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 -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차이를 넘어 함께 성장하기
박명선.정유진 지음 / 아이스크림(i-Scream)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고,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우리 손자가 학교를 8번인가 그것 뿐이 못 갔어. 근데 야가 1학년인데, 학교를 8번 갔다 오니 2학년에 되뿌렀네."

아는 분이 자기 손자 이야기를 하시다가 기가 찬다는 듯 손사레를 치셨다. 어디 이 뿐이랴.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충격적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까닭에 아예 자녀들 등교를 시키지 않는 부모님들이며, 아이들이 비대면 수업을 하긴 하는데 이건 뭐 수업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니라며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부모님들까지. 급격히 찾아온 비대면 시대에 과연 우리 아이들의 학습 상황은 안녕할까? 어차피 학교 수업 제대로 못 받아도 학원에 가든, 과외를 받든 하면 되니 괜찮은 걸까? 공교육에서 채우지 못한 학습의 빈틈을 사교육이 채우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공교육은 대충 구색만 맞추면 그뿐일까?

이런 이야기들은 이 비대면 시대에 아이들의 학습을 어떻게든 끌고 가보려고 교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에게는 너무 서운하고 서러운 말들이다. 갑자기 바뀐 학습 상황에 아이들만큼이나 선생님들 역시 쌩고생 중이니까. 특히 학습 격차가 더욱 커진 교실을 책임지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필요한 학습 환경을 제공하려 애쓰는 선생님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무척 많다.

 

 [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는 코로나19가 빚은 교실 풍경 속에서 현직 교사들이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명선 선생님과 정유진 선생님은 초등학생들의 의미 있는 배움을 위하여 수년 간 애써오신 분들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단연 코로나19로 촉발된 '학습 격차'의 문제를 가장 먼저,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분명히 알게 된다. 교실 속 일상 즉, '교사가 아이들의 학습 상태를 확인하고 격려하고, 아이들이 함께 대화하고 서로 가르쳐주는 것이 학습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책 6-7쪽)'

 

그 소중한 일상의 조각을 잃은 우리들은 그럼 잃어버린 부분을 무엇으로 채워넣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배움의 속도가 다른 아이들 각각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방법과 도구들을 제안한다. 학습 격차를 진단할 수 있는 방법, 난독 진단 및 개선 방법, 학습 저해 요인 진단 검사 등 학습이 부진한 아이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개선할 수 있는 자료들과 해당 자료들이 있는 홈페이지들을 자세히 안내한다.

또한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멀어진 학생들과 화상으로 유대를 형성하는 방법, 학습동기가 없는 아이를 위한 동기유발 지도법, 그림책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법 등 흥미로운 학급 활동을 제안한다. 저학년과 고학년 교실로 나누어 학습 격차를 극복하는 방법도 안내하고 있는데, 특히 저학년 부분에서 아이들의 한글교육과 문해력 공부법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이미 몇몇 다큐멘터리 등의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요즘 아이들의 국어 능력은 무척 심각한 상황이다. 글자는 읽어도 그를 해득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정확하게 읽고 말하는 능력,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는 현직 교사 뿐 아니라 초등학생을 키우는 가정에서도 한번쯤 꼭 읽어보실만한 책이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은 아이의 공부 습관, 학습 태도의 기반이 마련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아이가 배우고 익혀야 할 공부 습관을 익히지 못하면 이후 성장하는 동안 아이의 답답함과 불안, 불편함 역시 함께 커질 것이다. 단순히 성적이 부진하다는 문제가 아니다. 교실에서, 학습의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로 서지 못하는 아이들은 점점 소외되고 밀려나게 된다. 보편적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속하는 가장 큰 조직인 '학교'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건 아이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닌가.

 

이 책이 많은 선생님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초등학교 현직 교사뿐 아니라 공부방, 학원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형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의 혼란한 시기에 아이들의 공부 습관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인 동시에 무척이나 귀한 일이다. 귀한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이 책에서 많은 팁을 얻고,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들을 아이들과 함께 풀어나가며 즐거운 교실을 만들어가기를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괜찮아 - 9살 제윤이가 쓴 동시집
최제윤 지음 / 읽고싶은책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수업을 시작한 이후 습관이 하나 늘었다. 바로 #동시집을 자주 찾아보게 된 것. 어른이 쓴 동시집도 있고 아이들이 쓴 글을 엮어 시집으로 낸 경우도 있는데 확실히 아이들이 쓴 작품의 경우 직관적이고 발랄하고 순진한 동시의 정서가 살아있어 읽는 내내 즐겁다.

