스, 판악기, 달, 광기, 어둠, 악, 비주류, 도취 등등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니체는 동양의 음/양설과 비슷한 논지를 제시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대립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인간은 소우주다. 아폴론/디오니소스는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한다. 대극; 서로 대립하면서 보충하는 관계, 한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도 사라진다. 동어반복하자면, 공생이다. 동양화를 예로 들자면, 사군자/산수 등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여백에 의해 그것들은 기품을 얻는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공격한다. 예술의 가장 고상한 적, 소크라테스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놓치고 아폴론적인 것을 고착시켰다는 뜻이다. 아폴론의 신화를 살펴 보자.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제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세운다. 피톤의 딸인 피튀아를 신전의 사제로 삼는다. 이것은 자연을 지배한 인간, 토착 신화를 모조리 올림푸스 신화로 통합했다는 상징이며,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지배했다는 상징이다. 현대 문명은 아폴론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억압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이 잠재된 무서운 문명이다. 니체가 찬양한 그리스적 정신이란, 아폴론/디오니소스의 조화다. 우리는 아폴론적인 것이 너무나 강한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니체의 책을 읽으면 거부감이 심하게 드는 게 당연하다.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상상적 사실은, 연극의 기원에 있다. 무수한 연극개론, 연극사 서적을 뒤적여 보면, 연극은 디오니소스제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헌데 그 이상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책이 없다. 어떤 책에서는 <시학> 이후 연극에 대한 최고의 책이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나?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광기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책인 동시에, 연극의 기원에 대한 가장 상상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디오니소스는 갈가리 찢겨 죽었다가, 부활한 신이다. 포도주는 포도를 모조리 박살(?)낸 후에야 만들어진다. 포도주를 마시면 취한다. 취하면 혼란스럽다. 만취하면 광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광기란, 미친 것이 아니라, 과도한 열정이다. 예술이란, 카오스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라. 그 혼돈을 형상화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술가다.  

우리는 굴절된 디오니소스적 체험을 종종 경험한다. 예술은 어디서 출발했나. 니체는 예술의 기원을 제의적으로 고찰한다. 예술 정신이란 <부활>이라는 것.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교가 있었다. 그들은 달이 차는 날 이슥한 밤에, 맨발로 산 위로 올라가, 제일 먼저 마주치는 들짐승을 산 채로 찢어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에 취해 단체로 춤을 추며, 신비제의를 했다. 그것이 디오니소스제의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온다. 제정신이란 아폴론적인 것이다. 광기와 이성의 접점에서, 디오니소스제의는 점점 체계를 잡는다. 그래서 단순히 들짐승을 찢어 죽이고 춤추고 난교를 하는 데서부터, 뒤튀람보스, 즉슨 디오니소스 송가로 발전했다. 디오니소스 찬가는 코러스로 발전, 계승되었다. 연극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서적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이스퀼로스 이전의 연극은 배우가 한 명 뿐이었다. 한 명이 가면을 여러 개 바꿔 가며 연극을 했다. 나머지는 코러스들이었다. 아이스퀼로스가 두 명으로 배우를 늘렸으며, 소포클레스는 세 명 이상으로 늘렸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자. 왜 하필 한 명이었을까? 디오니소스교의 교주가 배우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무당처럼 별지랄발광을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탄생>이다.

현재까지 아테네에 남아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의 사진을 보면, 극장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무대의 뒤편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통/광기/몰입을 정기적으로 체험하려 비극을 관람했던 것인데, 좀더 원시적인 디오니소스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산 속에 극장을 만든 것이다. 몰입해서 광기를 일으킬까봐, 무대 뒤에는 아폴론 신전을 마련한 것이다. 아폴론 신전이 세워진 바로 뒷동산에 극장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가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왜 가면을 썼을까? 가면, 그 표정은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다. 생의 진면목을 맞닥뜨릴 때의 경악, 오이디푸스의,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그러나 장엄한 표정. 비극은 자기 앞의 세상과의 불일치에서 생긴다. 신이 벌인 짓거리를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비논리. 그 고통과 마주하는 인간의 고뇌. <차라투스트라>에서 말하는 수직 상승, 도약하는 자란, 불행을 목전에 두고 긍정으로 전환하는 자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비극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파헤쳐,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장중한 숭고미를 느낀다. 그 비극정신은 해체와 재결합이다. 감정의 찢김과, 승화. 몰락의 드라마. 그 몰락을 넘어서는, 그것이 비극정신이다.

