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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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장석주는 <은유의 힘>이라는 책에서,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소리들. 말이 소리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은 항상 무언가의 이름들로 온다.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점을 조형하고, 본질을 외시해내는 효과가 있다.’고 썼다. 보이지 않고 떠도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익명의 무형자를 기명의 명료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름이라면, 아룬다티 로이는 오늘날 인도에게 ‘안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도의 영혼에 [지복의 성자]라는 육체를 지어 입혔다.

 

 [지복의 성자]는 6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부커상 수상을 비롯하여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아룬다티 로이가 10년 동안 쓰고 201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를 주요 배경으로 두 주인공들의 서사를 정밀하게 엮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함께 지니고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택하지만 현실에서 비참한 생을 살다 묘지로 거처를 옮기는 안줌은 이 소설 전반부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건축학도로 자라지만 카슈미르에 부는 분쟁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그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 틸로는 후반부 서사의 축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델리와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몸, 지금 인도의 상태를 아주 면밀하게 해부한다. 인도의 뼈와 관절과 근육과 췌장과 폐, 간, 심장 따위의 장기와 그 모두를 연결하는 동맥과 실핏줄과 그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세포들과 피, 혐오와 선동의 핏방울들. 부패한 정치꾼과 비정한 자본주의자들이 흘려보내는 돈이라는 혈청, 그 혈청에 실려 온 몸속을, 온갖 작은 존재들의 사이와 내부를 독하게 파고드는 권력이라는 독. 천년고도인 델리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창녀가 되고, 오래된 계급(카스트)에 짓눌린 사람들은 미디어의 밥이 되거나, 미디어가 주는 밥을 먹으며 비참하게 연명한다. 카슈미르는 또 어떤가? 종교와 파벌 그리고 그 명백한 단층선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정부는 카슈미르의 젊은이들의 시체 위에 지옥을 지어놓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국인이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신음을, 아룬다티 로이는 철저하게 해체하여 수많은 피와 눈물로 조직된, 만신창이 인도의 육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꼭 보라고, 이것을 봐야 한다고. 

 


 

1. 절대 질서와 종교 분쟁 아래 땜질된 몸으로 살아가는 안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생식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내면에는 두 파벌의 싸움, 이 둘이 싸우는 듯 두 개의 목소리가 나는 안줌은 그 자체로 인도다.
 여성의 성기를 꿰맸다가 나중에 다시 풀고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안줌은 그와 같은 ‘히즈라(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성)’들의 공간인 콰브가에서 살았다. 콰브가는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나 그 기득권의 그늘에 기생하듯 살아가는 공간이다. 안줌은 땜질된 몸을 가지고 꿈은 일부만 실현된 상태로 콰브가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았다(책 47쪽). 살기 위해서 창녀가 되고 행복을 꿈꿨으나 쉽지 않았던 안줌의 운명은 수퍼 파워들의 국제사회 속에서 절대 권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인도가 걸어온 근현대사와 겹쳐 보인다. 안줌이 사상 최악의 종교 폭동인 ‘구자라트 폭동’을 당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 이유 역시 의미심장하다. 안줌을 살려두는 게 학살자들에게는 저주와 불운을 피하는 일이었기에, 안줌에게는 그녀 자신의 생존이 미칠 것 같은 치욕이요 수모였다. 이 치욕과 수모는 고스란히 자기 혐오(작품 속에서는 비탄)로 이어져 안줌은 트라우마의 구덩이에 빠진다. 그런 그녀에게 콰브가는 땜질된 몸과 구자라트 폭동의 트라우마로부터의 구원처가 아니었다.

 

여기서(콰브가)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중략)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책 39쪽, 님모의 말)

 

 아룬다티 로이는 히즈라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콰브가를 떠나는 안줌을 빗대어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진짜인가? 소외된 자들의 공동 거처였던 콰브가조차, 그곳에서 누린 잠시의 즐거움과 만족조차 안주할 수 없는 가짜임을 깨달은 안줌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콰브가를 떠나 묘지로 간다. 묘지는 음부, 죽은 것들이 모인다. 안줌이 누운 묘지는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계급과 종교와 성별의 잣대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이 모이는 묘지다. 기득권을 부리거나, 기득권에 편승하거나 기생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세상이 현실이라면 그곳은 초현실, 현실 밖, 언어 밖의 세계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긴 하키라트(현실)가 없어.”
책 117쪽

 

