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손원평 작가는 책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허공에 팔다리를 저으며, 누군가가 먹여주고 돌보아주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너무나 작은 생명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런데 그 눈물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다고. 본인도 모르겠다고 한 그 감정을 나는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야겠다. 생명에 대하여, 어떤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느끼는 마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열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나머지 과연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마음. 윤재의 할머니는 사랑을 예쁨의 발견이라고 그랬고 윤재의 엄마는 사랑을 쉼없는 잔소리라고 했다. 그 둘로부터 사랑을 받던 때에는 도무지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던 윤재가 더 이상 둘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어진 후에, 몇 년이 지나 어른에 가까워지고 여러가지 일을 보고 들은 후에 과연 사랑을 무어라고 정의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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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몬드]의 주인공인 윤재는 타고난 편도체 이상자다. 신생아때부터 유난히 웃지 않는 윤재를, 엄마는 이상하게 여겼다. 말을 못하거나 지능이 낮거나 어딘가 신체에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데 편도체가 문제였다.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아주 작아서 보통 사람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욕망하는 것도 극히 적다. '기분이 안 좋으니 초코케이크나 퍼먹어야지.' 따위의 말은 윤재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해도 윤재가 그 기분과 의견에 동조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타인의 감정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일에도 불능. 병원에서는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진단했다.

 

-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 범주에 속할거야.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38

 

윤재의 엄마는 어린 윤재를 소독약 내음 짙은 병원에서 키우기를 거부한다. 의사들의 진단이나 제안을 뒤로하고 윤재와 함께 무한 학습에 돌입한다. 말 그대로 감정을 학습하기로 한 것. 윤재의 엄마는 윤재에게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교육했다. 상대의 표정이나 말에 따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메뉴얼을 만들어 윤재에게 암기하도록 했다. 지구상에 다시 없을 감정 표현 선행 학습은 꽤 괜찮은 결과를 거뒀다. 윤재는 그럭저럭, 편도체 크기가 티가 나지 않는 정상인처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문제는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에 벌어졌다.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162

 

감정과 표현이 복잡해지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윤재의 머릿속도 함께 복잡해졌다. 엄마표 감정 표현 학습은 이제 약발이 떨어졌고 윤재에게 매달려 열혈 교육을 했던 엄마도, 할머니도 없어진 세상. 윤재는 홀로 생활을 하며 자신과는 결이 다른 의미의 또 다른 불능자인 곤이와 알게 된다. 곤이의 경우는 '감정 조절 불능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윤재는 자신도, 곤이도 모두 괴물이라고 불렀으니 이 정도 진단이면 적당할 듯하다. 감정 불감인 한 사람과 감정 과잉의 또 한 사람은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연인처럼 (주로 곤이가, 아니 거의, 아니 항상 곤이가) 치고 박고 싸우다 종내는 서로를 구원하는 특이점에 이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윤 교수는 곤이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까? 그랬더라면 그들 부부는 그 애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다. 아줌마는 죄책감에 병이 걸리지도 않았을 거고, 회한 속에 죽지도 않았을 거다. 곤이가 저지른 골치 아픈 짓들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역시 곤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애가 아무런 고통도 상실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목적만 남는다. 앙상하게.

새벽녘이 되도록 의식이 또렷했다. 곤이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엄마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안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234-235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245

 

첫 페이지부터 이 책은 어떤 걸림도 없이 술술 읽힌다. 국수로 치면 세계 최장 면발로 기네스북에 벌써 등재되고도 남았을 듯. 후기를 찾아보니 나뿐 아니라 벌써 여러 독자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본인은 웃지 않는 멀쩡한 얼굴로 남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웃기는 사람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가 그렇다. 본인은 희노애락 어떤 감정에도 무감각한 얼굴로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읽는) 사람들을 희노애락의 오색창연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어쩌면 선천적으로 감정과 욕망을 느끼는 대신 성장하면서 쉴 새 없이 감정과 욕망을 학습한 사람이기에, 그런 윤재의 이야기라서 가능한 것 아닐까. 감정의 한 올, 한 올이 당연하고 쉬운 것이 아니어서 윤재는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움과 설렘, 불쾌함과 분노까지 하나씩 하나씩 감정의 조각을 낱낱이 성찰하고 마침내는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곤 깨닫는다. 보편적으로 삶의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과 회한 등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기쁨과 즐거움 같은 감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편도체의 작용이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시시각각 느끼는 감정은 타인에 공감하고 결국 행동하기 위한 도화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 공감과 행동이 없다면 삶은 가짜가 되고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엄마가 내 손을 조물거리며 덧붙였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59

 

이 책의 결말을 장식한 윤재의 변화를 본 후에 책의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그저 놀랍다. 엄마의 사랑 표현을 식상하지만 해야 하는 의례로 받아들이는 윤재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톡톡히 체험한 후의 윤재는 마치 윤재AI와 윤재 본체처럼 비슷한 듯 다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결말까지 다 읽은 후에 이 부분을 곱씹어 읽으면 윤재의 자세가 처음 읽을 때와는 사뭇 달리 보인다. 엄마의 사랑을 자신이 습득한 매뉴얼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던 윤재의 속에 사실은 엄마의 저런 말이 기쁘지만 쑥스러운 남자 아이의 쭈뼛거림이 있었던 거구나, 싶은 그런 뇌피셜이 생성되는 거다. 독자는 엄연히 감정이 있기 때문에(심지어 아주 풍부하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윤재가 달리 보인다는 점, 참고해주시길.

 

***

윤재의 짧은 생애를 지켜본 후 '감정의 전이력'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감정은 아주 강력하게 전이된다. 짜증은 짜증을, 두려움은 두려움을, 분노는 분노를 전파한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하는 속도는 감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침투하는 속도에 비하면 마치 달팽이와 전투기 차이랄까. 감정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전이된다. 그러므로 '사랑이 모든 걸 이긴다.'는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말은 진리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랑을 전파하고 한 번 뿌리 내린 사랑은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력하게 사람의 생을 지배한다. 사랑이란 어떤 감정의 한 가닥이 아닌, 위에 썼듯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희열 등 여러 감정의 결로 짜 만든 감정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행동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짜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진짜 감정이다.

 

감정의 본래 역할을 고려하면 감정 불감이나 감정 과잉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행동할 수 없거나,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의 차이이므로 그렇다. 정말 필요한 공감을, 정말 해야 할 행동을 적재적시에 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능력을 처음부터 다시 학습해야 하는 것 아닐까. , , 를 공책에 쓰며 언어를 깨우쳤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이 감정을 학습하고 꾸준한 반복과 체험을 통해 사랑이라는 만랩에 도달해보면 어떨까. 엄마의 사랑에 적절한 말 한마디 뱉지 못했던 윤재가 (외부로부터 주입된 학습이 아닌) 스스로 미안함을 느끼고 미안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에 나서고 그 행동이 가져온 위험을 감수하고 난 후에 비로소 '느끼게' 되는, [아몬드]의 여정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사랑을 학습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비록 소설의 인물을 보며 느낀 점이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소설은 가장 예리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아닌가.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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