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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문학사
김종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6월
평점 :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해외여행에 숙달된 우리나라 국민께 바치는 귀여운 똥침같은 것이라는「율려탐방기」,(제목에서도 눈치챘겠지만 허생전과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이상국가의 만남이 바로 율려국이다. ㅎㅎ) 탄광을 나와 진폐증으로 병상 생활을 하다 스러져간 허다한 광부 어르신들께 삼가 조의를 표한다는「낭만삼겹살」(제목이 깜찍하지 않은가?), 여전히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고 계신 아버지가 준 30매의 원고를 10매도 못 되게 줄여 넣어 액자소설형태가 되었다는「김씨네 푸닥거리 약사」,본인을 모델 삼아, 본인이 겪은 그대로를 써도 이야기가 될 때가 있다는「단란주점 스타크래프트」,3S로 먹고사는 어느 국가를 대 혼란에 빠드리며 축구 월드컵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전 세계인에게 바치는 서정시라고 자부한다는 「절멸의 날」,한때 명성을 날리다가 한순간에 소멸된 어느 기업을 모델로 했다는 「쇠북공기전 망징패조편」,쓰레기(엽기) 더미를 제재로 풀뿌리 민주주의 시대의 지방정치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싶었다는 「조싼은 헤맨다」,문학의 본질, 문학을 한다는 것, 작가라는 존재, 독자의 정체, 작가와 독자를 매개하는 출판시장과 그 관계자들, 이러한 엄청난 문제들을 소설로써 탐구해보겠다는 각오로 기획했다는 「낙서문학사 창시자편」과 「낙서문학사 발흥자편」까지 2002년에서 2006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작가의 아홉 단편들이 묶여 나온 책이 바로 이 「낙서문학사」다.(각 단편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은 작가의 말에서 직접 따왔다.)
낙서문학...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어쩌면 낙서문학이고 낙서문학사를 쓰게 된다면 그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임을 또 해야할 것 같다. 내가 즐겨쓰는 괄호안에 주절대기는 이 소설에서도 종종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각설하고 낙서문학이라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자본의 논리, 사회적 형식의 틀 안에서 굴절되고 왜곡되는 사이비 문학의 또 다른 이름-최성실님 해설에서 빌려오다-으로 불려졌지만 여기서 내가 쓴 낙서문학은 기존문학의 도전장 같은 의미로 썼음을 밝혀둔다. 아래를 보면 내 의도가 확연해질 것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게 영 사기판 같았거든요. 그의 낙서문학 때문이죠. 그가 낙서문학을 했을 당시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가 죽고 한참 뒤에 모두들 그의 낙서문학을 떠받들고 있어요. 과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쩐지 사기 같단 말입니다. 「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사기같은 문학판에서 도도한 고개 빳빳히 들고 이건 어쩔껀데? 하는 것만 같다. 이 소설
초지일관 우긴다고 해서 다 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풀이처럼 우겨서 되는 경우도 가끔은 있지요. 한국 문학사를 살펴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1960년 초반에 한 젊은 평론가가 어떤 소설가의 소설이 한국 문학을 혁신했다고 주장했을 때 문단의 반응이 어땠는 줄 알아요? 돌았다, 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10년도 못 되어, 그 젊은 평론가의 말은 문단적 합의가 됐잖아요. 그 젊은 소설가는 한국 문학을 혁신한 최고의 소설가가 됐고요. 서른 갓 넘은 나이에 말이에요.「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우겨보자. 내 입맛에 안 맞다고 소설이 아닌 건 아니니까. 우겨보자. 그렇게 우겨대는 소설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우리한테 돈으로 문학했다고 욕하는 새끼들, 그 새끼들은 대체 얼마나 깨끗했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개나 소나 다 돈 보고 문학하던데, 왜 우리만 보고 지랄들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낙서문학사 발흥자편 中」
이 책을 읽으며 가수 이적이 썼다는 지문사냥꾼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구입하거나 진득하니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읽지도 않고 뭐라고 입을 떼는 것이니 그것이 마뜩치 않은 사람은 이 부분은 건너뛰길 요망한다.) 그러나 몇몇 그 소설의 지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 지문들은 내게 난해하기 그지없으며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가.. 싶었다. 김종광님의 이번 소설에서도 몇몇 부분에서 나는 읽으면서도 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가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바로 '현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라고 책은 읽지 않는 요즘 것-미안하다. 것이라고 해서. 그러나 너무 분노치마시라. 나 역시 것이다-들에게 장난삼아라도 읽으라 말하는... 그러나 정작 장난이 아니였음을 말하는 소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바로 오늘의 소설이 아닐까 한다.