 안줌을 낳은 엄마는, 안줌에게 두 개의 성기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책 19쪽)’라고 자문한다. 언어의 세계는 오직 남성과 여성만이 있는 세계다. 계급과 종교, 성性이 초월될 수 없고 초월되어서도 안되며 그를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세계 곧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지어진다.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이곳에 앉아 있고, 정부는 이 철제 난간 사이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희망의 부스러기를 먹여줍니다. 살아가기엔 충분치 않지만 우리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론인을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정부가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중략)
 그들이 지어놓은 새 화장실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신사용과 숙녀용이 따로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 있는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책 179쪽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의 호소문 중에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통제를 당한다. 이 통제의 도구 역시 말, 언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들, 우리가 비통함을 잠시 해소할 수 있게 말하도록 해주는 그들, 우리의 말을 실어 나르고 또 그들의 말을 쏟아 부어 결국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 통제하는 그들. 땀과 피와 똥과 온갖 저주로 곤죽이 된 우리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이 비명마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돈은 세상의 공기, 돈은 정치라는 파장으로 세상을 잠식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치 그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라는 것처럼. 그러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목소리를 입을 수 없기에, 결국 이 소설은 정치적이어야 했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처절하고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고함을 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하여. 어떤 타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듣고 뼛속 깊이 응전하며 버텨온 인도의 공기란 이런 것이었으니.

 

 언어 밖의 세계로, 초현실의 그곳으로 안줌을 보낸 일 역시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3살 때에 사원에서 데려온 자이나브라는 딸이 있었음에도 안줌은 어떻게든 엄마가 되고자 했다. 여성의 생식기를 통하여 자신의 아이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줌은 결코 잉태도, 출산도 할 수 없었다. 제3의 성은 무성, 즉 불구다. 생식도, 번식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몸으로서는 다음 세대의 생존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생식을 초월하여 다음 세대로의 생명의 전이를 느끼게 한 건, 틸로 그리고 미스 제빈 2세와의 만남이었다.


 
2. 지지 않은 죄를 속죄하는 인도의 지식인, 틸로

 

 아룬다티 로이는 카슈미르의 비극적인 역사 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틸로와 세 남자의 관계를 수놓았다.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이슬람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무사, 인도 정보국의 고위 관료로서 카슈미르의 비극을 관망하는 비플랍, 비플랍과 정보를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자기 처지를 궁리하는 데에 몰입할 뿐인 나가, 이 세 인물을 연결하는 중심 인물인 틸로의 눈과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인권과 평화마저도 사업이 된, 카슈미르의 슬픔을 시처럼 읊조린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샛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책 355쪽

 

수십만 민중이 집에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의 분출조차도 전략적, 군사적 운영 계획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묘지로 행진할 것이었다.
 책 307쪽

 

 카슈미르가 오늘날의 분쟁의 도가니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충섬심이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민족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그들을 갈라지게 하고, 서로의 멱을 따게 하고, 슬픔이든 분노든 그들이 느끼고 표출하는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의 먹이가 되게 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야심이 그 먹이를 갉아먹고 증식한다는 사실이, 이 비통하고 한스런 일들이 저자의 은유가 가득한 문장으로 시처럼 펼쳐진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그래서 독자는 곧장, 이 카슈미르의 현실을 통하여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증식하고 있는 또 다른 카슈미르 내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정하고 비열하고 비겁한 인물들에 대한 경계와 분노를 끓어 올려 저들의 쌍둥이, 내 현실의 존재들에게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 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유감스럽게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극이 없는 인간이라 거래할 상품이 없다. 나는 상류계급, 어느 모로 보나 상류계급의 압제자다.
 그 사실을 위해 축배를 들자.


책 259쪽 비플랍의 독백 중에서

 

 

 비극이 없는 인간, 거래할 상품이 없는 상류계급은 절대로, 절대로 그들의 전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 국가와 민족, 신념과 종교, 신을 위한 투쟁이라는 편가르기를 조장하며 그 단층선 사이로 칼집을 넣어 육체가 난도질당하게 내버려두고 그 피로 자신들의 생애를 존속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목소리를 잃은 채로, 산채로 회가 떠지는 생선처럼 도마 위에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할 것인가? 수상가옥에서 무사와 헤어진 후, 아무런 목적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이한 사진을 찍으며 기이하게 위험한 기록물을 축적하는 틸로는 그런 독자에게 힌트를 준다.  


 안줌이 인도를 상징한다면, 틸로는 저자의 분신으로 읽힌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카슈미르로 돌아와 여행을 한 건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책 359쪽)’는 틸로의 모습에서 저자가 왜 이 소설을 10년에 걸쳐 쓰고 기어코 완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저자는 그녀가 작가이거나 활동가이기 때문에 부패한 정치와 무자비한 자본주의,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고,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비린내가 걷히지 않은 인도의 시간 속에서, 지식인으로 교육 받고 살아온 저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르포를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소설을 발표한다.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운명에 가닿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이 거대한 전쟁을, 폭동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이 안줌 내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틸로의 목숨을 위협했던 부패한 정권의 위력을, 지금도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있는 카슈미르의 공기총을 막을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그것은 막는 게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 분쟁과 전쟁은 결국 붕괴하거나 자멸하는 것이며 버려진 자들, 언어 밖에 있는 자들, 죽은 자들로부터 불구의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게 되리라는, 그녀만의 희망을 예언한다. 바로 미스 제빈 2세를 통하여.


