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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
손창섭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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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문학대계 30 손창섭 | 동아출판사 | 초판발행 1995.5.20
 
中 [잉여인간] p.329-p.372
 
자본의 영역에서 길러진 나는 자본을 창출하지 못하는 내가 잉여인간은 아닌가 자괴감에 빠지다.
그러나 극비는 비자본의 영역에서 내가 필요인간이라 들려주다.
그래도 자본의 영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게 극비는 "계약서 쓸까?" 농반진반 던지다.
그 파장으로 일렁이는 생각의 물결을 달래듯 [잉여인간]의 한 부분
 
"「장 크리스토프」라는 롤랑의 소설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우. '사람이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여보,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 줄 아내가 있는 이상 나는 결코 꺾이지 않을 테요. 그러니까 날 위해 과히 걱정 말구 어서 울음을 그쳐요. 자 어서, 이게 뭐야 언내처럼." (p.358)
 
[잉여인간]을 읽으며 오히려 세상에 '잉여인간'은 없음을 이해하게 되다.
부인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비분강개파 채익준이나 하릴없이 만기치과의원에 앉아 졸기나 하는 실의의 인간 천봉우나... 사회에게는 '잉여인간'으로 던져졌을지라도 삶에게는 모두가 '필요인간'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풀지못한 숙제 하나 '여성의 경제적 독립'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다.
 
극비가 말하길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사고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책을 읽는다."
틀 안에 갇혀 허우적대는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보아온 이의 한마디,
내 틀에 작은 구멍이라도 내어 가느다란 빛이나마 들어오기를...

내가 본 이 책에 오타 하나 

p.372 잉여인간이 끝난 자리에

(『낙서족』, 일신사, 1959)

당혹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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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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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이 더 재미있는 영화가 있듯 평가글이 더 재미있는 소설도 있다.
 
(상략) 병이란 사람 몸에 피는 꽃 같은 것이었나봅니다. 산다는 게 죄다 그렇게 제 몸 안에 꽃피우는 일인가봅니다. 앓는 일이라는 게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자기 몸에 꽃피우고 이 풍진 세상 건너가는 사람들 얘기 읽으며 저도 조금 병들었습니다. 치명적입니다.(하략) -김연수(소설가)
 
위 평가때문에 이 책을 집었다.
그러나
내내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내가 힘겨웠다. 책읽기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인 내게 내 눈은 가려진채 다른 이의 눈으로 봐야 하는 세상은 곤욕이었다. 때때로 이렇게 내게 곤욕을 주는 책도 있다.
그러나
내 눈만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듯 또 다른 눈이 세상엔 존재하는 것이라 위안한다. 이 소설의 눈으로 세상보기가 편안한 이, 혹 이 글을 본다면 부탁컨데 이 소설의 눈으로 세상보기를 불편해하고 곤욕스러워한 한 여인이 있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려 노력했듯이...
 
 
『바자』2006년 3월호에 실린「배웅」
『문학동네』2003년 여름호에 실린「화장火裝」| 2004 이상문학상 수상작
『창작과비평』2005년 겨울호에 실린「항로표지航路標識」
『문학동네』2006년 봄호에 실린「뼈」
『현대문학』2005년 1호에 실린「고향의 그림자」
『문학동네』2005년 여름호에 실린「언니네 폐경」| 2005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실린「머나먼 俗世」
『내일을여는작가』2006년 봄호에 실린「강산무진江山無盡」
 
