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그릇 - 3만 명의 기업가를 만나 얻은 비움의 힘
나카지마 다카시 지음, 하연수 옮김 / 다산3.0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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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의 4월은 신기하고 묘하다. 날카로운 바람, 단단한 흙. 햇빛이 비추는 곳마저도 따듯하기보다 건조해서 봄은 대체 어디쯤 오는지 애를 태우던 게 3월이었다. 그런 산이 홀연히 변한다. 꽃나무의 이파리들이 말 없는 새의 부리 마냥 유순하게 돋고, 바람은 오늘 처음 태어난 것처럼 소나무의 손바닥에 뺨을 맞대어 온다. 그러면 산 전체가 소리들로 가득 찬다. 굵은 가지들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깨어나느라, 새들이 바지런하게 먹이를 구하느라, 봄꽃을 보겠다고 줄줄이 찾아온 등산객들이 산의 어깨를 밟고 오르느라 시끄럽다. 방학을 끝낸 학교마냥 별안간 소란해지지만 끝내 산 자체는 고요하다. 척박한 겨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산은 봄볕의 너그러움을 차분하게 받을 줄도,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을 품을 줄도 안다. 이렇게 받고 품어서 다음 계절로 향하는 순리를 아는 덕이다. 어느 여름에는 태풍으로, 어느 겨울에는 큰 불로 몸살을 겪었으므로 산은 태연하다. 천지의 이치를 경외하고 곤핍한 시기를 두려워할 줄 알기에 4월의 생장生長에 감사하면서 담담히 다음 계절을 예감할 뿐이다.
 몰라보게 변한 산의 4월을 바라보면서 왜 그 옛날 선비들이 산수화를 아꼈는지 알게 된다. 대나무를 닮고 싶어서 대나무를 그리고, 난초처럼 살고 싶어 난을 그렸던 그들의 시선은 산에 닿아서 저 산과 같은 그릇이 되고자 했으리라. 그들은 가고 없으나 산은 남아서 옛사람에게 보여주었던 모습 그대로 지금 나에게,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고민거리가 있을 때 산을 찾는 걸까?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를 고민할 때 우리가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산은 저 산만이 아니다. 짧게는 몇 백년, 길게는 몇 천년을 거쳐 우리에게 산이 된 책들이 있다. 책을 쓴 저자들마저 지금 없는데도 책은 남아서 우리와 만난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고전이 된 책들 중에 명나라 최고 정치가인 여곤의 사상을 집대성한 『신음어(呻吟語)』가 있다. 


 여곤과  『신음어』를 알게 된 건 일본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인 나카지마 다카시가 쓴 [리더의 그릇]이라는 책 덕분이다. 3만 명의 기업가를 만난 나카지마 다카시는 성공하는 삶과 기업 경영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비결은 오늘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노하우가 아니었다. 여곤이 30여 년을 써서 펴낸  『신음어』의 많은 부분이 이미 조직 경영과 가치 있는 삶의 정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년에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는 다독가로도 유명한 나카지마 다카시는 500년 전 탄생한 명나라 최고 고전인 『신음어』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풀어내 우리 시대가 절박하게 찾고 있는 진짜 리더, 21세기 성인聖人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리더의 그릇]에서 저자 나카지마 다카시와 여곤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을 갖자고 피력한다. 감정 과잉, 감동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그래서 모든 것이 과잉된 나머지 무력해지고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진 우리에게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이란 대체 무언지, 감을 잡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책은 17장에 달하는 작은 주제와 그보다 더 세밀한 주제들로 촘촘하게 구성을 짜고 독자를 이끈다. 1장 성명편으로부터 17장 사장편에 이르기까지 저자와 여곤의 목소리가 번갈아 말을 건다. 생각은 깊게 하되 행동은 과감하게,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마음으로 상대와 세상을 살피고, 명예와 사리사욕 보다 덕을 구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장, 한 장을 넘어가면서 처음에는 모호했던 인물의 이미지가 점차로 구체화되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내가 이 책을 만나, 이 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인연에 탄복한다.

