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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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전염 사태가 길어지고 있다. 미국의 확진자 수는 조만간 2만 명을 돌파할 듯 보이며 이탈리아의 사망자 수는 1만 2천명을 넘어섰다. 각국이 전염병 관리를 위해 외국인들의 유입을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그동안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었던 지구촌 시민들은 순식간에 각방을 쓰는 소원한 사이가 됐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면서 정작 음식과 생필품이 간절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해 SNS에 눈물의 호소를 올리는 풍경도 빚어졌다. 마치 지구별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가 되어가는 것 같은 요즘이다.

 

누군가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 이 시기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그동안 사는 일에 바빠 놓쳤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 참다운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도 한다. 코로나 19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의미에서의 쉼표를 선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슬로우 라이프, 힐링의 시간,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는 쉼표의 기회는 먹고 사는 형편이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 정부가 긴급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소상공인 대상으로 초저금리 대출을 열겠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각 지역의 주민센터와 은행 등에는 문의가 빗발친다. 어디 문의 뿐인가. 어느 은행에는 대출을 상담 혹은 신청하기 위하여 한걸음에 달려온 상인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줄을 섰음에도 상담의 기회조차 없었다고 토로하는 상인들이 적지 않다. 지금 대출을 받아야 가게가 견디는데 대출이 2달 후에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 쉬는 상인들도 있다. 코로나19가 쉼표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치 법원에서 날아온 차압 딱지처럼 원치 않는 마침표를 받게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난데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기약 없는 절망의 생활을 견뎌야 했던 저자의 기록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로 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 3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 후 기적적으로 생존한 그는 수용소에서 그가 발견했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이룬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빅터 프랭클 박사가 '로고테라피' 기법에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쓴 책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수용소 생활의 기록, 로고테라피 설명, '비극 속에서의 낙관'의 실제 의미와 역할.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생존기 정도로만 이 책이 읽힐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책이다. 1984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가 쓴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 9-10쪽

 

 

생의 어떤 순간에라도 나의 삶은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삶의 주체가 되는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심지에 따라 지옥의 한가운데에서조차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체험기를 통하여, 자신과 자신 주변의 수용소 사람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증명해낸다. 삶을 움직이는 것은 모호한 행복이나 가치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라는 사실을.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발간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 조명 받아야 한다. '실존적 공허' 다른 말로 하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권태와 허무를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세대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 실존적 공허의 문제와 해법을 아주 명확하게 짚어낸다. 코로나19 블루를 호소하는 시민들을 위하여 여러 문화예술 기관에서는 집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문화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간서치의 입장에서는 이 책이야말로 코로나19 블루를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보인다.

 

단순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 블루 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 여러 문화를 통하여 자리 잡은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경종을 울린다. 유발 하라리니 칼 세이건이니 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모두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우연에 의하여 나타난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은 너무나 위험하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 인식이 가지고있는 치명적인 신경증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책 209-210쪽

 

 

우리나라에서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추앙받는 것에 비해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이 된 듯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로고테라피'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때가 아닐까.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타계했지만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책 211쪽)"는 그의 전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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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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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나라 없는 나라]를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때의 감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이광재의 수상소감까지도 너무나 멋졌다. 전봉준에 대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이렇게 깊은 설득력과 대단한 박진감, 무게감을 가진 소설을 또 볼 수 있을까. 이 작품 덕분에 ‘혼불문학상’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한국의 역사를 참신하고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재탄생시키는 소설. 그래서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뿌리의 계승이라는 아이러니를 조화롭게 이루는 작품들이 ‘혼불문학상’의 특징이라는 것.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칼과 혀]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도 참 좋다.