 

아홉살 제윤이가 쓴 작품들을 엮어 낸 시집 [괜찮아]도 그렇게 찾아보게 된 책들 중 하나다.

 

제윤이는 2012년 부산에서 태어난 초등학생. 책날개에 적힌 제윤이 소개는 사뭇 명랑유쾌하다. 제윤이는 취미가 꽤 많은데 그중 하나가 시 쓰기. 요즘엔 보통의 초등학생들이 자기 취미를 '독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독서하기 뿐 아니라 시 쓰기 취미이신 12년생이라. 이 별난 초등학생은 이 시집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펼쳐놓았을까?

 

 

개인적으로 '시'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비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나 참신한 소재 등등 뭐 다 좋지만 비유로 날렵하게 벼린 시의 가닥가닥은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감동하고 깊이 공감하게 되곤 한다. 어린이들이 쓴 동시집에서 이런 비유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 시가 무척이나 대견하고 시를 쓴 이가 무척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

 

제윤이가 쓴 <타지 않는 불>은 그런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다.

"불은 아주 뜨거워. 하지만 이 불은 그런 불이 아니야. 덮으면 포근포근 따뜻하고.."

어떻게 보면 어른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아재 개그의 일종 같지만 초등학생이 그 본연의 순진하고 따듯한 정서를 시에 담뿍 담아내고 있어서 읽는 내내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이 시집에는 제윤이가 그린 그림과 미술 작품도 함께 실려 있다. 제윤이는 '시로 쓰는 것도 재미있지만 만들어서 표현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며 '여러분도 같이 해보자'고 썼다. 제윤이가 쓴 대로 이 시집이 단순히 읽히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시집을 읽고 공감하고 동감한 많은 유년기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상과 재미를 시로 쓰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에 좋은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동심에게 시 쓰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지 모른다. 시를 쓰는 그 첫 걸음, 첫 문장, 처음의 순간은 물론 어렵겠지만 제윤이처럼 자신의 일상을 흐르는 감상과 생각들, 여러가지 느낌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시로 풀어내보면 어떨까. 더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시집을 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 - 동과 서,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건축 교양 강의
전봉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이사갈 집을 알아보러 동네 여기저기 신축 빌라들을 보러다녔다. 비슷한 형태에 비슷한 마감재. 집 구조와 창문 스타일마저 똑같다 싶을 정도로 흡사해서 기억 속에서 집들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집은 무엇이 특별히 좋고, 어떤 집은 이런 점이 무척 꺼려졌다는 걸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나중에는 결국 한 가지만 관찰하게 되었다.
'고'가 어떠한가?
내가 기존에 살던 주택은 지은 지 오래된 집이다. 당시의 주택 건축 유행이란 게 그랬던 모양인지 어쨌는지 잘 모르지만 이 집은 천정이 높다. 장농 위에 공간이 한참 남아서 잡다한 걸 이것저것 올려두고 창고처럼 사용했던 집이다. 집 평수는 넓지 않아도 고가 높아서 나는 이 집이 좁은 줄 모르고 살았다. 아주 작은 방이 한 칸 있었는데 거기에 누워 천정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어도 갑갑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의 건축 유행은 좀 달라졌나보다. 천정이 낮다. "지금 살고 계신 집보다 평수가 넓어서 수납도 편하고 괜찮으실거예요~"라는 공인중개사의 말이 무색하게도 가는 곳곳마다 갑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가는 곳마다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는 지를 알지 못했다. 깔끔한 마감재에 새로 지어 윤이 나는 내부인데도 '좁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를 찾던 나는 우연히 우리집 장농 위를 보고 깨달았다. 아, 집은 평수도 중요하지만 높이도 중요하구나. 신축을 포기하고 지은지 몇 년이 지난 빌라들을 살펴보러 다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건축은 나를 둘러싼 공간을 결정한다. 내가 어떤 높이의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갈 것인지, 내가 어떤 너비의 공간에서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건 사실 나 자신은 아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선택할 뿐이다. 그걸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비는 타협할 수 있어도 높이는 타협할 수 없는 나라서 구축 빌라로 찾아간 것을 두고 '결정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다. 선택지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이런 소시민의 입장에 대하여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의 저자인 전봉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상품의 수준은 소비자가 결정한다. 안목과 구매력이 기준이다. 경제 수준만 보면 우리는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를 넘어섰으니 구매력을 핑계 댈 일은 아니다. 문제는 안목인데, 단지 경제력만이 아니라 교양과 경험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먹고살 만해져 좋은 건축을 소비하기 시작한 우리로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중략) 건축은 음악이나 미술처럼 골라서 소비하는 상품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신체를 둘러싸는 강제적 소비재라는 점에서 건축 교양 교육이 더욱 절박하다. - 머리말 <우리를 둘러싼 건축> 20-21쪽