 

3. 음부의 낙원, 잔나트. 낙원의 아이, 미스 제빈 2세

 

 왜 묘지였을까?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도 한참이나 ‘잔나트’의 이미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카슈미르인들처럼, 묘지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안줌과 그녀가 건설한 잔나트를 보여준 아룬다티의 마지막 목소리는 뜻밖에 ‘호소’였다.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절반을 지나가도록 두 주인공인 안줌과 틸로는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다. 틸로가 미스 제빈 2세를 데리고 잔나트로 오기 전까지, 안줌과 틸로가 같은 공간에 모이는 건 딱 한 차례였다. 바로 미스 제빈 2세가 나타난 그곳에서.
 미스 제빈 2세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 투사들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들이 모이는 곳(책 162쪽)’에서 나타났다.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듣고 있을 거라는 믿음.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책 168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현했다. 안줌은 이렇게 나타난 미스 제빈 2세를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나섰고 그녀가 아가를 데려가는 걸 막는 자와 싸우다 소동이 났다. 틸로는 그 소동을 틈타 아가를 데려와 미스 제빈 2세라고 부른다.

 

 아가를 데려와 보호하고 사랑을 주는 틸로의 선택은 얼핏 기이하다. 그녀는 무사와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하자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게 자신의 복제물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책 515쪽)’는 이유로 낙태를 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미스 제빈 2세를 안고 모성애를 느낀다.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을 존재, 그런 확신이 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류. 바로 이 존재가 이 소설이 노래하는 희망이다.

 

 

 

 아기는 돌아온 미스 제빈이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게 아니라 세상을 돌아온. 미스 제빈 2. 그녀는 어른이 되면 셈을 치르고 빚을 갚을 터였다. 형세를 뒤집을 터였다.

 

288쪽 

 

 

 압도적인 우둔화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인도. 이 우둔화는 말로, 언어로 진행되고 그래서 안줌은 언어 밖의 세계에, 음부에, 묘지에 잔나트를 세우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몸은 이대로는 더 이상 생식할 수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안줌처럼, 후대에게 운명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낙태하는 틸로처럼 불구의 몸이다. 이대로 인도에게 희망이 있을까? 이제 인도는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의 무엇이 죽어야 하며, 그 죽음 후에는 무엇이 살게 되는지. 계급으로서의 인도, 종교로서의 인도, 성별로서의 인도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미래는 무엇인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 희망에 대한 작가의 염원이 미스 제닌 2세에게 실려 있다. 불구가 된 인도의 몸, 그 음부 잔나트라는 낙원에서 엄마가 될 수 없는 안줌과 엄마이기를 거부하는 틸로는 미스 제닌 2세를 키운다.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그곳에 새 생명이 깃든 일이다. 잔나트의 구성원들이 미스 제닌 2세를 촘촘하게 둘러싸는 소설의 결말에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작품 [지복의 성자]는 불구가 된 인도를 낱낱이 해부하고 해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는 초인의 노래다. 이전과 같지 않은 신인류, 고통에 밀려 언어 밖으로 추락한 진정한 미래, 신기루를 불러내는 아룬다티 로이. 이것이 소설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는다.

 


4. 2020 한국, 우리는 신인류가 될 수 있을까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간 행위 원리 중 하나로 ‘공감’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감정은 사회성과 합리성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는 공감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이 공감대를 느끼는 것을 아담 스미스는 인간성이라고 보았다. 아담 스미스의 시민사회 분석은 현대의 시민사회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타당성과 필요성과 연결된다. 소설이 선사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공감을 부른다. 이 문학적 상상력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과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우리 각자가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소설로부터 얻은 공감을 현실에 적용하여 체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책 90쪽)
 
 “다들 구경만 했어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중략) 난 아버지를 죽인 폭도의 일부였어요.” 사담이 말했다.
 웅성거리는 벽과 은밀한 지하 감옥이 있는 안줌의 비탄의 요새가 다시 그녀를 둘러싸고 솟아오르려 했다. (책 124쪽)

 

 

 

