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응원하라
호응회 지음 / nobook(노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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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게 응원이란 매우 오래된 것이고 익숙한 것이다. 고된 농번기에 풍악으로 농군들의 기를 북돋우었던 농악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응원은 단순히 스포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삶에 관계된 신명이고 흥이었다.

 응원 받는 일도 멋진 일이지만 응원 하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응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마음의 표현일 뿐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단단히 응축된 에너지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감정은 전이된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진취적이고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 옆에서는 그런 좋은 기운을 받게 마련이고 일생이 짜증나고 화나는 일 투성이인 사람 옆에서는 나 역시 그 짜증과 분노에 감염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응원단은 일종의 씨앗이 된다. 건강하고 정열적인 생기는 상대와 주변에 전달되면서 시너지를 일으켜 패배가 예상되었던 경기에서 승리하게 만들고, 사회와 조직에서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싹트게 한다.

 

 

 씨앗의 단단한 표피가 찢어지고 배아가 흙속에서 자신을 산산이 분해하여 흙 밖, 햇빛 아래로 싹을 올려 보내듯이 응원단이란 순수하게 좋아서 몸 바치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 뭐 대단한 평가나 대가가 따르는 일이 아니기에 때로 이것은 청춘의 객기나 무모한 치기로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취업도 안돼, 결혼은커녕 연애도 힘들어, 그냥 사는 게 다 버거워’라는 무기력과 고단함이 20~30대 전반에 형성되어 있는 때에, 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뭐 주는 것도 아닌 개고생을 자처해서 한다는 건 자본주의의 논리상 비효율적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응원단은 왜 존속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의 응원단 생활을 뒤돌아보면, 분명 나는 사람들을 응원하게 하는 위치에 서 있었지만, 응원을 하는 동안은 항상 내가 더 그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응원은 허공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서로 진한 교감이 있어요. 사실 응원단이든 응원단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든 응원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모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됩니다.
60쪽 (권오진 79학번)

 

 고대 응원단 OB들의 인터뷰 및 수기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그 자체로 고대 응원단의 역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자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 대학가와 그 문화가 걸어온 길의 단편이다. 나로서는 까마득한 59학번들의 회상과 7080학번들의 피땀눈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분투기, 영광스러운 기록들로 점철된 90년대를 지나 새로운 기조 앞에서 진보와 변혁을 꿈꾸고 있는 00학번들의 비전까지 이 작은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고대 응원단에 대해 막연한 이미지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던 나는 우리나라 응원 문화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해온 연고전/고연전과 이 첨예한 접전에서 호랑이 기운으로 50년여를 달려온 고대 응원단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특히 고대와 연대의 관계는 마치 코카콜라와 펩시에 다름없다. 둘이서 죽고 못하는 원수로 비춰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있기에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아닌가 한다.
 대학 다니던 때에는 관심도 없던 응원단 활동이 이렇게 멋진 일이었을 줄이야. 화려한 응원복을 입고 사람들의 시선과 환호를 받기 때문에 멋진 게 아니다. ‘응원’ 자체가 멋지다. 응원은 같은 팀을 위하여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응원단이 누구냐에 따라 건강하고 역동적인 기운을 응집한 대중의 축제가 될 수도 있다. 고대 응원단은 이 대중의 축제를 가장 선두에서 만들어온 주역이다. 장영철 OB의 이 말은 이 뜨거운 관계를 이 한 마디로 압축한다.

 고연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본질은 ‘서로의 존재 가치를 높이자’는 것이었죠.
163쪽  (장영철 67년 부단장, 72년 총기획)

 

 고대 응원단의 자화자찬만으로 이 책이 점철된 건 아니다. 이 책은 응원단 문화의 그림자를 지적하며, 자기애에 너무 도취되지 말라는 경계도 담겨 있다.

