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햄버거 하나에 팔렸습니다
김지헌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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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햄버거 하나에 팔렸다!’
뭐라고? 내 몸값이 햄버거 하나 밖에 안 된다고?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 책, 제목부터 수상하다. (심지어 사람도 아니고) 침팬지가 햄버거를 내려다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표지의 책을 낸 저자 김지헌의 전문 분야는 브랜드 심리학. 브랜드 전략이나 온라인 판촉 전략, 마케팅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저자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소비자의 ‘심리’다. 인지·사회 심리학을 근간으로 한 소비자 행동 연구에 힘써온 저자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이 타겟으로 삼은 바가 무엇인지 쉽게 가늠이 된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착각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누가 인간더러 합리적이라고 하는가? 차라리 개미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합리적 이성이기 보다는 감성이다. 뇌에서 감정을 인지하는 영역을 제거하고 난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데에 장애가 생겼다는 연구(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구나....)가 보여주는 건, 인간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김지헌 교수는 이 책 [당신은 햄버거 하나에 팔렸습니다]에서 소셜미디어 시대 소비자를 이해하는 다섯 가지 핵심 코드를 설명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이 책은 소셜미디어를 이렇게 활용하라는 가이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소비자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선택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썼다고 했다. 어떻게 소셜미디어라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윤을 낼까에 대한 고민 이전에 사람 즉 소비자에 대한 고민이 먼저다. 표피는 푸르지만 내부는 붉은 수박처럼, 소셜미디어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는 그 안에서 쉴새없이 움직이고 요동치는 ‘사람’의 선택과 변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비단 이 분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저자는 소비자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다섯 가지 코드로 공감, 공유, 공명, 공생, 공정을 제시한다고 이 책을 소개한 후 각 주제의 챕터에서 충실하게 설명을 풀어간다. 서두에서 먼저 이 책의 내용 이해가 쉽도록 큰 주제를 제시하고 흐름에 따라 독자를 유연하게 이끌어간다. 소비자가 읽는 소비자의 행동 유형에 대한 글인데, 거부감이 들거나 난해한 부분은 전혀 없고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흥미와 재미가 유지된 채로 다 읽었다. 인지 심리학과 소비 심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의 관찰과 분석이 영민하고 그걸 풀어낸 글솜씨는 명쾌하다. 소비자를 타겟으로 하여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다. 나와 우리가 무엇에 공명하는지 그리고 어떤 공생이 모두에게 좋은지를 마케팅 분야를 통하여 확인하고 겉다르고 속다른 기업을 판별하거나 위기관리 방법을 엿보는 등 다각도로 유익한 내용들로 알차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공통의 관심을 가진 이들의 온라인 공통체를 의미하는 ‘디지털 클라우드’가 넘쳐난다. 자신들의 욕구를 섬세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브랜드 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외면하는 이들은, 누군가가 관심을 끄는 주제를 제안할 경우 언제라도 조건 없이 결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브랜드가 모래알처럼 흩어진 집단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즉 공명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 이를 이슈화하는 데 성공할 경우, 대규모 집단이 향유하는 새로운 문화의 혁신 과정에서 중심에 설 수있다. 가령 브랜드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이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를 찾아 이슈화하거나, 대부분 알고는 있지만 상황적 제약으로 누구도 나서지 못해 불편한 진실로 남겨진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함께 해결해나갈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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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지 -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진경환 지음 / 소소의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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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지를 많이 사본 사람들은 안다. 표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잡지 표지모델로 이름 없는 사람, 이도 저도 아닌 사람, 눈길을 끌지 못하는 사람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기획상 일부러 이름 없는 범인을 쓰는 경우는 왕왕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획이 특별한 경우다. 표지모델은 당대의 가장 핫한 인물들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잡지의 표지가 모델만 신경쓰는 건 아니다. 가장 흥미로울 기사를 가장 눈에 띄게 배치하고 소비자 혹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주제(키워드)를 곳곳에 넣어 어떻게든 이 잡지를 구입하지 않고서는 혹은 들춰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잡지!

