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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사회심리학]을 쓴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사람에겐 누구나 이기적 편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기적 편향이란 잠재적 편견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고하는 습관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꽤 나쁘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라 믿고 자신의 약점이나 악한 면은 외면하거나 무시하여 자신을 미화한다. 은희경 작가는 신작 [빛의 과거]에서 이기적 편향을 중력 삼아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는 별들의 세계, 우리라는 우주를 그렸다.
[빛의 과거]는 1977년 청파동 여대의 기숙사 풍경과 그때 함께 생활했던 대학 동문들의 노년을 그린 소설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청춘들이 대학가에서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기숙사 안은 견고했다. 또래의 다른 여자들이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을 때 대학에 입학하여 화장이니 옷차림, 민주주의나 성평등을 관심사로 삼았던 그들은 진정 공주들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 뜨겁고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던 그들은 대학 밖의 혼란한 상황엔 적당히 무심한 상태로 남편감을 찾기 위한 데이트나 졸업 후 진로에 매달렸다.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 최성옥과 절친한 송선미와 그녀의 룸메이트인 곽주아, 이재숙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1학년 김유경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경은 긴장을 하면 말을 더듬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자기 감정과 욕구에 충실해 본 적이 없는 유경의 얌전함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이기적 편향을 신랄하게 꿰뚫어 본 또 다른 공주가 있었으니, 바로 김희진이다.
희진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인물들을 모티프로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쓴다. 유경은 희진이 쓴 첫 작품을 뒤늦게 읽어보며 자신의 청춘을 반추하는데, 희진이 작품 속에 그린 기숙사 인물들과 유경이 기억하는 인물들은 마치 다른 인물인 듯 너무나 다르다. 유경은 시니컬하고 욕망에 충실한 희진의 눈에 비친 그때의 자신을 회상하며 대학교 1학년이었던 그때로부터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해체해 본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335쪽
이기적 편향은 어쩌면 생존의 본능과 연결되는 기능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약함과 악함으로부터 가장 상처 받는 건 자기 자신이니 우리는 어떻게든 이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유경은 첫사랑에 빠져 있던 그때를 두고 ‘자신이 가장 예뻤던 때’라고 회상한다. 그토록 빛이 났던 그 시절이건만 그때 자신의 행동과 내렸던 선택,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을 40년 뒤에 뒤돌아보면서 비로소 유경은 발견한다. 빛의 과거, 빛의 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자신의 약함과 악함으로부터 도망쳤던 유경과 그런 타자들을 비웃으며 이용하는 희진, 그리고 빛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한계와 타성 속에서 억눌려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공주들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별이 되어 그 빛만을 밤하늘에 남겨두었다.
독자는 각양의 공주들에게서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지인의 얼굴을 본다. 빛을 받아 하얗게 도드라지는 부분만을 나의 삶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건 이 책의 공주들 뿐 아니라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빛의 그림자까지 들여다보며 살기에 시간은 너무나 빠르고 우리의 정신은 그리 강하지 못하니까. 이기적 편향이란 사람이 자신의 약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쌓게 되는 성곽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희진이 그토록 신랄하게 조롱했던 공주들을 변호해본다. 더불어 나라는 빛의 과거 속에, 약하고 악한 나를 간직하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변호도 덧붙인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 정도의 변호가 불가피한 사람들이니 서로서로 봐주자는 긍휼한 마음으로.
은희경 소설가는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새의 선물](1996년 출간)의 에필로그에 이런 말을 썼다.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계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다 자기 빛에 눈이 멀어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허세, 욕망과 이기심을 지니고 살아간다. 소설이라는 현미경으로 해체해 보면 우리의 실상은 다 비슷비슷하게 누추하고 민망하고 그런 법이다. 그러니 관계가 조각나고 삶이 섬처럼 떠돌지 않으려면 우리는 적당히 상처를 덮어가야 한다.
인간에 대한 환상과 긍정을 부수는 은희경 소설의 마력은 이 작품 [빛의 과거]에서도 여전하다. 환상과 긍정이 부서진 후에는 그럼 무엇이 남는가? 이 책의 결말에서 유경은 다 부서진 과거의 잔해를 저벅 저벅 밟고서도 희진을 좋아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 관계의 궤도를 유지한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은희경 소설의 냉소 역시 여전하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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