 

 내가 고대를 다녔기 때문에, 고대응원단을 했기 때문에 얻은 경험의 영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나도 모르게 경험의 영역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측면이 있어요. 인간은 머무르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나를 위한 응원이 필요한 것이겠죠. 자신을 응원하되 자기애에 너무 빠지지는 말자.
187쪽 (이상훈 80년 부단장)

 

 이 책은 대학 응원단에 참여하라는 동기 부여제이자 대중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는 응원에 대한 성찰이자 새로운 문화에 대한 야망의 기록이다. 독자 모두가 자기의 인생을 자신이 응원하길 바라는 이 책의 열정이 모든 독자들에게 가 닿기를.

 

 

 


나의 응원단 생활을 뒤돌아보면, 분명 나는 사람들을 응원하게 하는 위치에 서 있었지만, 응원을 하는 동안은 항상 내가 더 그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응원은 허공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서로 진한 교감이 있어요. 사실 응원단이든 응원단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든 응원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모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됩니다. (권오진 79학번)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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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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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입니다. 그동안 저에게 소설은 언제나 문 밖에 선 누군가의 노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두드린 소리는 문 안에 울림을 남기고 그 울림은 문 안에 있는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그 울림이 어떻게 둥글려지고 응결되고 간직되든지, 그것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해서, 저는 문 안의 울림이 문 밖에서 두드린 당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제껏 저는 독자가 소설을 발견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야기란 소설의 몸으로 박제되어, 어디 가만히 고정된 채로 독자가 자기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리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주]는 발견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견하기 위해서 나타난 책이었습니다. 작가의 소리를 듣고 그 두드림에 공명하는 독자를,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장혜령 작가님, 오 년 동안 쓰고 또 고치며 비로소 세상에 낸 이 책을 읽고 놀란 건 저 한 사람만이 아닐 겁니다. 일기, 시, 르포. 고정된 형체 없이 그러나 명명한 터치로 문을 두드리는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질문을 만들게 합니다. 에세이를 초과하는 기록이라 결국 소설로 진주를 토해낸 이 사람은 누구일까? [진주]라는 기록을 써서 결국 글쓴이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나? 해방인가, 중력인가?

 

 

*

 

 

저자인 당신의 기억 속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는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낯설었습니다. 작가님과 저는 나이가 같거나 한두 살 차이가 나는 정도일텐데, 생의 타임라인으로 보자면,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같은 시간을 살아왔을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의 일기와 제 일기는 마치 다른 우주에서 기록된 듯 다릅니다. 당신이 부당하고 부조리한 정치에 대한 일기를 쓸 때 나는 술을 많이 드시는 아빠가 싫다거나 사이가 틀어진 친구를 원망하는 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사복경찰로부터 지켜야 하는 비밀을 품었을 때, 나는 거실 한 구석에 커튼을 치고 은밀한 공간을 품었을 뿐입니다. 같은 정권을 거쳐 같은 뉴스를 보며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성장한 당신과 나인데도 몸의 동선 뿐 아니라 기억의 동선까지도 완전히 달라 기이했습니다.

 

기이한 것은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다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미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읽는 것.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로부터 바로 사유가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혜령 작가님. 티비를 보는 늙은 아버지에게 그의 과거를 묻는 대신, 민주화운동가인 아버지의 기록을 구하며 찾아 읽었던 것은 이런 마음이었습니까? 이해할 수 없음에도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고 찾아가 읽는 것. 사랑의 속성인 이것에 힘입어 당신의 사유는 이토록 확장되어 나에게까지 와 닿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덕에 당신의 기록에 닿은 나의 세계가 깨어지고 그 파편들이 다른 모양으로 건설되어 새로운 세계로 조직되는 일. 이것이 [진주]를 읽으며 나에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상속받은 이 세상은 불친절했습니다. 책 속에, 작가님이 삽입한 어린 날의 일기에서와 같이, 부재한 아버지를 앓고 있는 아이에게 “시험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답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토로하는 일기에 “깨끗이 잘 썼다”고 응수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라왔습니다. ‘왜‘를 설명해주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빛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시 질문해야만 했다(책 20쪽)’며 질문으로 어둠을 밝히고 질문으로 지도를 그린 작가님과 저 같이 아무런 질문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 공존합니다. 경계에 서서 사회와 불화하는 작가와 귀퉁이에 앉아 불화하지도 친화하지도 못하는 독자.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요?