 

 잡지 중의 잡지라고 할만한, 그야말로 진짜 잡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서론이 길었다. 내가 요 근래 봤던 여러 책 중에 이 책은 단연코 가장 대단한 표지를 가진 책이다. 썰을 푸는 모양새가 단연 압권이다. 어떻게 이런 잡지를 읽어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을 오목조목 정리하여 구성지게 실은 이 책 [조선의 잡지]는 표지부터 완벽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특히나 나를 깔깔거리게 만든 건 뒷표지였는데, 몇 번을 봐도 재밌다.


 조선 후기 생활사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거라곤 사극에서 곁가지로 본 게 전부다. 이덕무나 연암 같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매료되어 그들에 대한 혹은 그들이 쓴 서적을 읽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상이나 이론, 글쓰기 같은 지식 분야에 대한 것을 알게 될 따름이지 그들의 생활이 어떠했다는 것까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조선 후기 생활사에 대한 소감을 저런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선 후기란 멀리서 보면 신비롭고 가까이서 보면 그냥 똑같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저자 진경환 교수는 조선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를 뼈대 삼아 조선의 생활상을 낱낱이 취재하여 [조선의 잡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8~19세기는 근대로 들어서는 큰 변화의 시대였다. 시대가 급변했다는 의미는 사람과 그 생활상이 급변했다는 뜻이다. 조선의 수도를 주름잡았던 양반님네들의 생활상, 당시 변화의 맥을 짚어보는 것은 꽤 유쾌하고 재미있다. 왜냐하면 그 변화의 맥이라는 게 무슨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가 바뀌고 왕의 씨가 바뀌는 엄청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라 애완동물로 비둘기를 기르거나, 밥상에 호박이 반찬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잡지]는 조선시대의 원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빚은 오류들을 바로잡고 크게는 의식주, 조금 더 세밀하게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입고 먹고 마시며 혼인하고 살림하고 놀고 즐기고 키우고 장사하고 노름하였는지 담아냈다. 책의 목차만 봐도 웃음이 나는 게, 당시의 생활상을 얼마나 나노단위로 들여다보았는지 노름하던 내용까지 실었다. 이렇게 당돌하고 웃기는 역사서를 봤나. 책을 읽으며 조선 후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것들의 흔적을 여러 번 접하며 번번이 큰 아쉬움을 느꼈다. 특히 아쉬웠던 부분은 조선 산지마다 다양했던 전통술이다. 서울은 삼해주, 경기에는 문배주 등등 지역마다 저토록 많은 술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마셔볼 수 없다니 아쉬움이 크다.

 

 대부분의 책이 비슷하게,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이 책은 특히 더 그러한데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의 개념을 바로 잡아주어 아주 고맙다. 결혼이냐, 혼인이냐. 이 부분에서 혼과 인이라는 글자를 설명하여 결혼보다는 혼인이라는 단어가 남녀의 결합에 적합하다고 설명해주는 내용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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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거의 모든 것의 속도
밥 버먼 지음, 김종명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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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은 사물들을 측정하고 분류하는 데 집착하는 동물이다. 속도와 관련해서는 매우 분명한 한계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속도의 궁극적인 최저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것도 정지된 것보다 느리게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있기 어렵다는 점이다.
60쪽

 

 [ZOOM 거의 모든 것의 속도]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 구절과 마주했다. 그 어떤 것도 단정하거나 딱 잘라 말하지 않는 과학자 밥 버먼(세상에나, 제목이 ‘모든 것의 속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의 속도’라고 쓴 데에서부터 이 책의 화법이 드러난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태에 대해 ‘절대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있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상태라고 말해도 될까?


 이 부분을 읽으며 헤라클레이토스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영원히 변화하고 있으며 매순간 동일한 것은 없다고 세계를 바라보았던 그는 이런 내용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어제의 강물은 흘러가버려서 없고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 아니라 나도 흐른다. 매순간 동일한 나는 없다.”
 과학서적을 읽을 때마다 어떤 지점에서 자주 느꼈던 그것. 데자뷰라고 부르기도 하는 기시감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부분이 역시 이 책에도 있었다. 과학과 철학은 통하는구나!

