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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무척이나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책을 구입한 일자가 4월 19일이었음에도 이제서야 겨우 한번 읽어냈을 뿐임을 고백한다. 지금이 6월 28일 0시 35분이니 두달이 훨씬 지나버렸군.
종종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한쪽에 치워두게 되는 책들이 있다. 언젠가 그런 책들을 모아 한번 정리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책도 거기에 낄 뻔 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쌀한가마니의 쌀알을 세는 기분으로 끈덕지게 읽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배수아님의 시니컬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그 점때문에 그녀의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이니 스스로에 대한 배신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요일의 스키야키식당'에서 그녀가 보여준 자발적 가난에 대한 시선은 내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독학자'도 읽었고 새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망설임없이 구입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첫인상부터 왠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보통 책의 1.5배는 족히 되어보이는 두툼함, 두께를 고려한 듯 약간은 얇은 거친 느낌의 종이, 첫인상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7개의 단편들... 배수아, 그녀는 무척이나 시니컬하다.
매일매일은 쾌락을 위한 죽임의 향연이며 부유한 자들은 그 피와 살점의 더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가장 맛있고 연하며 건강에도 좋은 싱싱한 부위를 골라 찢어내어 입으로 가져간 다음 그 맛을 즐기면서 미소를 지었고 가난한 자들은 그 둘레에 모여들어 찌꺼기라도 얻기 위해 요란하게 헐떡거렸으며 행여나 운이 좋아 자기 몫의 한 점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부유한 자들을 흉내내어 같은 모양으로 입맛을 다시고 쩝쩝거리는 소리를 커다랗게 합장했다. 고통과 죽음, 그런 것 따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기만 하다면, 혀의 향락 앞에서 아무래도 좋은 것인 양 말이다. (회색 時 中)
모두들 합창하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난 말이야. 특별한 사람이니까"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훌 中) -훌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가 훌이다. 공통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들은 모두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그럴 만한 입장이나 자격이 아닐 때 남용되는 표현들은 불쾌함을 자아내는 무례한 행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불쾌와 무례가 비록 대상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쓸쓸할 수 없고 P는 그를 향해서는 고독하다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검열에 비추어볼 때 영역을 넘어서는 외람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시취 屍臭 中)
이렇듯 그녀의 시니컬함은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힘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 스스로도 그녀가 지닌 이러한 시니컬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각자 고독하게 늙어갔으며 차가운 천성 때문에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남겨두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지금 각자 혼자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들, 우리들 세 사람 중의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노래하고 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으며 중요하지 않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어 있는 빵 바구니와 바람의 영혼뿐이다. (회색 時 中)
본인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나도 일찌감치 눈치 챈 시니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 그녀의 책을 드는 것은 무더운 여름 견딜 수 없는 갈증에 냉동실을 열어 꽁꽁 언 얼음하나를 입안으로 얼른 집어넣었는데 그 얼음이 혀에 딱 붙어 따닥 소리를 내며 혀를 갉아먹는 아픔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얼음을 입안에서 요리조리 살살 잘 구슬리면 사르르 녹아 혀도 놓아주고 더위와 갈증도 삭혀주는 것처럼 나는 배수아님의 시니컬함을 통해 내가 놓칠 수 있는 시각의 사각지대를 다시 한번 일깨운다. 혹여 내가 그런 모습은 아닌가. 혹여 내가 인간을 배려치 못하는 시니컬은 아닌가. 혹은 인간을 배려한다는 명목 하에 가려진 이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독선과 아집이 가득 묻어나는 어투일 때면 우선 반항부터 하고 보는 심리, 그래서 난 이번 책 '훌'이 힘들었다. 인간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시니컬 아니냐고 혼자 역정도 내어보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또 그녀의 글이 그리웠다. 나태해지고 적당히 타협해가는 내게 힘들면 그럴 수 있지 뭐, 괜찮아, 원래 다 그런거야. 따위의 달콤한 말들만 하던 적당히 친분있던 친구가 아닌 그딴식으로 살지마, 네가 하는 게 그렇지 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냐? 하고 매섭게 쏘아붙이면서도 결단코 내곁은 떠나지 않는 한 친구녀석처럼 배수아님의 글들에 상처입고 헤지면서도 끝까지 읽지 않고 외면한다는 것은 마음 편히 잊혀지는 일이 아니었기에 다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또 은근슬쩍 손을 뻗어 책을 펼친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무릎 탁 치며 옳거니, 잘한다. 할런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상에 일반보다 이반, 주류보다 비주류를 위한 글을 쓰고 있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히 소외된 자였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사방에 무수히 많은, 그런 식으로 소외된 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그의 공간과 환호를 채우기 위해 징집된 존재였습니다. 내 탄생은 예술을 위한 징집이었을 뿐입니다.(양곤에서 온 편지 中)
어쨋거나 나는 힘든 여정을 끝마치고 한숨 돌린 기분이다. 그러나 한켠으로는 읽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놓쳐버린 맥을 위해 한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려면 단련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산정상을 향한 등산을 위해 조깅따위로 기초체력을 쌓는 것처럼...
이번 책이 유독 힘들었던 건 어쩌면 지금 내가 나태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매섭게 쏘아붙여주던 친구녀석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글을 그나마 정리해보고자 문학평론가 김미정님의 글 일부를 따올까한다.
도플갱어 윤리학 혹은 어떤 구애의 형식
배수아의 '나'들은 애초에 타자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부여받은 보편성에 환원되지 않기 위해 갖가지 익숙한 정체성의 징표들을 버리고 '구별된 나'를 선언했다. 즉, 부당한 보편성이나 선험적 공통감각으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성에 기반한 '나'를 재발견하기 위해 배수아의 소설은 여행을 계속해온 셈이다. 가족과 성(性)과 국적과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그리하여 원치 않는 규정과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이들. 이때 자발적 고독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역으로 그들을 가두는 동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고립과 고독은 일종의 심연을 경험케 한다. 이 어두운 심연은 돌파와 탈출의 극적 조건이다. 심연에서 '도약'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