이적의 유명세(≒돈)만 김종광님에게도 있었다면(돈은 좀 있는 거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 신문에 광고가 좀 크게 나는 거 보면 있는 것두 같고... 혹, 내막을 아시는 분 내가 내막도 모르고 주절댄다고 씹지마시고 조용히 좀 알려주시기를...) 지문사냥꾼의 난리법석 버금가게 법석 떨어대지 않았을까. 이 소설...
참,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풍자적이다. 풍자적 소설. 뭐라고 하지 마시길, 나는 전문가는 아니니깐. 또한 최성실님의 해설에서 빌자면 이야기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김종광 작가에 있어, 소설이란 언어를 향유하고 즐기면서, 서로 소통·교감하는 난장(亂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김종광은 이 난장을 실험할 수 있는 소통 전략으로, 발화로써 소설 텍스트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 최성실님의 해설 中
"너처럼 도망치는 것들이 살아남지. 또한 나처럼 교활한 작자들이 살아남지. 아무리 많이 죽어도 누군가는 생존하게 돼 있어. 그들 생존자들은, 다시금. 자신들을 스스로 지배하기 위한 체제를 만들 것이고. 자신들의 사상을 흐릴 언론을 만들겠지. 인간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체제와 언론에 지배당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족속이거든. 저 총성과 불꽃은, 또 다른 지배체제가 만들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야." 「절멸의 날 中」
Ⅰ
난 문학을 모른다. 예전 센티멘탈의 감상문을 썼을 때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블로그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글들을 접했다. 왠만한 글솜씨부터 고만고만한 글솜씨까지 본인 스스로는 한다하는 생각에 휘갈겨놓은 글들이려니... 물론, 나 역시 끄적이고 쓴다.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쓴다. 쓰고나면 마음이 편해지니 쓴다. 그러나 내 글을 문학이라고, 글 좀 쓴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끔 아무 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쓰레기처럼 넘쳐나는 글의 냄새에 숨이 막혔다. 그래서 나 역시 쓰기를 주저한 적도 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이 책... 사실은 그런 낙서같은 글들. 그것들에 대한 환멸에 몸서리칠 때 눈에 띈 제목에 손을 뻗은 책이다. 그러나 그런 얄팍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이 역시나 담겨있다. 내가 모르는 문학세계에 대한 자책의 목소리같기도 하다. 내가 주제넘게 끼어드는 건 아닐런가 살짝 겁이 나기도 하지만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낙서문학사 창시자편 中」
그렇다면 바로잡을 힘이 있는 건 바로 나, 독자가 아닌가 한다.
Ⅱ
내 하해(河海)와 같은 마음은... 훗, 사실 나약해빠진 마음은... 생각한다.
유희가 소설을 쓴다면 아마도 엽기적이고 기상천외할 것이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꾼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후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작품이 소설로 통용된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그런 말을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아마 써야 할 필연성이 없었던 것이리라. 필연성이 없으면 - 가령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 아무도 소설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썼다. 그것은 역시 내 안에 그럴 만한 필연성이 존재했다는 뜻이리라.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中
애초에 낙서문학사를 집어들게 만들었던 내 마음은 사실 위 글에서 치유를 받았다. 그래,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써야겠지. 그게 낙서든, 소설이든, 시든.... 써라. 그리고 그 다음은 읽어주마. 읽어줄만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