이 책은 니체의 첫 저서다. 스물여섯에 교수가 된 후 갖은 중상모략을 겪었을 그는, 그가 마땅한 자리에 있음을 보이기라도 하듯, 시대를 넘어서는 글을 썼다. 하지만 젊은 혈기로 인해, 문장은 들 떠 있고, 비약적이다. 번역투로 보더라도 그것은 확연하다. 디오니소스적인 글쓰기라서 그런지, 매우 모호하고, 애매하다. 그러므로 상상을 촉발시킨다. 얻어 가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값진 책이다. 덧붙여, 앙토냉 아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디오니소스적으로 변형시켜, <잔혹극>을 만들었다. 책의 내용은 문청이 읽기에, 상상력의 보고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별점으로 매길 수 없지만, 매우 난해하게 읽힌다. 철학, 미학 뿐아니라, 연극에 대한 지식도 탁월한 사람이, <비극의 탄생>의 진면목을 잘 살려 주석도 세심하게 붙여서, 이해가 잘 되도록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nnerist 2004-10-3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광화 희곡집. 을 읽어주고 싶구나. 전에 내가 서문만 쳐서 올린 적 있는데. 기억하는지?

5/

연극은 심장에서 머리로 그리고 이제는 눈으로 옮겨 갔다. 나는 머리의 연극도 감각의 연극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연극을 가슴으로 되돌리고 싶다. 그 방법론은 신화시대에 숨어 있는 원형에 대한 탐구다.

이 시대의 연극은 브레히트와 사실적 심리주의에 병들어 있다. 그들에 의해 연극을 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려 드는 관성이 생겼다.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속이 편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성으로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혹자는 감각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을 감성적 작업과 혼동한다. 감각적 연극은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정과 유리되게 만든다. 감각적 연극의 효과는 쓸쓸함의 확인이다.

원형적 연극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욕망과 열정을 드러 내고 자극하는 연극이다. 너의 열정이 시키는 대로 터뜨리라. 원형적 연극의 감상에는 논리나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뛰는 심장의 박력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그 태도가 감성적 접근이다.



22/ 96. 11. 12.

생의 열정과 강력함을 억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덕과 정의의 기만성이다. 이른바 합리적 사고라 하는 진리들의 폐단. 그것들은 연극에 치명적이다.

도덕과 정의를 폐기하면 이 사회의 혼란을 무엇으로 막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될수록 혼란은 더욱 늘어만 왔었다. 마치, 법조문이 하나 늘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가듯이. 상식과 금기와 권위의 부정어법은 개인에게 니힐리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회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력을 희생하였다. 이제는 생이 보상받아야 한다.

니체에 의지하여, 니힐리즘을 이기는 길은 권력(강함)에의 의지다. 역시 니체에 의지하여,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진리로 망가뜨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 기만의 세상을 희생시키는 길은, 최소한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강력한 제어 수단은, 활동적 생명의 힘이다.

연극은 위기라는 절망감의 유행. 무엇보다 연극에서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표출하는 강력한 생의 힘으로 관객들을 충격시켜 그들의 억눌린 생명을 해방시킨다. 그것이 연극의 효용이다.


35/

의지 대 폭력. 정열 대 완력. 의지는 생명 자체다. 폭력은 생명을 위협한다. 정열은 감화시킨다. 완력은 강요한다.

위선적 인간은 위장되고 미화된 폭력에 감동한다. 미화된 폭력은 사실 약한 정열의 증거다. 약한 정열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강요하고 합법화한다. 그러나 위장을 벗기면 비열한 의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정열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위선자들은 폭력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한다. 미화된 폭력에의 감동은 비굴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다. 위장 제거에 경악함은 그들의 비굴을 들켰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난다.

37/ 96. 11. 19

고전적 비극이 정열을 환기시키는 방법. 성격적 결함을 가진 영웅이 강력한 고난을 당한다. 그 힘겨운 짐을 지느라 정열이 불려나온다. 이때 고난은 측량되지 않는 정열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계측기가 된다. 즉, 고귀한 성품과 고난은 정열을 가리키는 지시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세들은 비극의 본질이 성격과 고난인 줄 알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가짜영웅이라는 괴물을 조제하였다. 이윽고 정열을 보는 감각이 무뎌져 간 관객들은 비극이 따분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비극정신의 삶의 열정 자체에 고양되는 것이다.