 

 

 여곤은 공자나 맹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덜 대중적인 인물이다. 『신음어』 역시 사람을 성인과 현인 등으로 구분하고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로만 보면 그 이전의 동양 사상들과 비교해 큰 특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지키기 힘든 것들을 지키라고 강조하는(책 36쪽) 철학자다. 공기와 햇빛을 잊고 살 듯 너무 중요한데 놓치고 사는 것들의 진짜 의미를 일러준다. 특히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더욱 그렇다. 삶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며 살아낸 순간들의 총합이다. 여곤 그리고 『신음어』를 설명하는 나카지마 다카시의 목소리는 ‘사람과 삶에 대한 메타인지’로 귀결된다. 

 

 

 


 삶은 거대한 곡선이다. 너무나 커서, 이 곡선의 궤적을 걷는 자에게 그건 직선으로 보인다. 마치 우리가 사는 공간은 평지이지만 지구는 둥근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곡선은 언제나 직선으로 보인다.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고, 얽매이고, 당장의 이익만을 좇는 건 직선의 삶이다. [리더의 그릇]의 두 저자는 그래서 생각하기를 권한다, 깊게 생각하기를. 당장 앞에 있는 것과 표면으로 드러난 것만을 바라보는 대신 멀리 보고, 이면으로 들어가 살피는 눈을 갖기를 권한다. 멀리 보기에 위기와 기회 모두에 흔들리지 않고, 이면을 살피기에 위선이나 쭉정이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렇게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으로 빚어진다.

 

 [리더의 그릇]을 읽으면서 넉넉한 산길을 걷는 듯이 마음이 흡족했다. 여곤과 나카지마 다카시가 제안하는 이상적인 인물에 한참 못 미치는 자신이 부끄럽지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지난날의 내 실수들이 민망하지도 않았다. 꾸짖고 야단치듯 꼬집는 게 아니라, 침착하고 진실 되게 이상형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정말로 그렇게 살아야 되겠구나.’를 느끼게 하니 “교육이란,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심어주는 행위(책 50쪽)”라고 쓴 나카지마 다카시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게 독서의 목표임을 강조했던(책 111쪽) 여곤의 집필 목적이 충분히 이뤄지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 그 깊은 곳을 살피는 세밀한 시선에 기대하지 못한 위로까지 건넨다.

 

 

 

 

 

 이 책에는 신의도 없고, 실속도 없고, 그저 권력만 쫓을 뿐인 정치가들을 경계하는 구절이 무척이나 많다. 코로나19가 집콕독서에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준 지금은 대한민국의 선거철이기도 하다. 자기 성찰과 삶의 태도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하여 [리더의 그릇] 보다 더 적합한 책이 많지 않을텐데, 심지어 이 책은 쭉정이 후보를 골라내는 돋보기까지 되어준다. 여곤은 타락한 정치가와 정치계에 실망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여 그 치열한 성찰의 결과로  『신음어』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리더의 그릇]이 들려주는 여곤의 목소리에는 참되고 깊이 있는 인물과 그런 인물들이 경영해 가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그득하다. 아마 이 갈망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우리들이 지닌 소망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 인물이 정재계에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지금, 어쩌면 이런 인물은 아주 작은 곳으로부터, [리더의 그릇]과 같은 책을 보며 성찰하고 공부하는 작은 리더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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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증언 - 소설로 읽는 분단의 역사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0
이병수 외 지음, 통일인문학연구단 기획 / 씽크스마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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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 국적의 한국인인 소설가 김석범이 1957년 발표한 소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김석범은 일본 국적이라는 방패를 쓰고 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으나 한국 작가들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그래서 이 작품은 꽤 오랜시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존재했다.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몇 년 전에 [까마귀의 죽음]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아직 생생하다. 80년생 이후의 세대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여행하기 좋은 섬, 힐링 삼아 떠나고 싶은 지역 정도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시간동안 제주도를 취급해온 시선은 너무나 난폭하고 험악한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 동안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의 공포였고, 그 이후부터 한동안 제주도를 향해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낼 수 없는 탄압이었다. 옥빛 바다에 둘러싸인 섬의 역사에 나는 경악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기억과 증언]을 읽고 나는 경악한다. 4·3사건의 무대는 제주도만이 아니었다. 대구에서도, 여수와 순천에서도, 연천, 포천, 가평, 진도, 지리산.....

