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 - 동과 서,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건축 교양 강의
전봉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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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사갈 집을 알아보러 동네 여기저기 신축 빌라들을 보러다녔다. 비슷한 형태에 비슷한 마감재. 집 구조와 창문 스타일마저 똑같다 싶을 정도로 흡사해서 기억 속에서 집들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집은 무엇이 특별히 좋고, 어떤 집은 이런 점이 무척 꺼려졌다는 걸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나중에는 결국 한 가지만 관찰하게 되었다.
'고'가 어떠한가?
내가 기존에 살던 주택은 지은 지 오래된 집이다. 당시의 주택 건축 유행이란 게 그랬던 모양인지 어쨌는지 잘 모르지만 이 집은 천정이 높다. 장농 위에 공간이 한참 남아서 잡다한 걸 이것저것 올려두고 창고처럼 사용했던 집이다. 집 평수는 넓지 않아도 고가 높아서 나는 이 집이 좁은 줄 모르고 살았다. 아주 작은 방이 한 칸 있었는데 거기에 누워 천정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어도 갑갑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의 건축 유행은 좀 달라졌나보다. 천정이 낮다. "지금 살고 계신 집보다 평수가 넓어서 수납도 편하고 괜찮으실거예요~"라는 공인중개사의 말이 무색하게도 가는 곳곳마다 갑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가는 곳마다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는 지를 알지 못했다. 깔끔한 마감재에 새로 지어 윤이 나는 내부인데도 '좁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를 찾던 나는 우연히 우리집 장농 위를 보고 깨달았다. 아, 집은 평수도 중요하지만 높이도 중요하구나. 신축을 포기하고 지은지 몇 년이 지난 빌라들을 살펴보러 다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건축은 나를 둘러싼 공간을 결정한다. 내가 어떤 높이의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갈 것인지, 내가 어떤 너비의 공간에서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건 사실 나 자신은 아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선택할 뿐이다. 그걸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비는 타협할 수 있어도 높이는 타협할 수 없는 나라서 구축 빌라로 찾아간 것을 두고 '결정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다. 선택지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이런 소시민의 입장에 대하여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의 저자인 전봉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상품의 수준은 소비자가 결정한다. 안목과 구매력이 기준이다. 경제 수준만 보면 우리는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를 넘어섰으니 구매력을 핑계 댈 일은 아니다. 문제는 안목인데, 단지 경제력만이 아니라 교양과 경험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먹고살 만해져 좋은 건축을 소비하기 시작한 우리로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중략) 건축은 음악이나 미술처럼 골라서 소비하는 상품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신체를 둘러싸는 강제적 소비재라는 점에서 건축 교양 교육이 더욱 절박하다. - 머리말 <우리를 둘러싼 건축> 20-21쪽

 

 무엇이 좋은 건축인가, 왜 그것이 좋은 건축인가, 나는 어떤 건축물을 선호하는가. 왜 그러한 건축물을 선호하는가.
앞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하기 어렵지만 뒤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집,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공간을 말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아닐까. 내가 살아가는 문제와 직결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과 건축 문명 전반을 바라보는 전문가의 대답이 서로 점차로 가까워지면 어느사이엔가는 앞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 나만이 할 수 있는 대답도 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건축'을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교양 정도로만 취급하기에는 건축이 만든 '공간'의 영향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전봉희 교수의 말대로 상품의 수준은 소비자가 결정하는데, 건축을 소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소비자들이 언제까지 건축에 무지한 채로 있어야만 할까.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은 사람의 정상적인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의, 식, 주 중에서 '주'의 문명을 주제로 했다. 건축이라는 매우 커다란 주제 안에서도 '한국 건축'이라는 특정한 주제에 주목했다. 한국의 건축 문명이라고 하니 경복궁이나 오래된 사찰, 석탑 이런 것들만 이야기할 것 같지만 천만에, 전혀 아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건축의 궤적을 살펴보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 저자와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다. 저자는 가공하기 쉽지만 내구력이 약한 나무, 썩지도 무르지도 않지만 가공하기 어려운 돌. 이 두 가지 소재로 양분되어 온 동과 서의 건축 문명을 살펴보고 한국 건축의 전통적 특징과 형태, 한옥과 주택과 아파트, 마침내는 도시 건축까지 한반도의 토지 위에 건설되어온 다양한 건축물의 역사와 흐름을 이야기한다.


건축의 역사나 현대적 건축의 특징, 우리나라 도시 건축, 세계의 건축 등 건축에 대한 다양한 교양서들이 최근에 많이 출간되었고 나도 그 중 여러 권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은 그 동안 읽었던 건축 교양서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음새였다. 건축을 기술로 보거나 예술로 보거나, 중요한 건 건축은 일상의 소비재라는 사실이다. 건축을 기술로 바라보고 접근하는 교양서도 재미있었고, 예술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교양서도 좋았지만 이 책은 재미와 좋음을 떠나서 무척 실용적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자 '사람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문화'라는 시선을 기본으로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니 당연 나와 연결이 된 여러 내용들이 등장해서 그럴 수밖에.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가 마음으로 와 닿는다. 혹시 긴 추석 연휴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중인 사람이 있다면, 부동산이 아니라 건축으로 관심과 시선을 돌려보라며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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