아룬다티 로이가 묘사하여 건네준 건 인도의 얼굴이나 거기에 한국의 현재가 비친다. 나와 정치적, 사상적 뜻이 다르면 원색적인 욕을 퍼부어도 마땅하고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이라는 말이 대기에 넓게 퍼져 있고 특정 종교단체가 기이할 정도로 미디어의 집중포화를 맞고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인도의 거기, 델리, 카슈미르, 구자라트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한다. 칼부림만 없을 뿐, 영혼들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지복의 성자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언어 밖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을까? 언어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들의 성지, 내가 지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는 이들의 시원, 편견과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이 같은 걸음으로 귀결하는 낙원으로 우리는 과연 다다를 수 있을까? TV와 온갖 미디어들이 합세하여 전염병처럼 혐오와 야만을 도처에서 증식시키며 우리를 갈라놓는 데, 우리가 과연 무얼 할 수 있냔 말이야.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책 487쪽 무사의 말 중에서

 

 

 인도의 계급과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우둔화’는 현재 이곳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한국을 제대로 보는 것. 자신을 향한 모욕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음에 영혼이 병들어 버린 안줌처럼, 아버지가 몰매를 맞는 동안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사담처럼, 우리 사회의 진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비탄-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보아야 할 때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때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이 비탄의 요새는 안줌과 사담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가둘 것이다.

 누군가는 목청에 날을 세운다. 이 피해에 대하여,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이 탓을 짊어져야 한다고.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비극에 대한 본질적이고 엄정한 대답이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책 428쪽

 

 

 우리 자신이 발견하고 목도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된다. 우리는 저항하고 비판해야 한다.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우리를 비탄의 요새나 폭동의 구름 속에 가두어두려는 우둔화에 대하여,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척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디어에 대하여, 우리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모든 것을 갉아 먹는 정치꾼들에 대하여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서로를 만나면서, 지금까지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밖의 세계로 함께 나갈 때에 여기 한국에서도 미스 제빈 2세들이 나타나리라.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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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택근무로 집에서 온 종일 지내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TV 시청이 잦아졌다. 어느 드라마 채널은 오래된 드라마들의 전편을 연이어 방영해 준다. 20여 년 전에 방영한 일일드라마를 보다가 고작 20년 만에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이 이렇게 많이 바뀌었다는 걸 깨닫고는 적잖게 놀랐다. 삐삐, 구식 전화기(당시에는 분명 예쁜 디자인이었을 게 분명한), 고작 27살을 노처녀라고 부르는 사람들, 한복을 입고 식탁에 4대가 앉아 떡국을 먹는 모습. 20년이 아니라 한 세기 전인 것처럼 저 때가 아득하게 멀리 보였다. 겨우 20년도 이 정도의 거리로 체감되는데, 반 세기는 대체 얼마나 더 먼 걸까.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된 지 반 세기나 지난 책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알았다.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를 지은 다카시마 젠야 저자 역시 30년 전에 고인이 되신 분이다. 출간된 시간으로 치자면 이 책은 찍어 나온지 하도 오래되어 중고시장에서조차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책인 셈이다. 그런 책이 ‘보이지 않는 손’의 진의眞意를 알아야 한다며 부활하여 독자 앞에 섰다.

 

 

 

 ‘애덤 스미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경제학자와 자유방임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자동으로 연상되기 쉽다. 애덤 스미스가 저술한 [국부론]은 근대사회와 자본주의를 공부할 때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18세기 저서들 중 하나다. 대충 여기까지만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걸 빌미로 무한 경쟁과 비열한 행태를 일삼는 현대 자본주의의 시원 격으로만 인식된다. 그가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 정치, 법의 세계와 관련한 사회철학원리인 [도덕감정론]을 먼저 발표하여 일약 주목을 받았고, 그가 주창한 경제적 이기성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리公利의 원리 안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은 웬만한 사람들에겐 생소할 것이다.

 

 

경제의 세계란 무법자의 세계도 아니며 내팽개쳐진 자유방임의 세계도 아니다. 스미스의 저술 어느 곳을 찾아봐도 자연적 자유나 자유경쟁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자유방임이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104쪽

 

 자본주의의 뿌리이자 아버지라고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진짜 목소리. 그것이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출간된 이유다.
 시간의 바다를 통과하여 애덤 스미스가 하고자 한 진짜 이야기를 건져 올리기 위해 다카시마 젠야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18세기 영국 그리고 유럽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을 설명한 후 애덤 스미스가 자라고 공부하고 활동했던 시기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그가 쓴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사회적, 정서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애덤 스미스의 저서들을 근거로 그의 사상의 면면, 시민사회의 에토스와 로고스, 공감의 논리 등을 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부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풀어놓는다. 이후 ‘보이지 않는 손’의 진짜 의미, 근대화와 스미스, 스미스를 비판했던 시각들 등을 설명하고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근거한 체제와 현대 등 저자 특유의 분석과 시각이 담긴 논설로 책을 마친다.