 

[진주]는 우리가 상속받은 세계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신앙으로 지도를 그렸던 그 시절, 1970년대를 깊이 탐색합니다. ‘우리로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가 이루어지리라 여기고, 우리로 사는 사람들의 가족은 거룩한 신앙으로 삶을 지탱하던 시절이었다고, 작가님은 증언합니다. 그 기록을 통하여 비로소 내 안에 찢기거나 소실된 페이지를 채워 넣어봅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상의 기록을 [진주]로 채우면서, 나는 내 안에 이토록 부재한 기록이 많았음을 확인합니다. 내가 살았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실존한 것이 아니었나? 내가 이토록 세상에 어두웠나? 부재한 기록이 한 겹, 한 겹 두터워질수록, 이 질문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시선을 돌립니다.

 

물러나라. 목적어가 없는 피켓을 들고 당신들은 불시에 흩어집니다.

그렇게 햇빛이 사라진 곳에서 어느 날 다시 눈을 뜹니다.

엎드려 손을 머리 위로.

명령어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여전히 손과 발이 없는 감정을 연습합니까.

 

민주화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쫓기는 아버지가 하나님이었고 그를 쫓는 독재자가 하나님이었던 신앙의 시절, 우리로 사는 일에 가슴이 뜨거웠던 그 믿음으로 그린 지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지도 위로 행군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멸시하거나, 두려워했다고 해서 그 지도는 사라졌습니까? 아니요. 우리에서 해체된 그 많은 개인들은 지도를 덧칠했습니다. 지도 위에 또 다른 붓질을 수없이 그어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다고, 가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때와 바뀌었다고 다들 말하지만,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청, 병원, 관공서, 대학 등이 감옥의 초입과 같고,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묻는 것과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도색만 새로 한 낡은 아파트에 들어선 듯 속았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만 현재는 너무 소란해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을 꺼내고 힘들이지 않고 글을 뱉습니다. 하지만 과연 서로에게 닿아서 이야기가 되어 빛을 발하는 건 얼마나 될까요? 말과 글의 홍수 속에서, 모두의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 좋을 대로 움직이면서 화분을 깬 잘못을 떠맡게 될까봐, 누가 나를 거짓 밀고 할까봐, 내가 한 짓은 아니니까, 어차피 우린 다 완전한 각자로 사는 거라며 침묵합니다. 손등에 붉은 자국이 새겨지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침묵합니다. [진주]의 빛으로 내 손등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비춰보면서, 이대로라면 작가님의 말대로 수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동감합니다.

 

 

*

 

 

왜 그렇게 살아왔는가, 왜 그렇게 지나와야했는가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불화합니다. 자신과 불화한 사람은 타자와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증명하기 위하여 써야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님이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다가 결국에는 못 이겨 진주라는 낯선 도시로 향했던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불화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야 했던 그 산통은, 어쩌면 작가에게만 아니라 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필요하겠구나,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말대로 애초에 기억도 삶도 타인과 더불어 시작되고 이야기는 고립된 방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와 머무는 세계니까요.