 

 무엇이 좋은 건축인가, 왜 그것이 좋은 건축인가, 나는 어떤 건축물을 선호하는가. 왜 그러한 건축물을 선호하는가.
앞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하기 어렵지만 뒤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집,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공간을 말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아닐까. 내가 살아가는 문제와 직결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과 건축 문명 전반을 바라보는 전문가의 대답이 서로 점차로 가까워지면 어느사이엔가는 앞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 나만이 할 수 있는 대답도 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건축'을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교양 정도로만 취급하기에는 건축이 만든 '공간'의 영향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전봉희 교수의 말대로 상품의 수준은 소비자가 결정하는데, 건축을 소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소비자들이 언제까지 건축에 무지한 채로 있어야만 할까.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은 사람의 정상적인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의, 식, 주 중에서 '주'의 문명을 주제로 했다. 건축이라는 매우 커다란 주제 안에서도 '한국 건축'이라는 특정한 주제에 주목했다. 한국의 건축 문명이라고 하니 경복궁이나 오래된 사찰, 석탑 이런 것들만 이야기할 것 같지만 천만에, 전혀 아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건축의 궤적을 살펴보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 저자와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다. 저자는 가공하기 쉽지만 내구력이 약한 나무, 썩지도 무르지도 않지만 가공하기 어려운 돌. 이 두 가지 소재로 양분되어 온 동과 서의 건축 문명을 살펴보고 한국 건축의 전통적 특징과 형태, 한옥과 주택과 아파트, 마침내는 도시 건축까지 한반도의 토지 위에 건설되어온 다양한 건축물의 역사와 흐름을 이야기한다.


건축의 역사나 현대적 건축의 특징, 우리나라 도시 건축, 세계의 건축 등 건축에 대한 다양한 교양서들이 최근에 많이 출간되었고 나도 그 중 여러 권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은 그 동안 읽었던 건축 교양서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음새였다. 건축을 기술로 보거나 예술로 보거나, 중요한 건 건축은 일상의 소비재라는 사실이다. 건축을 기술로 바라보고 접근하는 교양서도 재미있었고, 예술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교양서도 좋았지만 이 책은 재미와 좋음을 떠나서 무척 실용적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자 '사람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문화'라는 시선을 기본으로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니 당연 나와 연결이 된 여러 내용들이 등장해서 그럴 수밖에.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가 마음으로 와 닿는다. 혹시 긴 추석 연휴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중인 사람이 있다면, 부동산이 아니라 건축으로 관심과 시선을 돌려보라며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손원평 작가는 책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허공에 팔다리를 저으며, 누군가가 먹여주고 돌보아주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너무나 작은 생명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런데 그 눈물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다고. 본인도 모르겠다고 한 그 감정을 나는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야겠다. 생명에 대하여, 어떤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느끼는 마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열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나머지 과연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마음. 윤재의 할머니는 사랑을 예쁨의 발견이라고 그랬고 윤재의 엄마는 사랑을 쉼없는 잔소리라고 했다. 그 둘로부터 사랑을 받던 때에는 도무지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던 윤재가 더 이상 둘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어진 후에, 몇 년이 지나 어른에 가까워지고 여러가지 일을 보고 들은 후에 과연 사랑을 무어라고 정의하게 되었을까?

 

접힌 부분 펼치기 ▼

 

여기에 접힐 내용을 입력해주세요.