 

 [기억과 증언]은 ‘분단’을 주제로 한국의 역사를 조망하는 책이다. 몇 십 년 전의 역사를 이 시대의, 현재형의 문제와 숙제로 당겨오기 위하여 이 책의 지은이들은 ‘소설’을 도구로 썼다. [기억과 증언]을 쓴 통일인문학연구단은 통일이 단순한 정치 경제적 통합을 넘어 ‘사람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휴전선으로 잘린 건 한반도의 지형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절단부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낫지 않아 고름이 난 채로 한반도는 불통의 길 위를 침묵하며 걸어왔다. [기억과 증언]은 이 침묵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함을, 말로 꺼내어 주고 받아야 치유되고 이런 치유의 과정 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다.

 

 

 분단 문제 해결을 위하여 소통과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보고서 격의 책인 [기억과 증언].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소설’에 기대고 있다. 휴전은 역사적 사건이며 분단 문제는 우리의 현실인데 어째서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이 여기에 끼어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소설이 주는 다분한 감상과 감정에 기대자는 것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억과 증언]은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이 필요했기에 여러 소설을 파고든다. 빨치산,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대구 10.1, 국민보도연맹, 마을전쟁 등 육하원칙에 의거한 공적 정보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국사의 아픈 사건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하여 [기억과 증언]은 여러 소설들을 빌려온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연수의 [뿌넝숴] 등 이름이 익숙한 작가들 뿐 아니라 나에게는 무척 낯선 최용탁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조갑상의 [물구나무서는 아이] 등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에서 비롯한 다양한 사건과 문제들을 주제로 한 소설 18편이 등장한다.

 

 왜 소설을 렌즈삼아 한국사를 들여다보는가?

 

 위에 열거된, [기억과 증언]이 연구하고 분석한 한국사의 고통스런 사건들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영향을 주는, 내가 받은 유산이자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의 기록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자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단’의 문제를 나의 현실 문제가 아닌 별나라의 골치 아픈 이슈로 치부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학은 역사와 나 사이의 간극을 단숨에 메꾼다. 문학은 쓰는 자는 물론 읽는 자로 하여금 다른 존재가 되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뿌넝숴]를 읽으면서 주인공 ‘나’에게 몰입하고, [순이 삼촌]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묘사하는 ‘순이 삼촌’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체감해본다. 그 주인공이 중국인이든, 나와 성별이 다르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학의 힘이다. 그래서 [기억과 증언]은 소설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고, 분단의 상처라는 걸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다이버처럼, 육하원칙의 이면으로 들어가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그 역사의 본질을, 그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억과 증언]이 소설이 주는 감상에만 몰입했다는 건 아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므로 소설에만 기대면 이 책의 집필 의도와 다르게 실제 역사를 왜곡하거나 그 무게를 가볍게 혹은 너무 과장되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감정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위하여 철저하게 경계하듯 각각의 보고서를 써나갔다. 당시의 사건을 체험한 개인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하여 소설을 인용하지만 실제 사건의 흐름, 시간의 순서와 영향들을 사료에 의거하여 정당하고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여순 사건의 전말을 읽으며 나는 이제 ‘여수 밤바다’를 낭만적으로만 부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예감을 했다. 국민보도사건의 일을 읽을 때에는 마치 영화에서 간첩이나 탈북자들을 살해할 때 보았던 장면이 겹쳐 소름이 돋았다. [기억과 증언]은 독자로 하여금, 분단과 관련하여 한반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교과서에 기재되는 글자, 피가 흐르지 않는 유물이 아니며 이 모든 일은 피와 뼈가 있는 사람의 일이자 우리가 현재형으로 겪고 있는 트라우마이고 이제는 청산해야 하는 유산이자 빚임을 충분히 깨닫도록 만든다.

 

 이 책 한 권 덕분으로 나와 대립하는 상대를 무조건 적폐, 친일, 친중 등으로 매도하며 비난 일조로 몰아붙여 매장해버리는 정치권의 난폭함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행태임을 알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만 바뀔 뿐이다. 분단 시기에는 빨갱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흑백 논리와 공격성,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과 집단 히스테리 등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태 역시 분단 당시의 여러 사건들에서 기인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단이 남긴 유산이었음을.