 

 태풍에 부서진 집을 수리하게 된 김에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 엉뚱한 과학자는 여행에서 관찰한 것들, 그 관찰이 남긴 다양한 결과들을 책으로 썼다. 원서의 제목은 그냥 ZOOM이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좀더 친절하다. [ZOOM 거의 모든 것의 속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한국에 들어온 이 과학서적은 그 이름부터 아주 흥미롭다. 흔히 속도라고 하면 이동하는 것, 달리는 것 따위가 내는 속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기발하고 재미난 칼럼으로 유명한 저자 밥 버먼이 고작 그런 평범한 속도에 대한 책을 썼을리 만무하다. 책은 말그대로 지구상에 음, 아니 우주 속에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속도를 주제로 이야기한다. 당연히 사람이나 치타 등의 달리는 속도도 언급하긴 하지만 그건 아주 일부일 뿐. 봄이 오는 속도, 화학반응 속도, 유성이 떨어질 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룬다. 책의 주제가 속도이다보니 책이 다루는 범주를 지정하려면 어떤 것들이 속도를 가지고 있는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속도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당연히 만들어내는 수치다. 그런데 이 글의 가장 처음에 언급한바 ‘거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상태’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의 모든 것이 속도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빛은 달리고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와...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코스모스]를 읽으며 우주의 먼지 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을 실감하던 그 때로 돌아간 듯 하네.

 

 하지만 이 속도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거의 모든 것의 상태가 변동하듯, 속도라는 것 역시 변동하는 것 아닌가. 무엇을 기준해서 측정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움직이느냐에 따라.

 

 “실제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힘이 원거리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둘 다 이 대답이 아무것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려주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입자와 포톤, 물질과 에너지는 각자가 가진 정보를 우주 전체에 시간지연 없이 즉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빛의 속도는 더 이상 속도의 한계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동시성을 이용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입자의 행동 정보를 전달하는 것의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성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는 질량을 가진 어떤 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포톤과 같은 존재가 무한대의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는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무한대의 속도로 전달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놀라운 발견은 철학이나 형이상학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계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98-399쪽

 

이 책에서 가장 달콤살벌흥미진진한 부분은 이 책의 맨 뒤에 있다. 질량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전달하는데 심지어 속도가 없는 물질이 있다니! 속도가 없다는 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 이 끝에서 여길 탁!하고 치면 우주 저 끝에서도 같은 자리가 탁!하고 타격을 받는다는 말씀. 오와, 나는 그저 속도에 대한 저자의 썰이 재미있어서 읽기 시작했을 뿐이데, 다중우주론보다 더 신박한 내용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철학서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과학서를 좋아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고, 이제 나는 철학과 과학이 궁극적으로 밝히는 섭리라는 것은 결국 통한다는 사실을 어제보다 더욱 확신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과학적 이론은 관찰에 기초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우주에 대해 우리가 수립한 이론의 수준이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은 관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이니 아기들이 걸음마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덧붙인다. 과학자들도 과학의 끝, 세계의 끝 아니, 우주의 끝을 알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실존의 본질이란 결국 원자니, 속도니 하는 물리적인 것들보다는 저자도 인용한, 그리고 이 책의 결말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는 데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우리는 단지 영원한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아, 엉뚱하게 과학서를 읽은 후 감상을 남기면서 헤라클레이토스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고대 철학자들을 자꾸 언급하게 되네. 그만큼 이 과학서가 철학의 많은 부분과 통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단순히 물리나 자연과학적 소양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이 자연스럽게 향하고 있는 우리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수준 높은 과학서여서 더위를 잊을 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겨울이 되면 한 번 더 읽어봐야지. 그만큼 재미있고 다시 읽을만한 좋은 책이다. 
 