 이렇게 여덟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가요라 불리워지는 노래가 모든 연령대에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인 내 동생이 부르는 노래와 내가 부르는 노래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부르는 노래들은 각자가 현재의 자신을 가장 잘 흡입하는 듯한 노래일 것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소설 자체의 결함이나 문제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감명받는 때가 다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배웅」과「화장火裝」에서 풍기는 수컷의 냄새는 미안하지만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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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문학사
김종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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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해외여행에 숙달된 우리나라 국민께 바치는 귀여운 똥침같은 것이라는「율려탐방기」,(제목에서도 눈치챘겠지만 허생전과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이상국가의 만남이 바로 율려국이다. ㅎㅎ) 탄광을 나와 진폐증으로 병상 생활을 하다 스러져간 허다한 광부 어르신들께 삼가 조의를 표한다는「낭만삼겹살」(제목이 깜찍하지 않은가?), 여전히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고 계신 아버지가 준 30매의 원고를 10매도 못 되게 줄여 넣어 액자소설형태가 되었다는「김씨네 푸닥거리 약사」,본인을 모델 삼아, 본인이 겪은 그대로를 써도 이야기가 될 때가 있다는「단란주점 스타크래프트」,3S로 먹고사는 어느 국가를 대 혼란에 빠드리며 축구 월드컵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전 세계인에게 바치는 서정시라고 자부한다는 「절멸의 날」,한때 명성을 날리다가 한순간에 소멸된 어느 기업을 모델로 했다는 「쇠북공기전 망징패조편」,쓰레기(엽기) 더미를 제재로 풀뿌리 민주주의 시대의 지방정치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싶었다는 「조싼은 헤맨다」,문학의 본질, 문학을 한다는 것, 작가라는 존재, 독자의 정체, 작가와 독자를 매개하는 출판시장과 그 관계자들, 이러한 엄청난 문제들을 소설로써 탐구해보겠다는 각오로 기획했다는 「낙서문학사 창시자편」과 「낙서문학사 발흥자편」까지 2002년에서 2006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작가의 아홉 단편들이 묶여 나온 책이 바로 이 「낙서문학사」다.(각 단편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은 작가의 말에서 직접 따왔다.)
 
낙서문학...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어쩌면 낙서문학이고 낙서문학사를 쓰게 된다면 그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임을 또 해야할 것 같다. 내가 즐겨쓰는 괄호안에 주절대기는 이 소설에서도 종종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각설하고 낙서문학이라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자본의 논리, 사회적 형식의 틀 안에서 굴절되고 왜곡되는 사이비 문학의 또 다른 이름-최성실님 해설에서 빌려오다-으로 불려졌지만 여기서 내가 쓴 낙서문학은 기존문학의 도전장 같은 의미로 썼음을 밝혀둔다. 아래를 보면 내 의도가 확연해질 것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게 영 사기판 같았거든요. 그의 낙서문학 때문이죠. 그가 낙서문학을 했을 당시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가 죽고 한참 뒤에 모두들 그의 낙서문학을 떠받들고 있어요. 과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쩐지 사기 같단 말입니다. 「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사기같은 문학판에서 도도한 고개 빳빳히 들고 이건 어쩔껀데? 하는 것만 같다. 이 소설
 
초지일관 우긴다고 해서 다 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풀이처럼 우겨서 되는 경우도 가끔은 있지요. 한국 문학사를 살펴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1960년 초반에 한 젊은 평론가가 어떤 소설가의 소설이 한국 문학을 혁신했다고 주장했을 때 문단의 반응이 어땠는 줄 알아요? 돌았다, 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10년도 못 되어, 그 젊은 평론가의 말은 문단적 합의가 됐잖아요. 그 젊은 소설가는 한국 문학을 혁신한 최고의 소설가가 됐고요. 서른 갓 넘은 나이에 말이에요.「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우겨보자. 내 입맛에 안 맞다고 소설이 아닌 건 아니니까. 우겨보자. 그렇게 우겨대는 소설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우리한테 돈으로 문학했다고 욕하는 새끼들, 그 새끼들은 대체 얼마나 깨끗했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개나 소나 다 돈 보고 문학하던데, 왜 우리만 보고 지랄들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낙서문학사 발흥자편 中」
 
이 책을 읽으며 가수 이적이 썼다는 지문사냥꾼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구입하거나 진득하니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읽지도 않고 뭐라고 입을 떼는 것이니 그것이 마뜩치 않은 사람은 이 부분은 건너뛰길 요망한다.) 그러나 몇몇 그 소설의 지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 지문들은 내게 난해하기 그지없으며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가.. 싶었다. 김종광님의 이번 소설에서도 몇몇 부분에서 나는 읽으면서도 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가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바로 '현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라고 책은 읽지 않는 요즘 것-미안하다. 것이라고 해서. 그러나 너무 분노치마시라. 나 역시 것이다-들에게 장난삼아라도 읽으라 말하는... 그러나 정작 장난이 아니였음을 말하는 소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바로 오늘의 소설이 아닐까 한다.
 
이적의 유명세(≒돈)만 김종광님에게도 있었다면(돈은 좀 있는 거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 신문에 광고가 좀 크게 나는 거 보면 있는 것두 같고... 혹, 내막을 아시는 분 내가 내막도 모르고 주절댄다고 씹지마시고 조용히 좀 알려주시기를...) 지문사냥꾼의 난리법석 버금가게 법석 떨어대지 않았을까. 이 소설...
 
