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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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입니다. 그동안 저에게 소설은 언제나 문 밖에 선 누군가의 노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두드린 소리는 문 안에 울림을 남기고 그 울림은 문 안에 있는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그 울림이 어떻게 둥글려지고 응결되고 간직되든지, 그것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해서, 저는 문 안의 울림이 문 밖에서 두드린 당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제껏 저는 독자가 소설을 발견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야기란 소설의 몸으로 박제되어, 어디 가만히 고정된 채로 독자가 자기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리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주]는 발견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견하기 위해서 나타난 책이었습니다. 작가의 소리를 듣고 그 두드림에 공명하는 독자를,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장혜령 작가님, 오 년 동안 쓰고 또 고치며 비로소 세상에 낸 이 책을 읽고 놀란 건 저 한 사람만이 아닐 겁니다. 일기, 시, 르포. 고정된 형체 없이 그러나 명명한 터치로 문을 두드리는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질문을 만들게 합니다. 에세이를 초과하는 기록이라 결국 소설로 진주를 토해낸 이 사람은 누구일까? [진주]라는 기록을 써서 결국 글쓴이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나? 해방인가, 중력인가?

 

 

*

 

 

저자인 당신의 기억 속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는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낯설었습니다. 작가님과 저는 나이가 같거나 한두 살 차이가 나는 정도일텐데, 생의 타임라인으로 보자면,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같은 시간을 살아왔을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의 일기와 제 일기는 마치 다른 우주에서 기록된 듯 다릅니다. 당신이 부당하고 부조리한 정치에 대한 일기를 쓸 때 나는 술을 많이 드시는 아빠가 싫다거나 사이가 틀어진 친구를 원망하는 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사복경찰로부터 지켜야 하는 비밀을 품었을 때, 나는 거실 한 구석에 커튼을 치고 은밀한 공간을 품었을 뿐입니다. 같은 정권을 거쳐 같은 뉴스를 보며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성장한 당신과 나인데도 몸의 동선 뿐 아니라 기억의 동선까지도 완전히 달라 기이했습니다.

 

기이한 것은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다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미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읽는 것.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로부터 바로 사유가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혜령 작가님. 티비를 보는 늙은 아버지에게 그의 과거를 묻는 대신, 민주화운동가인 아버지의 기록을 구하며 찾아 읽었던 것은 이런 마음이었습니까? 이해할 수 없음에도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고 찾아가 읽는 것. 사랑의 속성인 이것에 힘입어 당신의 사유는 이토록 확장되어 나에게까지 와 닿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덕에 당신의 기록에 닿은 나의 세계가 깨어지고 그 파편들이 다른 모양으로 건설되어 새로운 세계로 조직되는 일. 이것이 [진주]를 읽으며 나에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상속받은 이 세상은 불친절했습니다. 책 속에, 작가님이 삽입한 어린 날의 일기에서와 같이, 부재한 아버지를 앓고 있는 아이에게 “시험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답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토로하는 일기에 “깨끗이 잘 썼다”고 응수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라왔습니다. ‘왜‘를 설명해주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빛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시 질문해야만 했다(책 20쪽)’며 질문으로 어둠을 밝히고 질문으로 지도를 그린 작가님과 저 같이 아무런 질문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 공존합니다. 경계에 서서 사회와 불화하는 작가와 귀퉁이에 앉아 불화하지도 친화하지도 못하는 독자.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요?

 

[진주]는 우리가 상속받은 세계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신앙으로 지도를 그렸던 그 시절, 1970년대를 깊이 탐색합니다. ‘우리로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가 이루어지리라 여기고, 우리로 사는 사람들의 가족은 거룩한 신앙으로 삶을 지탱하던 시절이었다고, 작가님은 증언합니다. 그 기록을 통하여 비로소 내 안에 찢기거나 소실된 페이지를 채워 넣어봅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상의 기록을 [진주]로 채우면서, 나는 내 안에 이토록 부재한 기록이 많았음을 확인합니다. 내가 살았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실존한 것이 아니었나? 내가 이토록 세상에 어두웠나? 부재한 기록이 한 겹, 한 겹 두터워질수록, 이 질문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시선을 돌립니다.

 

물러나라. 목적어가 없는 피켓을 들고 당신들은 불시에 흩어집니다.

그렇게 햇빛이 사라진 곳에서 어느 날 다시 눈을 뜹니다.

엎드려 손을 머리 위로.

명령어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여전히 손과 발이 없는 감정을 연습합니까.

 

민주화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쫓기는 아버지가 하나님이었고 그를 쫓는 독재자가 하나님이었던 신앙의 시절, 우리로 사는 일에 가슴이 뜨거웠던 그 믿음으로 그린 지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지도 위로 행군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멸시하거나, 두려워했다고 해서 그 지도는 사라졌습니까? 아니요. 우리에서 해체된 그 많은 개인들은 지도를 덧칠했습니다. 지도 위에 또 다른 붓질을 수없이 그어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다고, 가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때와 바뀌었다고 다들 말하지만,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청, 병원, 관공서, 대학 등이 감옥의 초입과 같고,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묻는 것과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도색만 새로 한 낡은 아파트에 들어선 듯 속았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만 현재는 너무 소란해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을 꺼내고 힘들이지 않고 글을 뱉습니다. 하지만 과연 서로에게 닿아서 이야기가 되어 빛을 발하는 건 얼마나 될까요? 말과 글의 홍수 속에서, 모두의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 좋을 대로 움직이면서 화분을 깬 잘못을 떠맡게 될까봐, 누가 나를 거짓 밀고 할까봐, 내가 한 짓은 아니니까, 어차피 우린 다 완전한 각자로 사는 거라며 침묵합니다. 손등에 붉은 자국이 새겨지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침묵합니다. [진주]의 빛으로 내 손등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비춰보면서, 이대로라면 작가님의 말대로 수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동감합니다.

 

 

*

 

 

왜 그렇게 살아왔는가, 왜 그렇게 지나와야했는가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불화합니다. 자신과 불화한 사람은 타자와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증명하기 위하여 써야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님이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다가 결국에는 못 이겨 진주라는 낯선 도시로 향했던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불화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야 했던 그 산통은, 어쩌면 작가에게만 아니라 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필요하겠구나,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말대로 애초에 기억도 삶도 타인과 더불어 시작되고 이야기는 고립된 방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와 머무는 세계니까요.

 

작가님이 오랜 시간, 오래도록 속에 담아두었던 많은 것들이 더 많은 진주가 되어 세상으로 토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야기에 닿아 완전한, 우리의 이야기를 빚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우리가 서로 맞닿으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신앙이나, 어둠을 쫓기 위한 질문이 아닌, 빛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요? 세계의 전진은, 어쩌면 지금부터 비로소 시작이라는 기대로 편지를 갈무리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받아 적던 간수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립니다. 바깥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당신은 고개를 들고, 그러자 그곳에 없던 작은 창문 하나가 생겨납니다. 그 창 너머로, 오랜 시간 감옥의 겨울을 견디고 지내온 나무 한 그루가 엿보입니다. 그 나무만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나무의 삶이므로. 나무는 기다리는 일을. 가만히 시간을 견디는 일을, 그러니 삶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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