 

 물론 스미스는 이기심의 의의를 크게 강조했다. 또한 인간사회의 행복과 번영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 문화의 제 방면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인정될 때 보다 잘 실현된다고 열심히 설파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기심의 의의를 강조했다고 해서 그저 편협하게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인간을 생각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러한 인간을 모델로 상정한 것은 더욱 아니다.
7쪽
 
 이 책은 경제학자의 외연을 넘어 여태껏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회철학자, 도덕철학자, 사상가, 법률가의 얼굴을 가진 애덤 스미스가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시장경제,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미래에 대해 적지않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현대판 고전이라 할 수 있다.
264 역자 후기 중에서

 

 

 이 책에 대한 감탄을 말하기 전에 먼저 <역자 후기>를 읽은 후에 느꼈던 동질감부터 써야 겠다.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를 읽는 독자분들에게는 꼭 이 책의 맨 뒤에 역자 후기부터 읽고 이 책의 독서를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분하고 안타까웠는지, 역자 후기를 읽고 난 다음에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실패했고 지금 전 세계는 그 실패의 여파를 온몸으로 앓고 있다. (실패한 당사자들-정치가들, 경제이론가들, 거대 자본가와 대형 금융회사-이 실패의 여파를 앓아야 하는데 왜 시장 참여자라는 이유로 이것을 개미들이 앓아야 하는지 정말 의문이다.) 조타수가 되어 방향을 돌릴 힘이 없다면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 실패했는지, 지난 100~200년 동안 신처럼 모셨던 자본주의 이론이 어디가 불완전한지는 알아야 밥이라도 넘기겠다. (그게 아니면 분해서 어쩌리...) 그런 분함의 살풀이를 이 책이 해주는 셈이다. 자본주의라는 나무를 배양한 그 토양에 실은 정의가 있었고, 윤리(에토스)와 논리(로고스)와 덕virtue이 있었다는, 역사 너머로부터 오는 쟁쟁한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그 책으로부터 얻은 영감과 지식 덕분에 필연적으로 읽고 싶어지는 여러 개의 책들이 생긴다. 오늘은 [도덕감정론]을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것 하나 찾아 읽는다고 당장 오늘 내 경제사정에 어떤 호재가 생기진 않는다. 하지만 씨를 심을 때의 마음으로 책을 찾아간다. 흙 속에 씨를 심고 자라기를 기다리며 가꾸고 돌보았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그 씨가 주는 응답을 얻듯이,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오늘날에, 어떤 신조를 가지고, 어떤 눈을 가지고 가야할지를 살피는 이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런 책을 읽고 ‘유덕한 경제인’의 길을 함께 걷는다면 간다면 애덤 스미스가 기대한 시민사회의 번영은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날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은 경제학자의 외연을 넘어 여태껏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회철학자, 도덕철학자, 사상가, 법률가의 얼굴을 가진 애덤 스미스가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시장경제,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미래에 대해 적지않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현대판 고전이라 할 수 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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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 - 나의 삶이 너희들과 닮았다 한쪽 다리가 조금 ‘짧은’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한 ‘길고 긴 동행’, 그 놀라운 기적
황정미 지음 / 치읓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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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아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동일시되는 6년의 특별한 경험이 우선인 것은 맞다.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 즉 어른의 무게를 이해하는. 그래서 글을 쓰는 것도 맞다
 그런데,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과거를 비워내기도 했고, 그래서 아픔을 승화하고, 고개 숙인 아이들의 삶을 명료화하면서 아픔의 무게를 쪼개는 그 과정이 결국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91-292쪽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가장으로 살아오기가 얼마나 고되었을까. 삶이 저마다의 무게만큼 고된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나, 몇 가지 유형의 삶의 무게를 한꺼번에 감당하게 될 때, 그런 생 아래 깔린 운명이란 대체 얼마나 버겁고 숨막힐지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를 쓴 황정미 저자는 30년 간 아이들의 과외 선생님으로 살아왔다. 2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다리를 가진 그녀는 평생 목발을 짚고 일어서거나 네 발로 기어야 했다. 저자가 성장기를 거쳤던 1970~80년에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개인적 인식은 무척이나 냉혹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수용되지 못한 그녀의 아픔은 다리만 짧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부모와 그녀 사이 사랑의 거리, 마음의 거리마저 짧았다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종교를 가지게 되고 그토록 신에게 의지하며 결핍과 절망, 자기혐오와 외로움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바랐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결혼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과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저자는 그 이후 3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아이들, 고개 숙인 아이들, 상처 받은 영혼을 꽁꽁 감추고 무표정이나 산만함이나 불안감이나 외설스런 욕으로 위장하고 그녀를 만나러 온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와 가정에서 늘 고개 숙이며 살아야했던 자신과 같은 표정의 아이들을 거울처럼 마주했을 때, 그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성적 향상과 학습 생활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아이들의 마음 속으로, 너덜너덜해진 아이들의 감정의 밑바닥으로 함께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을 공부했다. 무엇보다도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집중했다.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은 아이들의 눈물을 듣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아이들의 아픔을 발견했다. 이 책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는 그런 저자와 아이들의 솔직한 시간을 담은 심리 에세이다.