 

 통일인문학연구단의 말처럼 유산은 누리는 것도, 갚아야 할 것도 있다. 우리가 사회적 유산을 누렸다면 그 유산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분단이 남긴 문제는 과거, 우리 이전의 세대들이 못한 일로 남으면 안 된다. 우리 세대가 지금 바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여야 한다. [기억과 증언]은 우리 세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선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한국인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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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김소월 지음, 나태주 시평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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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때는 꼭, 각 인물의 대사를 입으로 소리내어 보라고 한다. 직선과 곡선으로 박제된 글자로서가 아니라, 둥글려지는 혀의 울림과 길거나 짧게 마치 파도의 나래처럼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운율이 소리를 타고서야 비로소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현한 의미의 진짜 표정은 말하는 이의 혹은 듣는 이의 얼굴로 옮겨 고스란히 물든다.

 소리의 마법. 글에 고정된 감상과 감정이 말과 운율을 타고 되살아나는 마법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은 詩의 장막이다. 구어와 운율을 양 날개 삼아 어느 한국인에게나 익숙하게 시의 세계로 날아오르게 이끄는 민족시인, 김소월. 국민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하는 수식어로 김소월을 부르는 이유는 비단 진달래꽃이라는 작품이 유명해서만은 아니다.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새로 펴낸 [김소월 시집 진달래 꽃]의 서문에서 나태주 시인은 김소월의 시가 어떻게 민족성, 보편적인 국민성을 획득하는지를 설명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시인 가운데 김소월만큼 장기간에 걸쳐 폭넓은 독자층의 지지를 확보한 시인이 있었던가. 김소월의 시는 단연 독보적 존재로서 우리 민족의 마음을 울리며 장강과 같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내일로 가고 있다.
 시에서 말하는 개성과 보편성을 두고 볼 때도 김소월만큼 그 두 가지 면을 고르게 성취한 시인이 없다. 김소월의 시야말로 개성, 시인만의 오로지한 특성이 분명하면서도 독자들에게로 향한 보편성도 드넓게 열린 시라고 할 것이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 꽃] 5쪽

 

 시의 재료가 감정이란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좋은 마음은 없다. 사랑의 대상이나 그리움의 대상으로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이 될 수도 있다.
 이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름다운 말, 예쁜 말, 착한 말로 정성껏 다듬어 쓰는 시가 바로 연애시이다. 이러한 연애시야말로 시의 본령이며 독자들이 진정 원하는 시이며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시이다.
 그런 점에서 김소월의 시가 연애시라는 점은 비난이 아니라 칭찬이 되어야 한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 꽃] 7쪽

 

 김소월 시의 바탕은 우선 우리의 전통적 민요에 있다. 민요적 가락을 십분 발휘하여 시를 이룬다. 한때는 7·5조라 그랬지만 그 이론이 극복되고 지금은 3음보 가락이라고 말을 한다. 우리의 민요의 기본 리듬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3음보 가락을 변용시켜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본다. 시인만의 체질화된 숨결이라 하겠다.
 소월 시의 그다음 특성은 철저한 구어체 문장의 사용이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 꽃] 9-10쪽

 

 

 [김소월 시집 진달래 꽃]에는 나태주 시인의 여는 글, 김소월의 작품들, 김소월 시인이 쓴 유일한 시론인 시혼詩魂까지 한 권에 엮여 있다.
 33세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김소월 시인의 생애는 내가 다 아깝고 안타깝다. 릴케는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므로, 벌이 꿀을 모으듯 시인은 한평생 의미를 모으고 모아 쓰는 거라고, 그래서 한 행의 시를 쓰기 위하여 많이 보는 거라고 했다. 많이 본다는 말은 곧 오랜 시간을 본다는 것이리라. 십 년의 짧은 시간 동안 민들레 같은 진실한 시들을 남긴 김소월 시인에게 만약 그 다음 십 년이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태주 시인이 서문에서 쓴대로,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숙성하고 정제되어 보다 풍요롭고 향미 짙은 숲을 이루었을 그의 시詩 세계를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낭만이 아니라, 분명한 유산이 되었을 그 세계의 부재를 실감하기 때문에 아깝고 안타깝다.