인간은 사물들을 측정하고 분류하는 데 집착하는 동물이다. 속도와 관련해서는 매우 분명한 한계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속도의 궁극적인 최저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것도 정지된 것보다 느리게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있기 어렵다는 점이다.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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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11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박효은 옮김 / 별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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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저 정도 나이였던 것 같다. 7월에서 8월로 이어지는 이 휴가철이 되면 아빠와 엄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온양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아직 입에 익지 않아서 내가 항상 ‘진주 할머니’라고 불렀던 증조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셨던 그 집. 오래된 마당 만큼이나 오래된 기와, 오래된 대문. 모든 게 다 오래되어서 집 전체가 마치 할머니 같았던 그 집 마루에는 진주 할머니만큼이나 나이가 많은 듯한 책들이 있었다. 그 집에서 보았던 책들 중에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책이 두 권인데, 하나는 장 자크 상페의 ‘꼬마 니콜라’, 또 다른 하나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한여름, 마룻바닥의 서늘함은 누워본 사람만 안다. 윤이 나는 나무의 면과 그 틈새에 앉은 먼지, 나무의 배꼽을 옮겨다놓은 듯 수줍게 들어앉은 옹이의 그 오돌도돌한 촉감. 매미가 진하게 울고 잠자리 서너 마리가 마당에 걸어놓은 빨래 사이를 노다닐 때, 나는 그 마루에서 ‘어린 왕자’를 읽었다. 도도한 꽃이나 똑똑한 여우를 어디가면 만날 수 있나. 어른들 말대로 착한 아이한테만 나타나는 것들인가. 그렇게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 왕자는 정말 문자 그대로 어린 왕자였다. 나에게도 나만의 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조금 더 커서, 그 책이 어린이 권장도서라는 걸 어느 안내문 따위에서 보고 알게 된 나이에 읽은 어린 왕자는 영 재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그때의 나는 이미 중요한 건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 혹은 이면이라는 걸 너무 과도하게 교육 받고 있었다.

 ‘어린 왕자’가 달리 읽히기 시작한 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나이가 되면서부터였다. 어차피 언젠가 인연이 다하면 작별하는 것이 인간사인데 왜 관계에 힘을 써야 하는가? ‘어린 왕자’는 그 질문에 해답을 준 작품이었다.

 

 별글 클래식으로, 상큼한 레몬색 옷을 입은 [어린 왕자]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에 모두 만났던 어린 왕자. 너는 여전히 이렇게 상큼하고 맑은데 나는 나이가 들어버렸구나. 이제는 어린 왕자를 만난 화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버리고 말다니.

 

 워낙에 좋은 작품이고, 언제 읽어도 훌륭한 소설이다. 그러니 이렇게 가벼운 페이퍼백으로, 가독성 좋은 내지 디자인으로 책이 나오면 당연히 손이 가고, 읽은 작품이라도 한 번 더 읽고 싶기 마련이다. 별글 클래식의 깔끔한 표지가 예쁘기도 하지만, 표지부터 내지까지 전체적으로 무게가 가벼워서 오가는 길 위에서 빠르게 읽기에 최적화되어 좋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왕자 덕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시골집의 냄새를 다시 기억해 냈다. 여러모로 반갑고 고마운 작품이다.

"이제 갈게...."
어린 왕자가 작별을 고했다.
"안녕. 내 비밀은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여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을 기억해두려고 되뇌었다.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해진 건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 쓴 시간 때문이야."
여우의 당부가 이어졌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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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스투어 - 세상에서 제일 발칙한 요리사 앤서니 보뎅의 엽기발랄 세계음식기행
앤서니 보뎅 지음, 장성주 옮김 / 컬처그라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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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용 분장으로 떡칠이 된 채 주방에 돌아오면 보란 듯이 놀리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걸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담당 편집자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완벽한 한끼‘를 찾는 거예요.
14-15쪽

 

 나는 먹방을 좋아한다. 요즘 방송가에 난무하는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그리고 과감하게 먹는’ 방송 말고. 최불암이 진행하는 ‘한국인의 밥상’이나 방랑식객 임지호가 출연하는 ‘식사하셨어요’ 혹은 그의 요리 다큐들이 좋다. 이런 방송들을 보면서 나는 이끼나 나뭇가지도 먹을 수 있다는 데에 놀라고 심지어 그것이 맛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두 번 놀란다. 하지만 단순히 놀라움만 주는 건 아니다. 청국장 같이 푸근하고 담담한 최불암의 목소리에 실려 한국의 각종 요리들의 배경과 문화가 전달되고, 사람에게 요리란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정이고 삶을 지속하게 하는 산소라고 여기는 요리사(임지호)가 만들어내는 요리를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사람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서 감동을 받는다. 먹방이라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색채는 전혀 다르지만 나는 앤서니 보댕의 요리방랑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먹방들과 비슷한 빛을 발견했다. 직업 요리사의 삶도 좋아하고 방송으로 유명해지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이 끼 많은 요리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각국을 다니며 ‘완벽한 한 끼’를 찾겠다니. 책의 서두에 있는, 그의 고단하고 다사다난했던 여정의 단초이자 이 책의 시발점이 된 저 구상을 읽은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요리사가 마음에 들었다. 끼니로서의 요리가 아닌, 문화로서의 요리를 발견하려는 꿈. 이 꿈에 구미가 당기고 흥미가 생긴다면 누구나 이 책을 좋아하게 될 거다.