 

작가님이 오랜 시간, 오래도록 속에 담아두었던 많은 것들이 더 많은 진주가 되어 세상으로 토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야기에 닿아 완전한, 우리의 이야기를 빚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우리가 서로 맞닿으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신앙이나, 어둠을 쫓기 위한 질문이 아닌, 빛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요? 세계의 전진은, 어쩌면 지금부터 비로소 시작이라는 기대로 편지를 갈무리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받아 적던 간수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립니다. 바깥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당신은 고개를 들고, 그러자 그곳에 없던 작은 창문 하나가 생겨납니다. 그 창 너머로, 오랜 시간 감옥의 겨울을 견디고 지내온 나무 한 그루가 엿보입니다. 그 나무만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나무의 삶이므로. 나무는 기다리는 일을. 가만히 시간을 견디는 일을, 그러니 삶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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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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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년 가까이 된 소설이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가 월간지에 2년 여간 연재한 작품이었다. 찰스 디킨스가 이 소설을 쓸 때 25살이었는데, 그때 이미 그는 [피크윅 클럽의 기록]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고 유명해져서 인기 작가가 된 상태였다고 하다. 이 신랄하고 도발적인 작가는 대중이 보고싶어 하는 얌전하고 고상한, 그러니까 성 제임스 거리(런던의 상류 부촌)에서의 보기 좋은 것들을 그리는 작품을 쓰기 보다 정 반대의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우중충한 성 자일스 거리에서도 으리으리한 성 제임스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위한 좋은 소재를 찾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으로,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를 어떤 주변 인물들 가운데 두어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을지, 또 그가 어떤 유의 사람들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타락할 가능성이 있을지를 궁리하면서,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해냈다. 이 주제를 두고 곰곰이 숙고하는 동안, 나는 내 의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많은 강력한 이유들을 발견했다.
10쪽 저자 서문 중에서

 

 

 그래서 작가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게도, 악당들의 생활을 아주 노골적이고 집요하고 철저하게 이 소설에 담았다. 악당들이 어디까지 비열하고 어디까지 혐오스러울 수 있는가? 그런 악당들의 끝은 과연 평탄할 수 있는가? 찰스 디킨스의 주제 의식은 [올리버 트위스트] 작품 전체에서 시종일관 맹렬하게 타오른다.

 

(줄거리)

 올리버 트위스트가 태어나자 마자 그의 엄마는 목숨을 잃는다. 엄마의 신분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올리버가 태어났기에, 올리버는 고아원에서 자란다. 당시 고아원의 아이들은 상품처럼, 노예처럼 거래되었다. 올리버는 고아원 관리자인 빔블씨에게 이끌려 굴뚝청소부, 장의사 등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어른들의 학대와 또래의 모함에 견디지 못한 올리버는 어느 날 도망을 쳐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으로 오는 길에 유대인 노인의 무리에 끼게 된 올리버는 졸지에 소매치기 일당이 되고 만다. 사람 좋아 보이는 유대인 신사는 사실 아이들에게 앵벌이를 시키는 포주였다. 하지도 않은 소매치기에 대한 누명을 쓴 올리버는 재판까지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혐의 없이 풀려난다. 지쳐 쓰러진 올리버를 집으로 데려와 간호하고 보살펴준 브라운 씨의 덕택으로 올리버는 생애 처음 따듯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올리버가 자신들을 밀고할까봐 소매치기 집단은 다시 올리버를 잡아와 도둑질에 합류시킨다. 도둑질을 하러 간 집에서 총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된 올리버는, 다시 로즈 아가씨 등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가출한 올리버를 쫓는 빔블씨, 역시 올리버를 찾으러 다니는 소매치기 집단 등의 위협 속에 올리버는 불안해한다. 그러던 중 올리버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고, 악당들은 붙잡히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등 제각각 흩어진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올리버 트위스트]는 절대 지루하지 않다. 찰스 디킨스는 단 한 명의 인물도 허투루 등장시키지 않고 각기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게 무대에 올려, 작품 전체가 시종일관 흥미와 긴장을 유지하도록 했다. 200년 전의 작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은 세련되었고 현대적이다. 왜 영국인들이 찰스 디킨스를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출간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보통 2권으로 나뉘어 있거나 청소년 버전으로 축약되어 있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원작 그대로, 한 권에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 초반에 저자 서문과 책 말미에 작품 해설을 먼저 읽고 작품을 읽으면 재미와 이해가 더 깊어지리라 생각이 든다. 19세기 최고의 삽화가였던 조지 크록생크의 삽화를 수록하여 당시 사회상과 분위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큰 장점이다.