 


 그래서 김소월의 시집, 내가 전에 만나지 못했던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감동하는 일에 단순한 즐거움과 기쁨일 뿐 아니라 아련한 그리움이 더해지는가 보다. <진달래꽃>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대략만 알았던 김소월의 시 세계는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계절은 여름을 기약하는 봄인데 시집 속의 시인은 때로는 흑백의 겨울에서, 또 가끔은 먼지 바람이 이는 가을에서 그리움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다. 이별이, 서러움이 계절을 가려 묻고 오지 않으니 그런 이별의 섦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 역시 사계절을 가려 묻지 않고 읽히겠거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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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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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번역어에 대한 연구는 언어와 사상, 사회 현상에 대한 연구와 반드시 연결되기 마련이다. 개념이 없다면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과 현상의 존재 증명은 언어의 몫이다. 어떤 개념을 뜻하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인 한이나 정이 다른 언어권으로 넘어갈 때나, 영어권의 right, individual이 우리말로 넘어올 때 넘어야 하는 장벽을 가능한 매끄럽게 해결하기 위하여 번역가들이 각 언어권의 사회 및 생활상을 넓고 깊게 연구해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 언어권마다 존재하는 개념과 현상의 편차. 아무리 세계는 하나, 지구촌 한 가족이니 어쩌니 해도 이런 편차의 장벽은 계속 존재하리라 싶다. 같은 말을 쓰는 남한과 북한에서조차 70년의 단절의 결과로 엄청난 개념과 현상의 편차가 있는 걸 보면 그렇다.

 

신간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는 번역어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사회, 개인, 근대, ,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녀)10개의 어휘가 19세기 중반에 서구로부터 일본으로 유입된 과정과 결과를, 야나부 아키라 저자가 정리했다. 봉건시대에서 근현대로 진화하면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보인 것이 언어일 것이다. 이 책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는 메이지 시대(1800년대 중후반)에 일본으로 유입된 서구 사상에 담긴, 일본에 없던 개념과 현상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고민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자취가 잘 담겨 있다.

사회社會라는 단어는 오늘날 학문과 사상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신문, 잡지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온갖 활자 매체에서 쓰이고 있다 게다가 비교적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는 society의 번역어다. 대략 메이지 10년대(1877~1886) 무렵부터 활발히 쓰이기 시작했으니까 역사가 약 1세기 정도 된 셈이다.

본래 society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였다. society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은 곧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일본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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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는 궁극적으로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관계다. 좁은 의미의 인간관계든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나 에서는 사람들이 신분으로서 존재했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아 society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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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어휘 중 가장 첫 번째 꼭지는 society인데 이 단어가 社會사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번역의 장벽이 단순히 의미 전달의 어려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단어를 들여오는 건, 개념을 들여오는 것이며 그 개념이 뜻하는 현상과 그 현상에 연결된 세계까지 함께 들여오는 일이다. 당시 일본에는 관계를 맺는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society에 내포된 관계성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없으니 사회라는 단어에 이 개념을 입히기까지 번역가들과 당시 지식인들의 노력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현재의 예로 mindfullness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이 단어의 번역어인 마음챙김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 안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가?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에서 가장 재미있는 꼭지는 제5장 연애와 제7장 자연 그리고 제8장 권리였다. 특히 제8장 권리의 경우 powerright의 개념 차이, rightpower의 번역어로 권이 널리 쓰였으나 본래 right의 개념은 힘과는 대립하는 것임을 설명해주는 데, 이건 일본의 경우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서구 사상서들의 경우 (요즘은 원서를 다시 번역해서 출간하는 책들도 많으나) 일본적으로 번역된 내용을 다시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책들이 많기에, 19세기 중반의 사상서들에 등장하는 주요개념이 어떤 배경과 이유로 근대, 사회, 자유 같은 한자단어들로 번역되었는지를 한번쯤 살펴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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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단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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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코넬리는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다. 30년 가까이 범죄스릴러소설을 써왔다.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는 벌써 7편이 발표되었고, 살인전담반 형사인 해리 보슈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는 22편이 발표되었다. 두 개의 굵직한 시리즈물 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출간했다고 하니 마이클 코넬리의 정력적인 작품 발표에 감탄만 나온다.
 
 그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그 상업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고 있다. 미키 할러 시리즈의 첫 편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매튜 매커너히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고, 보슈 시리즈는 드라마로 제작 중이라고 한다.

 

 마이클 코넬리가 소설작가로 전향하기 전의 이력도 화려하다. 기자로 일했던 그는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단다.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한 수많은 범죄 사건들이 그가 쌓아온 작품 세계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을 그 전에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추리나 범죄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라 그렇다. 범죄스릴러나 수사물, 법정물은 드라마로 보는 게 박진감 최고라는 개인의 취향 탓이 크다. 인간 쓰레기라고 할만한 문제인물들의 변호를 주로 맡는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는 그래서 나에게 무척 생소했다. 그래서 경력이 그토록 화려한 작가의 이렇게 대단한 시리즈, 미키 할러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배심원단]은 읽기 전부터 낯섦과 설렘을 동시에 주는 묘한 소설이었다.