쎈연필 2004-11-0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력/힘에의 의지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니체의 <생명에의 의지>를 정열적으로 묘사한 글이군요. 이 분의 작품에서는 고대 비극과 아르토의 체취가 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조광화 희곡집을 읽고 싶군요.
 
은밀한 몸 - 여성의 몸 수치의 역사 한길 히스토리아 6
한스 페터 뒤르 지음, 박계수 옮김 / 한길사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셰익스피어는 「리어왕」4막 4장 126행에서 이렇게 썼다. (텍스트가 옆에 없는 관계로 약간의 오차가 있다만) <그들은 켄타우로스의 후예 / 허리 위로는 신의 창조물이지만 / 허리 아래로는 악마의 소유물 / 그곳은 지옥이며 유황이 지글지글 끓는 구렁텅이다 / 더럽다, 더러워, 펫, 펫!> 여성의 성기에 대해 혐오을 표한 예술가는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다. 라블레도 그러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여성의 쾌락 자체를 혐오했다. 살바드로 달리는 여성의 성기에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어서 성관계를 기피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남색을 했다나. 표지는 에곤 실레의 그림인데, 그의 스승인 클림트도 외음부에 대한 외설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단다. 그림 제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나체의 임산부가 횡으로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이다. 임산부의 나체를 아름답게 묘사한 화가는 클림트가 처음이었단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저자가 긍정을 표하는 예술가는 클림트 뿐인 듯하다.

이 책은 여성의 음부에 가해진 수치, 수치의 역사에 대한 엄청난 자료를 토대로 씌어졌다. 주석이 무려 200페이지나 된다. 삽화도 엄청나다. 책읽는 재미보다 삽화보는 재미가 더욱 솔솔하다. 여성의 성기를 <지옥의 심연>처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나, 중세의 풍자 삽화, 남자 조산원과 의사에 대한 풍자 삽화 등은 보는 재미를 자극한다. 얇지 않는 이 책을 순식간에 읽은 이유이기도 하다.  

외음부의 수치심에 대한 연구 대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타히티섬은 물론이고 오지의 원시족들까지 파고들어서 부족함이 없다. 외부부의 수치심에 대한 역사 연구는 고대에서부터 현대를 아우른다. 일본의 경우는 외음부를 숭상했다며 저자는 친근감을 내비치기도. 일본에 대한 일화 하나. 1900년대 초반, 어느 목욕탕에 불이 나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릴 때 외음부가 남들에게 보여질까봐 안 뛰어내리고 그냥 타 죽었단다. 그후로 한 페미니스트는 기모노 속에도 팬티를 입으라고 주창하고 다녔다지만 기모노 속에 속옷을 안 입는 전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유럽에서도 조선시대처럼 임산부들에게 진찰하는 의사의 문제가 골치였던 모양이다. 남자 산부인과 의사와 남자 조산원들은 수치의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임산부를 진찰할 때 의사가 앉는 자세며, 손가락을 집어 넣는 자세며, 그런 것들의 디테일한 발전과정 등등이 아주 상세히, 자료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이 늘 수치심 자극의 요소였고 문제였으면서도 유럽에서는 여의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남자들의 권위 문제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후에 손가락으로 임산부를 진찰하는 것은 해롭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계속 손가락으로 진찰하는 의사 나부랭이들이 있었다 한다. 임산부를 진료할 때 각종 진료자세란 것도 있었는데, 그중 암소 자세란 것도 있었다. 섹스할 때의 후배위가 그것이다. 환자에게 그런 자세를 강요하고 의사가 진료를 했단다.