 최근 아이들과 집에서 독서토론을 하는 가정이 많이 늘었는데, 어린이 버전이나 청소년용도 좋겠지만, 현대지성의 [올리버 트위스트] 단권 완역본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고 각 인물의 입장이나 사정, 선택들에 대하여 토론을 나눠보는 것도 굉장히 좋은 시간이 되리라 싶다.


나는 우중충한 성 자일스 거리에서도 으리으리한 성 제임스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위한 좋은 소재를 찾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으로,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를 어떤 주변 인물들 가운데 두어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을지, 또 그가 어떤 유의 사람들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타락할 가능성이 있을지를 궁리하면서,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해냈다. 이 주제를 두고 곰곰이 숙고하는 동안, 나는 내 의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많은 강력한 이유들을 발견했다.
10쪽 저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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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
가쿠타 미쓰요 지음, 이은숙 옮김 / 하다(HadA)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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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자녀 관계의 미묘함을 정밀하게 포착한 단편들"


 일본 작가 가쿠다 미쓰요는 [종이달], [공중정원] 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1990년 [행복한 유희]로 등단한 이래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 세계를 인정받기도 했다.

 가쿠다 미쓰요가 쓴 8편의 단편을 한데 엮어 [마마보이]는 한 권의 소설집이 탄생했다. 연인들이 주고 받는 사탕의 단내를 색으로 옮긴 듯한 표지가 수상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꿈꾸는 듯한 아이의 표정만 선명하다. 엄마를 ‘엄마’로 묶어둔 채로 그 치마폭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나’의 얼굴이 아마 이런 표정일 것이다.

 

 우리 시대는 더 이상 엄마를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으로 내세우지 못한다. [엄마를 부탁해]를 대표로 엄마에게도 딸로, 여자로, 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이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잊거나 외면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런 연유로 이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엄마가 아니라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엄마와 나의 관계다.

 엄마라는 역할은 필연적으로 자식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엄마는 자식을 낳고 기르는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표다. 그래서 엄마는 절대 엄마 혼자서로 존재할 수 없다. 엄마는 점이 아니다. 엄마는 선이다. 한 여자라는 점과 그 여자로부터 태어나 자란 자식이라는 점 사이에 그려진 선이 엄마다. 자식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엄마라는 선도 달라진다. 가쿠다 미쓰요는 이 엄마라는 선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기민하게 포착한다.

 

 

 [마마보이]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인 <허공을 차다>의 엄마는 전통적으로 익숙한 엄마다. 남편과 자녀들의 오래된 물건을 보관하며 지내다, 치매가 들어 표표히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 버린 엄마. 여기에 등장하는 엄마라는 선은 가늘지도, 굵지도 않다. 그러나 아들의 기억 밑바닥에 이미 문신처럼 새겨진 어린 날의 시간들이 흥청망청 백수로 사는 아들의 일상 표면으로 때때로 올라온다. <빗속을 걷다>, <새를 운반하다>의 주인공들과 어머니의 사이는 좀 더 현실적이다. 쓸쓸하고 건조하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들은 자기의 삶을 살고 자식들은 그런 어머니의 삶에서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다. 자식들은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엄마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책의 표제작인 <마마보이>나 <파슬리와 온천>에 등장하는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고 집요하다. 이 작품들에서 비로소 ‘엄마가 자식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엄마를 놓지 못하는 거 아니야?’라는 작가의 질문이 쟁쟁하게 들려온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 전체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내듯이, 우리는 엄마를 미워하거나 불편해하거나 이상해하거나 신경쓰는 만큼 엄마의 세계에서 분리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분리되지 못하고, 여전히 어딘가 어쩔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이 상태를 선택한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나 아닌가?