참,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풍자적이다. 풍자적 소설. 뭐라고 하지 마시길, 나는 전문가는 아니니깐. 또한 최성실님의 해설에서 빌자면 이야기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김종광 작가에 있어, 소설이란 언어를 향유하고 즐기면서, 서로 소통·교감하는 난장(亂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김종광은 이 난장을 실험할 수 있는 소통 전략으로, 발화로써 소설 텍스트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 최성실님의 해설 中
 
"너처럼 도망치는 것들이 살아남지. 또한 나처럼 교활한 작자들이 살아남지. 아무리 많이 죽어도 누군가는 생존하게 돼 있어. 그들 생존자들은, 다시금. 자신들을 스스로 지배하기 위한 체제를 만들 것이고. 자신들의 사상을 흐릴 언론을 만들겠지. 인간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체제와 언론에 지배당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족속이거든. 저 총성과 불꽃은, 또 다른 지배체제가 만들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야." 「절멸의 날 中」
 

난 문학을 모른다. 예전 센티멘탈의 감상문을 썼을 때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블로그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글들을 접했다. 왠만한 글솜씨부터 고만고만한 글솜씨까지 본인 스스로는 한다하는 생각에 휘갈겨놓은 글들이려니... 물론, 나 역시 끄적이고 쓴다.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쓴다. 쓰고나면 마음이 편해지니 쓴다. 그러나 내 글을 문학이라고, 글 좀 쓴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끔 아무 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쓰레기처럼 넘쳐나는 글의 냄새에 숨이 막혔다. 그래서 나 역시 쓰기를 주저한 적도 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이 책... 사실은 그런 낙서같은 글들. 그것들에 대한 환멸에 몸서리칠 때 눈에 띈 제목에 손을 뻗은 책이다. 그러나 그런 얄팍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이 역시나 담겨있다. 내가 모르는 문학세계에 대한 자책의 목소리같기도 하다. 내가 주제넘게 끼어드는 건 아닐런가 살짝 겁이 나기도 하지만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그렇다면 바로잡을 힘이 있는 건 바로 나, 독자가 아닌가 한다.

 

하해(海)와 같은 마음은... 훗, 사실 나약해빠진 마음은... 생각한다.

 유희가 소설을 쓴다면 아마도 엽기적이고 기상천외할 것이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꾼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후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작품이 소설로 통용된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그런 말을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아마 써야 할 필연성이 없었던 것이리라. 필연성이 없으면 - 가령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 아무도 소설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썼다. 그것은 역시 내 안에 그럴 만한 필연성이 존재했다는 뜻이리라.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中

애초에 낙서문학사를 집어들게 만들었던 내 마음은 사실 위 글에서 치유를 받았다. 그래,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써야겠지. 그게 낙서든, 소설이든, 시든.... 써라. 그리고 그 다음은 읽어주마. 읽어줄만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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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가 뜬다 - 제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권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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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책 중 일부가 입수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탓에 1주일 여 아무 것도 읽지 않고 보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시간이 남아돈 머리는 제 혼자 또 온갖 망상을 해대려했다. 무어라도 읽어야겠구나 책장을 쭉 훓어보다 2년만에 다시 집어들었다. 오랜만에 읽는다는 건 내용은 기억나나 문장은 새로워 빨리 읽히면서도 느낌은 새롭다는 게 이점이다.
 
'바빌론특급우편'과 '싸이코가 뜬다'를 읽은 주기가 촘밀해서인가 문득 '아! 내 성향이 이렇구나' 새로웠다. '정상', '상식', '일반'이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어디선가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라'했던 게 생각난다. 가만 보면 나도 좀 편식(? 목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어쩌면 모두가 '정상/혹은 비정상'인지 모른다. '정상'의 기준이 다수가 행하는 것이라면 실은 다수가 관심있고 행하면서도 겉으로는, 타인에게는 아닌 척 하고 있을 뿐일지 누가 아는가말이다.
 