 

펼친 부분 접기 ▲

접힌 부분 펼치기 ▼

 

여기에 접힐 내용을 입력해주세요.

 

펼친 부분 접기 ▲

소설 [아몬드]의 주인공인 윤재는 타고난 편도체 이상자다. 신생아때부터 유난히 웃지 않는 윤재를, 엄마는 이상하게 여겼다. 말을 못하거나 지능이 낮거나 어딘가 신체에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데 편도체가 문제였다.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아주 작아서 보통 사람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욕망하는 것도 극히 적다. '기분이 안 좋으니 초코케이크나 퍼먹어야지.' 따위의 말은 윤재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해도 윤재가 그 기분과 의견에 동조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타인의 감정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일에도 불능. 병원에서는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진단했다.

 

-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 범주에 속할거야.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38

 

윤재의 엄마는 어린 윤재를 소독약 내음 짙은 병원에서 키우기를 거부한다. 의사들의 진단이나 제안을 뒤로하고 윤재와 함께 무한 학습에 돌입한다. 말 그대로 감정을 학습하기로 한 것. 윤재의 엄마는 윤재에게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교육했다. 상대의 표정이나 말에 따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메뉴얼을 만들어 윤재에게 암기하도록 했다. 지구상에 다시 없을 감정 표현 선행 학습은 꽤 괜찮은 결과를 거뒀다. 윤재는 그럭저럭, 편도체 크기가 티가 나지 않는 정상인처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문제는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에 벌어졌다.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162

 

감정과 표현이 복잡해지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윤재의 머릿속도 함께 복잡해졌다. 엄마표 감정 표현 학습은 이제 약발이 떨어졌고 윤재에게 매달려 열혈 교육을 했던 엄마도, 할머니도 없어진 세상. 윤재는 홀로 생활을 하며 자신과는 결이 다른 의미의 또 다른 불능자인 곤이와 알게 된다. 곤이의 경우는 '감정 조절 불능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윤재는 자신도, 곤이도 모두 괴물이라고 불렀으니 이 정도 진단이면 적당할 듯하다. 감정 불감인 한 사람과 감정 과잉의 또 한 사람은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연인처럼 (주로 곤이가, 아니 거의, 아니 항상 곤이가) 치고 박고 싸우다 종내는 서로를 구원하는 특이점에 이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윤 교수는 곤이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까? 그랬더라면 그들 부부는 그 애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다. 아줌마는 죄책감에 병이 걸리지도 않았을 거고, 회한 속에 죽지도 않았을 거다. 곤이가 저지른 골치 아픈 짓들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역시 곤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애가 아무런 고통도 상실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목적만 남는다. 앙상하게.

새벽녘이 되도록 의식이 또렷했다. 곤이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엄마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안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234-235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245

 

첫 페이지부터 이 책은 어떤 걸림도 없이 술술 읽힌다. 국수로 치면 세계 최장 면발로 기네스북에 벌써 등재되고도 남았을 듯. 후기를 찾아보니 나뿐 아니라 벌써 여러 독자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본인은 웃지 않는 멀쩡한 얼굴로 남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웃기는 사람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가 그렇다. 본인은 희노애락 어떤 감정에도 무감각한 얼굴로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읽는) 사람들을 희노애락의 오색창연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어쩌면 선천적으로 감정과 욕망을 느끼는 대신 성장하면서 쉴 새 없이 감정과 욕망을 학습한 사람이기에, 그런 윤재의 이야기라서 가능한 것 아닐까. 감정의 한 올, 한 올이 당연하고 쉬운 것이 아니어서 윤재는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움과 설렘, 불쾌함과 분노까지 하나씩 하나씩 감정의 조각을 낱낱이 성찰하고 마침내는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곤 깨닫는다. 보편적으로 삶의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과 회한 등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기쁨과 즐거움 같은 감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편도체의 작용이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시시각각 느끼는 감정은 타인에 공감하고 결국 행동하기 위한 도화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 공감과 행동이 없다면 삶은 가짜가 되고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엄마가 내 손을 조물거리며 덧붙였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59

 