 

 

 

 

 [배심원단]은 미키 할러가 지방검찰청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1년이 지난 뒤다.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자존감과 자존심에 모두 상처를 입은 미키 할러는 일에 몰두한다. 인간쓰레기의 변호인으로 악명이 높은 미키 할러는, 그가 석방시킨 션 갤러거가 사람 둘을 치어 죽이면서 딸과의 사이도 완전히 틀어져 버린 상태다. 희생자 둘은 딸의 친구와 그 엄마였고 딸은 아빠의 삶의 방식, 악인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직업적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키는 어떻게든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심지어 한 시간 반 거리의 도시로 전처와 딸이 이사를 가게되는 등 관계 회복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를 괴롭히는 건 딸과의 관계 뿐 아니다. 그는 션 갤러거 사건으로 촉발된 깊은 죄의식에 시달린다. 자신의 직업적 활동이 낳은 희생자들, 피해자들은 그의 무의식 중에서 계속 그를 괴롭힌다. 열두 명의 배심원단 앞에서 그는 의뢰인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이 심판받는 듯 느낀다. 악인을 옹호해야 하는 변호사로서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의 제목이 [배심원단]이라는 사실이 작품 전체에 긴밀하게 깔려 있다.
 
“그 작자 이름은 갤러거예요, 션 갤러거. 제 할 일을 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요, 아저씨. 제가 석방시킨 사람 때문에 사거리에서 두 명이 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만 하면 책임이 없어지나요. 어찌 됐든 이만 가볼게요.”
32쪽

 

딸 헤일리가 나와 인연을 끊으면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 의뢰인 명단에는 약쟁이나 살인범 같은 ‘인간쓰레기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다.
38쪽

 

“네가 항상 갖고 있는 죄책감 말이야. 그게 변호사로서의 네 역량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니까 문제다. 변호사로서, 피고인의 옹호자로서, 이 사건에는 부당하게 기소된 피고인의 옹호자로서 네가 보여줘야 할 업무능력에 악영향을 미치니까.”
231쪽

 

 미키 할러 시리즈는 법정 스릴러답게 범죄와 법, 재판에 관련한 공방이 촘촘하고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배심원단]은 특히 미키 할러가 법을 대하는 자세, 배심원단을 설득하는 과정,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저자의 전언이지 않을까 싶다.) [배심원단] 속에서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없다. 누굴 악인이라고 할지, 누굴 선인이라고 할지 모르겠는 모호함이 아니라 아예 ‘선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위 말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 지점이 미키 할러 시리즈가 갖는 냉엄한 현실성이다. 미키가 변호하는 의뢰인은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살인자는 아니다. 하지만 살인자가 아닐 뿐 선인은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미키의 멘토 역할을 하는 리갈은 이렇게 말한다.
 
법은 무른 납과 같아서, 구부려서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법은 유연한 거야. 구부릴 수도 늘일 수도 있지.” 리걸 시걸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27쪽

 

 이건 법이 느슨하고 안일해서가 아니다. 법이 심판하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기준, 하나의 잣대로 무 자르듯 분명하고 명료하게 재단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심원단]은 이런 인간의 한계와 특성을 ‘법’이라는 현미경을 통하여 들춰낸다. 미키 할러가 문제인물들을 어떻게 변호해서 결국 어떤 방법으로 승소하는지의 과정을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저자의 이런 시각을 읽는 것도 그 이상으로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법과 재판에 대하여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다. 저자가 굉장히 집요하고 철저한 취재와 검증으로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책장을 넘기면서, 재판 과정과 법리에 대한 인물들의 대화를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된다. 단순히 흥미와 자극 위주로 쓴 작품이 아닌, 깊이 있는 취재와 해석 그리고 생생한 인물 창조로 빚어내는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출간할 때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배심원단] 덕에 마이클 코넬리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을 뿐 아니라 추리소설, 스릴러 장르에 대한 인식의 전환까지 되는 중. 진짜 재밌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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