 

 

 이 책은 심리 분석이나 용어 설명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우리 현실의 눈높이로 내려온 책이다. 사람의 영혼이 왜,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상처 받는지 그리고 그 상처는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들고 그로 인하여 관계는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이 책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는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다. 저자는 실제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과 나눈 대화와 상담, 그 사이에 진행된 일들을 상세히 기술하여 상처를 치유하는 개인과 가정이라는 결과를 수채화처럼 그려 보인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저자는 상담을 녹음한 내용을 수없이 다시 듣고, 수년간 기록해온 자신의 과외 및 상담 기록들을 들추고 확인하며 원고를 다듬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교사로서, 상담사로서의 자신 그리고 학생과 그 부모의 모습이 사실과 달리 왜곡되게 전달되지 않도록 기울인 세심한 노력이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 전반에 무척이나 잘 드러난다. 


 거기에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저자의 태도는 너무나 솔직하다. 꾸밈이 없다. 저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도, 귓가에 저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 저자는 자신이 실수했던 상황, 여전히 타인의 눈을 신경 쓰곤 했던 자신의 약함, 선생과 상담사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나 그 속에 상존하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저자는 진솔하게 털어 놓는다.

 

 

 

 이미 책이 출간되어 나왔지만, 뒤늦게 이 책에 부제를 더한다면 ‘황제들의 치유기’라고 하고 싶다. 황정미(저자) 선생님의 제자를 약칭해서 ‘황제’라고 부르는 그녀의 제자들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이 책은 선생님과 그녀를 만난 제자들이 함께 치유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자기 상처가 너무나 아파서, 공기 같은 소리들에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영혼을 바싹 부둥켜 안은 채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치유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심리와 과외를 병행한 6년 동안 저자는 학생들의 상처 뿐 아니라 자신의 아픔 나아가 학부모들의 고통까지 들여다보았고, 그 내밀한 대화와 관계의 재건을 통하여 그들 대부분은 크거나 작게 ‘힐링’했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치유기라고 해야겠다. 젊은 시절의 뜨거운 신앙조차 그녀의 상처를 달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 책에 쓴 간증에는 학생들이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통하여 그녀 역시 함께 성장하고 변화했음이, 그 모든 과정이 신이 그에게 선사한 길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신성한 소명 의식과 절박한 치유기가 교차하는 책이라 이 책의 마지막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감동도 남다르다.

 

 저자는 앞으로 상담 카페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다리가 불편해서 거동 범위가 적기에, 언제든지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게 카페를 열고 내담자들을 기다릴 거라고 한다. 자기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들과 이미 다 자랐지만 여전히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어른이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저자의 아름다운 마음을 응원한다. 그녀가 새로 여는 상담 카페에 그녀와의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꼭 찾아가게 되기를 기도한다. 

 

 

 

고개 숙인 아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동일시되는 6년의 특별한 경험이 우선인 것은 맞다.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 즉 어른의 무게를 이해하는. 그래서 글을 쓰는 것도 맞다
그런데,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과거를 비워내기도 했고, 그래서 아픔을 승화하고, 고개 숙인 아이들의 삶을 명료화하면서 아픔의 무게를 쪼개는 그 과정이 결국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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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사람 - 나의 모든 이유가 되어 준 당신들의 이야기
김달님 지음 / 어떤책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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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편이라는 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내가 아무렇게나 투정을 부리고 못난 얼굴로 칭얼거려도 받아주는 내 편은 내가 실수를 하고 사고를 쳐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지탱해준다.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빚지기 싫어하는 야멸찬 내가, 주시면 주시는 대로 뭐든지 다 넙죽 받을 수 있는 것도 그 분들이 내 편이기 때문이다.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나의 두 사람. 내가 여러 번의 실패와 자괴감의 진창에서 뒹굴지라도 끝내 불행해지지 않는 이유가 되어주는 내 편,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라도 개인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공공의 기록으로 확장된다. ‘아빠, 엄마’라고 적힌 글자가 눈동자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 대부분은 막 지은 밥내음처럼 따듯한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버리는 법이니까.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에 수련회를 가면 마지막날 밤 꼭 캠프파이어라는 걸 했다. 운동장 가운데에 장작불 피워놓고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촛불을 하나씩 켠다. 그리곤 엄마 얼굴 아빠 얼굴 떠올려보는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엄마가 보고싶다며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으면 그 뒤로 릴레이하듯 아이들은 순식간에 눈물바람이 된다.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맞슴돠!”를 내지르는 군인 아저씨들의 <우정의 무대>를 우리는 초등학교 수련회 때 예행연습해보는 셈이다. 실제로 부모님 얼굴을 마주보면 서는 짜증을 부리거나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주제에, 조용한 데에 홀로 앉아 부모님을 떠올리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세상에 부모 심정 다 똑같다면, 세상에 자식 마음도 다 비슷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독립을 하고 그러면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다가 문득 우리는 화들짝 놀란다. 나는 자라고 어른이 되고 성숙해지는 동안 부모님은 늙어가신다는 사실에 불에 데인 듯 정신이 들고 그제서야 가늠해본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무심無心은 발이 빠르고 애틋함은 엉덩이가 무겁다. ‘부모님께 잘해야지’, 라는 생각은 자주 무뚝뚝함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뒤늦게 부모님의 세월을 헤아리며 찾아오는 애틋함은 명치 깊은 곳에 눌러앉아 후회와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것들을 자꾸 피워 올린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상처를 준 것, 내가 그 상처에 대해 사과를 하기 전에 이미 용서를 받은 것.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더 슬픈걸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내 부모라는 두 사람을 떠올릴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이유가 어느 쪽 때문인지 아마 나는 평생 모를 것 같다. 내 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되어 나를 닮은 아이에게서 내 부모의 얼굴을 보고 문득 울게 되는 시간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알게 되겠지, 싶다.