이 책의 결말을 장식한 윤재의 변화를 본 후에 책의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그저 놀랍다. 엄마의 사랑 표현을 식상하지만 해야 하는 의례로 받아들이는 윤재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톡톡히 체험한 후의 윤재는 마치 윤재AI와 윤재 본체처럼 비슷한 듯 다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결말까지 다 읽은 후에 이 부분을 곱씹어 읽으면 윤재의 자세가 처음 읽을 때와는 사뭇 달리 보인다. 엄마의 사랑을 자신이 습득한 매뉴얼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던 윤재의 속에 사실은 엄마의 저런 말이 기쁘지만 쑥스러운 남자 아이의 쭈뼛거림이 있었던 거구나, 싶은 그런 뇌피셜이 생성되는 거다. 독자는 엄연히 감정이 있기 때문에(심지어 아주 풍부하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윤재가 달리 보인다는 점, 참고해주시길.

 

***

윤재의 짧은 생애를 지켜본 후 '감정의 전이력'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감정은 아주 강력하게 전이된다. 짜증은 짜증을, 두려움은 두려움을, 분노는 분노를 전파한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하는 속도는 감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침투하는 속도에 비하면 마치 달팽이와 전투기 차이랄까. 감정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전이된다. 그러므로 '사랑이 모든 걸 이긴다.'는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말은 진리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랑을 전파하고 한 번 뿌리 내린 사랑은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력하게 사람의 생을 지배한다. 사랑이란 어떤 감정의 한 가닥이 아닌, 위에 썼듯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희열 등 여러 감정의 결로 짜 만든 감정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행동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짜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진짜 감정이다.

 

감정의 본래 역할을 고려하면 감정 불감이나 감정 과잉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행동할 수 없거나,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의 차이이므로 그렇다. 정말 필요한 공감을, 정말 해야 할 행동을 적재적시에 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능력을 처음부터 다시 학습해야 하는 것 아닐까. , , 를 공책에 쓰며 언어를 깨우쳤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이 감정을 학습하고 꾸준한 반복과 체험을 통해 사랑이라는 만랩에 도달해보면 어떨까. 엄마의 사랑에 적절한 말 한마디 뱉지 못했던 윤재가 (외부로부터 주입된 학습이 아닌) 스스로 미안함을 느끼고 미안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에 나서고 그 행동이 가져온 위험을 감수하고 난 후에 비로소 '느끼게' 되는, [아몬드]의 여정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사랑을 학습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비록 소설의 인물을 보며 느낀 점이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소설은 가장 예리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아닌가.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P2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복절에 오랜만에 태극기를 주섬주섬 꺼내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사실을 다시 체감했다. 76주년을 맞은 광복절에 우리는 여전히 마무리가 되지 못한 역사의 부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골목에 태극기를 게양한 집이 예전보다 현저히 줄고 사람들의 관심이 해방과 역사 보다는 대체공휴일과 휴가로 기울고 있는 현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채가 감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누가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라. "어떻게 되찾은 나라인데..." 그래, 어떻게 되찾은 나라냐고, 이 나라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핏값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만 피, , 눈물을 흘렸던가. 그건 또 아니지. 죽을 각오로 몸을 던진 사람도 있었고 죽을 수 없어서 이를 악문 사람도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이라는 말이 너무나 촌스럽게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때 그 시절은 모두가 참혹하게 살아갔던 나날이었다.

 

 

이금의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1900년대 하와이를 개척한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사진 신부'라고 부리는 조선 여성들, 그러니까 해외 이민 1세대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남긴 유산은 무엇인지를 그린 이야기다. '알로하'라는 말이 낭만적인데다 소설 표지 삽화가 마치 휴양지에서 읽어야 할 것 같은 평온한 색채여서 나는 이 작품이 이렇게 생생한 고생사를 닮고 있을 줄 몰랐다.

 

이야기는 어진말에서 시작한다. 버들이와 홍주는 어진말에서 함께 자란 친구로 포와(하와이)로 함께 시집을 간다. 포와에서 보내온 사진 속 남자들은 다들 훤칠하고 부유해보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 숨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조선, 유교의 강박에 갇힌 채로 삶아야 하는 조선을 벗어나 포와에 가면, 공부도 하고 원하는 일도 실컷 하고 잘생기고 훤칠하고 부유한 남편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무당의 딸로 돌팔매를 맞으며 컸던 송화까지, 어진말 출신 셋은 함께 부산을 지나 일본을 거쳐 포와에 도착한다. 그러나 포와에 도착해서 만난 남편들은 사진에 보이는 것 보다 10살 이상 많은 중년의 남성들이었다. 땡볕 아래서 고된 노동을 해서 깡 마르고 볼품 없는데다 농장 노동자로 일하는 형편들이라 부유한 것도 아니었다. 사기나 다름없는 환경에 사진 신부들은 모두 울며 불며 난리가 났지만 차마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어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낸다. 소설은 버들이를 주축으로 버들이와 홍주와 송화의 하와이 정착기 나아가 이 세 친구가 만나고 겪은 여러 조선 이민자들의 삶을 촘촘하게 그린다.