 

 아, 한 가지 조심스러운 점은 있다. 여정을 선사하는 화자 그러니까 저자의 입은 생각보다 거칠다. 마치 밥집 주방이 일반인의 생각보다 훨씬 거친 것처럼. 성적인 농담이 즐비하고 과격한 단어나 표현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러니 포르투갈로 찾아간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기 시작했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냥 적응해버리면 된다. 저 거친 입담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냐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만약 입담이 얌전하고 신사적인 인물이 이 여정에 나섰다면 아마 이 방송은 실패했을 것이며, 책도 당연히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앤서니 보댕 정도의 입담이기에 이런 장면들이 이렇게 생생하고도 구성지다.

 

 (러시아에서 사우나와 얼음수영을 체험하게 된 저자) 허둥지둥 다리에 수영복을 꿰었다. 평소 같았으면 푸드 네트워크 시청자들 앞에서 불알을 덜렁거릴 생각에 변태적인 기쁨을 느꼈을 테지만, 추위에 쪼그라들어 잣만 해진 불알을 보여 주긴 싫었다. 나는 바깥문을 열고 미끄러운 발판을 맨발로 총총 뛰어 호숫가에 이르렀고, 얼음 낀 계단을 내려간 다음, 얼어붙은 호수에 몸을 던졌다.
 충격적이었다거나 숨이 턱 막혔다, 굉장히 주웠다, 뭐 이 따위 표현은 그 경험을 묘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건 ‘투명한 화물 열차에 들이받히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와 원자 하나하나가 미친 듯 날뛰었다. 불알 두 쪽은 빗장뼈 근처 어딘가를 향해 솟구쳐 올랐고, 뇌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으며, 두 눈알은 눈구멍에서 뛰쳐나오려고 기를 썼다.
160쪽

 

 ㅋㅋㅋ 저 뒤에 자기가 물에서 나오면서 비명을 질렀는데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누가 자동차 배터리로 고양이를 고문하는 줄 알았을 거라는 둥 썰을 풀다가, 눈 덮인 얼음장 위로 풀썩 누웠는데 춥기는커녕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는 체험담이 이어진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내가 얼음수영을 체험하는 것처럼 쿡쿡거리며 웃다가 이내 ‘나도 하고 싶다’고 떠올렸다. (40도에 육박하는 폭염 속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15번의 에피소드 전체가 결국 저것으로 귀결된다. ‘나도 하고 싶다, 나도 가고 싶다, 나도 먹고 싶다’. 저자는 단순히 ‘완벽한 한 끼’ 그러니까 요리 그 자체만을 전달해주는 일에서 나아가 그가 경험한 현지의 공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체험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에 이내 동화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온갖 벌레들이 들끓고 변기가 역류하는 험한 숙소에서 뒹구는 체험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들게 되고 만다.

 

 책의 제일 마지막, 그가 쓴 마지막 에피소드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서인도제도의 어느 해변에서 아내와 함께 밥을 먹는다. 요리가 나오는데 30분 이상이 걸려도 재촉하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맥주, 모래, 파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완벽은 돼지고기를 굽는 시간이 몇 분이냐거나 어느 재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데에 달려 있는 게 아닌가보다. 저자는 세상을 두루 돌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글을 마치고, 나는 책을 덮으며 그의 경험담으로부터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뻐하며 읽기를 마쳤다.

 

 하아... 그래서... 내 휴가는 어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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