 

 소설이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은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교훈을 준다거나 감동을 주는 것도 물론 소설의 좋은 역할이겠지만, ‘발견’은 생각하게 하고 오래 간직하게 하고 그러다가 그것을 내 삶에 투영시켜 보게 한다. 그래서 좋은 소설은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나는 [마마보이]를 읽으며 다시 한 번 좋은 소설의 위력을 체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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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되기 싫은 개 - 한 소년과 특별한 개 이야기
팔리 모왓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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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 만약에 내가 캐나다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멀리 서 있는 머트를 봤다면, 나 역시 “쉿, 아가. 저기 진짜 살아 있는 산염소가 있단다!(책 172쪽)” 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거다. 화자의 말대로 어떤 산염소보다 감동적인 등산기술을 선보인 머트의 매력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팔리 모왓은 이미 고인이 된 작가다. 마흔네 권의 책을 썼고 캐나다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연주의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개가 되기 싫은 개]는 작가 팔리 모왓의 자전 소설로 자신이 소년 시절에 직접 겪은 일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거버너 제너럴 어워드’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단다.

 

 책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동물이다. 특이하게 생겼는데, 생김새보다 훨씬 특이한 성격을 가진 이 개는 단돈 4센트에 팔려 화자의 집으로 들어온다. 족보를 알 수 없어 지어진 ‘머트(잡종견)’이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머트는 처음부터 특이한 존재감으로 개도 아닌, 사람도 아닌 그냥 머트로 이 집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국식으로 이름을 말하면 똥개려나.

 

 

 

 

 

 [개가 되기 싫은 개]에서 그려지는 머트의 활약상은 참 특이하고 기이하다. [창문 밖으로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주인공이 ‘왜 사람들은 자기만 보면 소리를 지르지?’라는 독백을 하는데, 머트도 이런 독백을 틀림없이 스스로 여러 번 했을 거야. 성질을 좀만 죽였어도 머트의 삶은 편안하고 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트는 수치심도 알고, 도도하게 자존심을 지키는 법도 아는 평화주의자다.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머트의 매력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 소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들은 머트를 비롯하여 모두 인간이 아니다. 장을 보러 가는 엄마의 뒤를 걸어서 따라가는 부엉이, 사과귀신을 자처하며 지하실에 전세 든 스컹크 등등 사람과 교감하는 캐나다의 동물들이 이 책에서 아주 따듯하고 정감 넘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말도 안 통하는 동물들이지만 마치 어린 동생들처럼 사랑스럽다. 자연과 교감하며 동물들과 따듯한 유대를 만끽했던 저자만의 시선이 독자 역시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 동물과 교감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렇게 온난한 교감을 주고 받았던 동물들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대해서, 저자는 인간적인 연민으로 갈무리 짓지 않아 더욱 담백하고 깔끔하다. 부엉이 올의 마지막, 머트의 마지막. 저자는 그때 느꼈던 슬픔과 아픔을 확대하거나 포장하는 대신, 그저 생의 한 맥이 거기서 끝나고 다시는 시작되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비극을 지켜보면서도, 때로 그 비극 속에 휩쓸려 상처를 입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담담히 여기 서 있는 자연이란 아마 저런 자세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마음이 순해지고 아이처럼 천진한 시선을 선물해주는 소설이다.

갑자기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린 웃기 시작했다. 머트는 같이 비웃음을 사는 건 즐기지만 혼자 비웃음을 당하는 건 참지 못했다. 그래서 등을 쌩 돌리고 늪지 끝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한순간 우린 머트가 오리들을 버리고 밖으로 나올 거라고 짐작했다. 예상이 틀렸다.
머트는 우리 쪽은 다시 눈길도 주지 않고 늪지의 저쪽 끝으로 헤엄쳐 가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총 맞은 오리들 전부를 물가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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