 

 

 

 김달님 작가는 1939년생 김홍무 씨, 1940년생 송희섭 씨의 손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가 되기에는 너무 일러, 88년에 태어난 달님 씨는 조부모의 품에서 생을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 배를 타거나 공사장을 다니며 가정을 부양하는 할아버지. 세상에 자기 편이 없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에게 달님씨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자 든든한 자기 편이었고, 아들 딸이 모두 똑똑한 것이 평생의 자랑이었던 할아버지에게 그중에 제일 똑똑한 달님씨는 언젠가 꼭 글 쓰는 사람이 될, 제일 든든한 자식이었다.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부모님과 살았기에 추억과 고민, 불행과 행복도 여느 가정과는 조금 달랐다. [나의 두 사람]은 그 ‘조금’ 만큼의 다름에 채색된 봄나물, 제철 채소, 핫핑크 스웨터, 새 스포츠브라, 직접 지은 벽돌집의의 냄새가 난다. 자신과 조부모 사이에 놓인 50년을 조급해하던 김달님 작가는, 자신의 평생을 마련해준 늙은 부모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돌이켜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상하게 그들 앞에선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자식이 된다. 그 두 마디를 제대로 전하지 못해서 굳이 긴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그들이 나의 사진을 남겨 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나의 몫이라는 걸. 더 늦기 전에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책 217쪽

 

 [나의 두 사람]은 경남 창원에서 사회적기업 공공미디어 ‘단잠’의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달님 작가가 2017년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한 글이다. 이 글은 ‘브런치북 프로젝트’ 금상을 수상하고 책으로 나왔다.
 작가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처녀와 총각으로 만났던 오래전의 언젠가, 유년과 소녀 시절을 거치며 예민한 감수성으로 진통했던 그때와 저자가 독립한 이후 창원과 고향집에 차곡차곡 쌓인 애틋함과 그리움들이 에세이로 기록되어 잔잔히 펼쳐진다. 한 장 씩, 한 꼭지씩 넘어갈 때마다 가슴에 그 고향집의 노란 불빛이 환하게 밝아진다. 저자가 성장하는 동안과 마침내 어른이 된 후에도 고추장에 절인 장아찌처럼, 짠하고 구수한 사랑을 그치지 않는 두 사람의 온기 덕분이다.

 

 

 한 인간을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는 건 위대한 일이다. 이 위대한 일은 그치지 않는 사랑 없이는 안 된다. 사랑이라는 작은 단어로 표현되는 서럽고 고된 밥벌이와 궂은 살림과 온갖 수고로움을 자기 몫으로 삼키는 존재들이 없이는 결코 이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뭐 어디 멀리 있거나, 대단히 별건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김치국밥 한 사발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랑으로 충분하다. 


 슬프거나 때로 힘들 수는 있어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다. 형편이 어려워서, 서로의 속사정이 달라서 우리가 잠간은 슬퍼지기도 하고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미, 서로가 서로에게 준 삶의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의미는 우리가 함께 눕고 먹고 서로를 보면서 울고 웃었던 시간만큼 켜켜이 채워져, 그날이 그리운 어느 날 추억을 돌이킬 때 고향 벽돌집처럼 노란 전등을 밝히고 거기 있다.