 

 

 

조선 독립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다 아입니꺼.

- 버들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 거이 자식을 위한 일 아니갔어. 내레 나 위해서 이러간?

- 버들의 남편, 태완

 

 

 

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야 할지,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지 늘 헷갈렸다.

- 태완이 무장독립투쟁을 하는 동안 버들이 홀로 낳은 딸,

 

 

 

1세대 이민자 사회는 혼란했다. 지켜주는 나라가 없어서 그러했고, 이승만 파와 박용만 파와 갈려 서로 다투느라 그러했다. 일제에게 아버지를 잃고 오빠도 잃었던 버들은 힘이 없어 당하는 설움을 너무나 잘 알았다. 아마 그래서 남편 태완이 어린 정호와 버들만 두고 무장독립투쟁을 하러 떠나겠다고 했을 때 차마 막아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열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버들은 자신과 다른 태완의 가치관이나 이승만 파에 속한 친한 지인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모습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 자신의 마음은 고요히 접어두고 자신이 할일을 찾아 부지런히 살아간다. 조선과 모든 것이 다른 하와이에서 적응해야 했던 이민 1세대의 대부분이 그러했으리라. 어떻게든 정붙이고 살아가 보는 것. 그렇게 살다보면 살아지고 그렇게 살아지다보면 어느 새 황혼에 이르는 법이다. 이해하지 못할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자세는 버들의 딸인 펄에게 계승된다. 마치 보낸 이를 알수 없는 택배처럼 버들의 몫으로 속속 들이닥친 삶의 고비들, 그 고된 시간들을 버들이 묵묵히 버티며 감당해온 것처럼, 이야기의 끝에서 펄이 '해안에 부딪힌 파도가 사정없이 부서질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듯 나도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엄마인 버들과 갈등이 깊었던 펄이 이런 마음을 먹기까지 쉽지 않았다. 버들과 펄에 대한 여러 반전은 소설 후반부에 숨어 있는데 이 반전 덕에 소설 중반을 넘어서며 조금 느슨해졌던 읽는 재미의 텐션이 다시 바짝 올라간다.

 

 

 

⁠⁠ 얼마 전 끝난 도쿄올림픽의 서핑 종목 해설이 그야말로 명품이었다. 서핑 국가대표 감독인 송민 해설위원이 남긴 여러 해설 멘트 중에서 내 뇌리에 남은 건 이 한 부분이었다. 선수가 경기를 잘 했든 못 했든, 가진 기술을 다 보여주었든 그렇지 못했든 지금 선수가 탄 파도는 '본인이 선택한 파도' 서핑을 인생과 견주는 여러 멘트가 등장했는데 인생과 서핑의 결정적 교집합을 짚어내자면 바로 저 멘트가 아닐까.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사건 사고에 부딪힌다. 때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라며 억울하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원망이 드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결국 생이라는 바다 위에서 내가 타고 있는 물결은 내가 선택한 파도다. 잘 되면 좋겠지만 안 되도 어쩔 수 없다. 펄의 말처럼 파도는 부딪혀 부서질 걸 알면서도 기꺼이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그리곤 무지개를 남긴다. 모든 파도는 결국 부서지고 저마다 무지개가 된다.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더라도 무지개 같은 위로 덕에 생은 그 다음 파도로 다시 이어진다. 부서질 걸 알면서도, 기꺼이 부딪히겠다는 펄의 용기의 근간은 그녀를 키운 엄마들이다.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어진, 지금의 우리에게도 간절한 이 용기의 유산이야말로 역사를 가장 빛나게 기록할 수 있는 자양분이리라.

 

 

 

 

 

 

 

 

내 딸은 좋은 시상에서 내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