고등학교 때 사촌오빠로 부터 '사이코'라는 말을 들었다. 썩 유쾌한 단어가 아님에도 나는 왠지 그 단어가 기분 좋았다. ㅎㅎ 이미 그때부터 나는 사이코였나보다. 아니, 세상에 사이코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다 미쳤고 모두가 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종종 나의 이런 글들에 행동은 없고 머리만 있다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 나는 어쩌면 갖은 게 많은 지도 모른다. 주류일 것이다. 나의 표면만 보는 이들에게 내가 비주류임을 눈치채게 할 만한 무엇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한동안은 미안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그러나 그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그냥 생겨먹은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나마 편하다. 그거면 됐다.
 
그럼에도 종종 이런 회의가 들기는 한다.
 
'난 어디서 왔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인류의 학문 발전 방향과 흡사했다. 난 어려운 철학 책을 꽤나 읽은 사람처럼 그런 존재론적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개폼이 아닐 수 없다. 2차 대전 이후 시를 쓰는 건 사치라고 했던 한 사상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게 사치는 아닐까? 책은 딱딱한 껍질에 갇혀 민생을 보지 못하기 일쑨데, 혹은 뒷북만 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양 으스대곤 하는데, 책이란 너무 오만한 사물 아냐? 나는 책의 오만함에 짜증을 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오만을 희석시키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난 벼락치기 인생, 불멸의 벼락치기로 아직도 남아 있을 욕망을 소멸시킬 방법은 뭘까?
이제부터 할 일은 단 하나, 울트라 니폰 행성을 염탐하는 고독한 외계인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화끈하게 커밍아웃 해보자. 나는 대한민국의 변태*다!
 
*변:태(變態)[명사]
1. 모습이 변하는 일.  또는 그 변한 모습
2. 식물의 줄기·잎·뿌리 등이 보통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변하는 일.
3. [하다형 자동사] 동물이 알에서 부화하여 성체(成體)가 되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는 일, 탈바꿈.
4. '변태 성욕'의 준말.
5. 이상한 사람.
......
(내가 몇 번에 해당하는지는 가르쳐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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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특급우편
방현희 지음 / 열림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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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아무리 엽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고 아무리 튀고 자극적인 것이어야만 주목을 받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지 않냐'고 말할 자가 있겠다.

 열기를 가누지 못하고 내달리던 수소인 그는 필연적으로 맨 처음 맞닥뜨린 암소를 덮쳤을 뿐이었다.(바빌론 특급우편 中)

 너는 여자? 아니, 남자? 아, 너는 사람. 여자이고 남자이며 할아버지이기도 한 너는 사람. (붉은 이마 여자 中)

 -이외에도 놀라게 할 내용들이지만 혹여 19금을 위해 공개된 문구들만 적는다.-

 아무리 작가 방현희님이 본인의 말 중에

 내게 비정상인은 정상인이 되고 정상인은 비정상인이 된다. 그러므로 내게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아무 소용이 없다. 비정상인인 주제에 허술하기까지 하면 내겐 금상첨화가 된다. 그들과 나는 아주 잘 교류할 수 있다.

 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것은 일반에서 벗어나도 한참은 벗어난 이야기들인 듯 하다.

본인은 지극히 정상(?)이며 일반인이라고 확고하게(?) 세뇌된 사람은 읽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러나 사랑에 한번쯤 아파해 본 사람이라면,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몇 날 며칠을 술과 불면증으로 지새워본 사람이라면, 술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진물에 절어본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안된다고 주문을 걸면서도 제멋대로 내달리는 마음을 아프게 직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긋히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후회하지 않으세요?

그가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사랑한 걸 설마 후회하겠어요?

(말해줘, 미란 中)


 

몇몇 작품의 문장들이 흡사 꿈처럼 느껴졌다.

도대체가 인과관계도 맞지 않고 말도 되지 않는 듯한 상황들이 꿈에서는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예를 들어 무협영화에서처럼 내가 하늘을 날듯 뛰어다닌다거나, 비행기를 탔는가했더니 화장실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거나 해도 꿈에서는 그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듯이-  문장들 하나하나는 앞뒤 상호관계가 없어보이고 생뚱맞게 느껴지면서도 전반적인 상황들은 이해하며 읽어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으니까..(물론, 내 지적능력의 한계일수도 있다. ^^;;)

도덕과 윤리로 치장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벗어난 사랑, 그 사랑들이 상식적(?)-도대체 누구의 상식? 다수의 상식? 다수의 권력!-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일지 모르나 누군가는 하고 있는 일이며 또 누군가는 이해하고 있는 일임을 작품은 온몸던져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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