 

 

  [나의 두 사람]은 참 좋은 에세이다. 늙은 부모를 간직하려는 자식의 애틋한 시선에 이끌리면 나 역시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게 된다. 수련회날 마지막 밤의 그 장작불을, 별자리처럼 동그랗던 촛불을 여기다 피워놨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서 오늘도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또 하루가 간다, 다시 오지 않을 너머로. 세상 가장 든든한 내 편인 두 사람의 기록을 글로 남길 수 있는 건, 저자의 말처럼 다행이고 참 다행한 일이다. 이렇게 다행한 기록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상하게 그들 앞에선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자식이 된다. 그 두 마디를 제대로 전하지 못해서 굳이 긴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그들이 나의 사진을 남겨 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나의 몫이라는 걸. 더 늦기 전에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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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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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심리학]을 쓴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사람에겐 누구나 이기적 편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기적 편향이란 잠재적 편견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고하는 습관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꽤 나쁘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라 믿고 자신의 약점이나 악한 면은 외면하거나 무시하여 자신을 미화한다. 은희경 작가는 신작 [빛의 과거]에서 이기적 편향을 중력 삼아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는 별들의 세계, 우리라는 우주를 그렸다.

 

 

  [빛의 과거]는 1977년 청파동 여대의 기숙사 풍경과 그때 함께 생활했던 대학 동문들의 노년을 그린 소설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청춘들이 대학가에서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기숙사 안은 견고했다. 또래의 다른 여자들이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을 때 대학에 입학하여 화장이니 옷차림, 민주주의나 성평등을 관심사로 삼았던 그들은 진정 공주들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 뜨겁고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던 그들은 대학 밖의 혼란한 상황엔 적당히 무심한 상태로 남편감을 찾기 위한 데이트나 졸업 후 진로에 매달렸다.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 최성옥과 절친한 송선미와 그녀의 룸메이트인 곽주아, 이재숙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1학년 김유경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경은 긴장을 하면 말을 더듬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자기 감정과 욕구에 충실해 본 적이 없는 유경의 얌전함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이기적 편향을 신랄하게 꿰뚫어 본 또 다른 공주가 있었으니, 바로 김희진이다.
 희진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인물들을 모티프로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쓴다. 유경은 희진이 쓴 첫 작품을 뒤늦게 읽어보며 자신의 청춘을 반추하는데, 희진이 작품 속에 그린 기숙사 인물들과 유경이 기억하는 인물들은 마치 다른 인물인 듯 너무나 다르다. 유경은 시니컬하고 욕망에 충실한 희진의 눈에 비친 그때의 자신을 회상하며  대학교 1학년이었던 그때로부터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해체해 본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335쪽
 
 이기적 편향은 어쩌면 생존의 본능과 연결되는 기능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약함과 악함으로부터 가장 상처 받는 건 자기 자신이니 우리는 어떻게든 이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유경은 첫사랑에 빠져 있던 그때를 두고 ‘자신이 가장 예뻤던 때’라고 회상한다. 그토록 빛이 났던 그 시절이건만 그때 자신의 행동과 내렸던 선택,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을 40년 뒤에 뒤돌아보면서 비로소 유경은 발견한다. 빛의 과거, 빛의 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자신의 약함과 악함으로부터 도망쳤던 유경과 그런 타자들을 비웃으며 이용하는 희진, 그리고 빛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한계와 타성 속에서 억눌려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공주들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별이 되어 그 빛만을 밤하늘에 남겨두었다.

 

 독자는 각양의 공주들에게서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지인의 얼굴을 본다. 빛을 받아 하얗게 도드라지는 부분만을 나의 삶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건 이 책의 공주들 뿐 아니라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빛의 그림자까지 들여다보며 살기에 시간은 너무나 빠르고 우리의 정신은 그리 강하지 못하니까. 이기적 편향이란 사람이 자신의 약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쌓게 되는 성곽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희진이 그토록 신랄하게 조롱했던 공주들을 변호해본다. 더불어 나라는 빛의 과거 속에, 약하고 악한 나를 간직하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변호도 덧붙인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 정도의 변호가 불가피한 사람들이니 서로서로 봐주자는 긍휼한 마음으로.

 

 

 은희경 소설가는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새의 선물](1996년 출간)의 에필로그에 이런 말을 썼다.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계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다 자기 빛에 눈이 멀어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허세, 욕망과 이기심을 지니고 살아간다. 소설이라는 현미경으로 해체해 보면 우리의 실상은 다 비슷비슷하게 누추하고 민망하고 그런 법이다. 그러니 관계가 조각나고 삶이 섬처럼 떠돌지 않으려면 우리는 적당히 상처를 덮어가야 한다.
 인간에 대한 환상과 긍정을 부수는 은희경 소설의 마력은 이 작품 [빛의 과거]에서도 여전하다. 환상과 긍정이 부서진 후에는 그럼 무엇이 남는가? 이 책의 결말에서 유경은 다 부서진 과거의 잔해를 저벅 저벅 밟고서도 희진을 좋아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 관계의 궤도를 유지한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은희경 소설의 냉소 역시 여전하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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