검경의 사용에 대한 쇼킹한 사건 하나. 18세기 무렵의 프랑스에서는 매춘이 의심되는 여자를 경찰들이 검경으로ㅡ게다가 정기적으로ㅡ검문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어느 부인이 열여섯 난 딸과 함께 귀가 중이었는데, 불쑥 나타난 경찰관이 경찰서로 끌고 가서 검문을 하려니, 부인은 옷을 벗지 않고 버텼다. 그래서 수감되었다. 부인은 너무나 원통해서 강물에 투신했다. 임신여부를 확인한다는 검경을 경찰관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쇼킹하다. 현대에 들어서도 남자 산부인과 의사의 문제는 여전하다. 그들은 환자를 두고 전문적인 용어를 지껄이며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환자의 수치심을 고려해서 부러 기계적이고 거칠게 진료를 하는 경우도 있단다. (나는 남자이고 게다가 이 부분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으므로 잘 모른다. 그저 이 책을 읽었을 따름이므로 요즘의 산부인과가 어떤 지는 전혀 모름) 저자가 생각하는 해결법과 내가 생각하는 해결법도 같다. 산부인과 의사는 여자가 하면 되는 거다! 남자가 왜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거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서문과 부록이 주로 엘리아스에 대한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문에서도 틈틈이 엘리아스를 공격한다. 저자는 엘리아스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진 듯싶다. 정도를 지나치고, 감정적이어서, 저자가 방대한 자료로 써낸 이 책의 독서를 저해한다. 게다가 중구난방이라는 감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나 방대한 자료 탓일까?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문제 제시는 있는데, 그것으로 결정적인 결론이나 요지를 발견하거나 도출하기가 어렵다. 외음부에 대한 수치심에 대한 묘사가 엄청나지만, 그래서 어쩌라구? 에 대해서는 빈약하다. 이 책은 나체와 수치의 역사, 은밀한 몸, 음란과 폭력 ㅡ 연작이고, 2부에 해당하기 때문인 듯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10-0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궁금하네요, 왜 엘리아스를 공격하지요?

쎈연필 2004-10-09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이라는 책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고, 엘리아스의 제자들이 저자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라는 책을 비판한 이유도 있는 듯합니다. 더 궁금하시면 책을 읽어보세요~^^
 
거대한 고독 - 토리노 하늘 아래의 두 고아 니체와 파베세
프레데릭 파작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이것은 평전도 그림책도 만화책도 아닌 규정짓기 애매한, 규정을 거부하는 책이다. 번역자의 말대로 잉크 대신 커피 진액에 찍어 그렸는지 글과 그림이 쓰고 그 뒷맛이 우울하다. 너무나 아폴론적인, 환하고 명랑하며 분주한 세계, 그림자와 괴괴함과 느림과 우울이 결핍된ㅡ결핍된 것처럼 가장된ㅡ시대에 선사하는 더 없이 디오니소스적인 멜랑콜리.

이 책은 이태리 북부 도시 토리노다. 악마의 유적들이 남아 있는 토리노, 에서 정신을 놓은 니체다.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면서 자살한 파베세다. 키리코이며 고흐이며 폴록이며 프레데릭 파작이다. 예술이 문화상품이 된 시대에, 이 책은 온통 예술가에 대해 고민한다. 니체를 소환하고 파베세를 읊는 당신에게, 응, 응,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해도 나도 느껴, 우울하다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종교보다도 햇빛 속을 걸어가는 한 남자의 그림자 속에 훨씬 더 많은 수수께끼가 있다. 수수께끼의 남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스스로를 찾으러 다녔다. 토리노에 당도했다. 이들은 토리노에서 한결같이 희열했다. 니체는 그곳에서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울다 쓰러졌다. (이전까지 내가 읽은 니체에 관한 책은, 모두 여기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쓰러진 그 후의 이야기를 그 어느 책보다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깨어나서 즉흥곡을 연주했다. 멜로디를 잃은 자신의 괴성과 함께, 끝을 모르고 연주했다. 탈진해서 의자에 파묻힌 그의 손에는 최후의 저작 「니체 대 바그너」가 들려 있었다. 니체의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 넣었고, 니체는 수다스럽다는 이유로 진정제를 과다하게 맞고, 격리되고, 미친놈이 되고, 후세에는 그런 광기의 나날이 묻혀진다. 니체는 질투심 많은 여동생에 의해 괴롭힘 당하고, 니체가 죽어서는 그의 유고를 여동생이 왜곡하고, 나치즘의 선동에 이용당했다. 오해는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풀렸다.

그림과 글을 오가는 작가는, 니체와 파베세를 오가며, 고흐의 빈 의자가 뉴욕경매장과 어째서 관계가 있어야 하냐고, 니체가 히틀러의 총구와 어째서 관계가 있어야 하냐고, 밀밭의 까마귀를 누가 쫓았냐고, 폴록의 그림과 니체의 언어에는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키리코의 우울과 이제껏 거론했던 모두의 우울은 일맥한다고, 토리노에서, 예술가들의 인생을 빌어 수줍게 말한다. 정신으로나 창자로나 굶주렸던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그의 우울한 헌사가 못 견디게 아프게 고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4-09-14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호기심을 유발하는군요.

2004-09-14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