 혀는 피로 되어 있다. 혀는 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혀는 피를 맛보기 원하는지 모른다. 피는 그것을 대하는 자, 구하는 자의 심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는 요리의 재료이기도 하고, 생명력 그 자체이기도 하고,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리는 피를 다룬다. 모든 재료는 피가 있다. 어떤 재료에는 그것이 숨의 형태로, 어떤 재료 에는 그것이 눈의 형태로. 그래서 첸의 아버지 왕테판은 첸에게 요리를 가르칠 때 ‘재료의 눈을 보고 먼저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고, 그렇게 제압한 후에는 재료를 섬세하게 다루어 새롭게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요리가 피를 제압하는 일이라면 전쟁 역시 그렇다. 그러나 전쟁은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서 제압한다. 생명을 되살리는 요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이렇게 부딪힌다. [칼과 혀]는 전쟁에 대항하는 요리, 권력에 맞서는 미학에 대하여 그린 소설이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첸은 요리사다. 아버지 왕체판으로부터 물려 받은 거대한 도마를 사용하여 깊이 있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요리 실력을 무기로 첸은 관동군 사령관 오토조에게 접근하여 일본군인들을 독살하고 일본군 점령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오토조는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자나깨나 문학과 요리에만 관심을 두고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미식가다. 하루라도 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을 뿐, 일본의 승패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오토조는 첸의 요리를 즐기기 위하여 그를 지배하려 하여, 첸은 오토조를 요리로 길들여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첸은 오토조를 비롯한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음식에 독을 타 독살을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오토조는 첸을 죽이는 대신 혀 절반을 자르고 부엌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요리만 하는 노예로 삼는다.
 첸에게는 길순이라는 아내가 있다. 조선 여인 길순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생존자다. 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첸의 아내가 되었다. 길순의 오빠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길순에게 오토조를 암살하고 그녀 자신도 순국하라고 강요한다. 길순은 오빠의 명령대로 오토조의 위안부가 되지만 오토조의 목을 찌르는 대신 그의 혀 절반을 깨물어 잘라내버리고 도망친다.
 본토에 원폭을 당하고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자 관동군 전체가 흔들린다. 더구나 소비에트 군이 바로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오토조는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수집한 문화재들을 함께 옮기려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오토조는 중국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첸은 그런 오토조와 같은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첸은 오토조가 도망치도록 돕지만 오토조는 길순의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투쟁했던 근대사를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이 책의 결말을 읽었다.
 이 작품 속에서 도드라지는 건 첸과 오토조의 충돌이다. 첸의 도마는 육중하고 오토조의 혀는 날렵하다. 둘은 시종일관 ‘요리’를 매개로 부딪힌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립의 끝에 둘은 ‘삶의 고통’이라는 인류 공통의 연민을 공유하면서 놀라운 화해에 이른다. 오토조는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찌질한 인물인데 좀처럼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는 오토조가 가진 결핍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첸과 오토조의 화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첸과 오토조의 화해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전의 다른 역사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관점이 새로운 역사소설로 말미암아 독자가 과거의 빚, 과거의 사연에서 벗어나 미래를 보게 만든다. 

 


 길순의 등장과 영향력이 이 작품에서 첸과 오토조에 비해 약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길순은 칼과 혀 이 둘 중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다. 길순은 칼은 썩히고 혀는 잘라내는 인물이다. 대의라는 허울을 빌미로 전쟁을 감행하고, 약자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칼’을 거부하는 여성이며, 피를 탐하고 생명을 지배하려는 혀를 잘라내버리는 인물이다. 길순은 작품 속에서 고요한 폭풍의 눈으로 자리한다. 첸와 오토조의 극적인 화해의 배경에 길순이 있었고, 오토조의 죽음에도 길순이 있었다. 살육과 폭력의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풀꽃으로 계속 살아가고 부활하듯이.

 요즘같이 동아시아 관계가 시끄럽고 위태로운 시절에 이런 작품이 건설적인 미래 설계를 시작하는 작은 벽돌이 되면 좋겠다.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때로 소설은 진짜 현실보다 강렬하게 현재를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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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비망록 -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 개정판
양창석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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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 제국 시절에 세워졌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겼을 때는 승리의 개선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대결의 문이자 서독과 동독의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저자는 전쟁과 이념의 갈등의 역사를 지나 화해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를 이 책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1989년 5월 2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독일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공산정권의 붕괴, 최초의 자유총선거, 통일조약 등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공산정권과 민주정권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은 통일에 이르렀다. 독일 자국민들조차 대단한 역사였다고 회상하는 이 사건은 타국인 내가 보기에, 더구나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의 한 사람이 보기에 ‘기적’ 그 자체다. 지금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분단 70년, 이미 북한과 남한의 시민 정서가 이렇게나 다른데 과연 통일이 가능할까? 단절된 두 개의 사회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이런 우문에 대한 현답이라고 할만하다. 이 책을 쓴 양창석 저자는 28년 동안 통일부에서 근무했다. 특히 2년 반 동안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통일연구관으로, 그 후에는 독일통일연구단장으로 일했다. 이런 경험을 집대성하여 저자는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으로 나온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원고를 다듬으면서 저자는 독일 통일 주역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증언들과 통일 과정에 참여한 국가 수반들의 회고담을 함께 원고에 반영했다고 한다.

 

 증언, 회고담과 함께 현장의 생생한 사진들이 실려 있는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통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나라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인 모두에게 ‘통일’은 현실이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한반도 통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가 2020년인 올해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에게 ‘통일’은 과거도, 영영 오지 않을 미래도 아닌 현재상황이라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동독 주민들이다.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흡수통일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동독 주민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다. 통일의 주체를 서독으로 보는 것이다.
7쪽

 

 그는 통제와 감시가 있었지만 100% 절대적인 통제는 불가능했다면서 조직 활동은 통제했지만 개인의 사고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비록 정치집단을 조직할 수는 없었으나 친구들끼리 토론 모임은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모임이 1989년 데모 확산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45쪽 

 

 

 독일 통일이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이 책이 짚어준다. 통일의 주역은 정부나,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아니라 시민사회라는 점이다. 물론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정부와 국제사회의 분위기, 주변국의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소위 말해 ‘때’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대로 이 때 즉,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절대 오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대박적 통일을 이루려면 국민 개개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독일 통일이라는 우수한 선례를 배우고, 현재의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읽고 개개인이 ‘통일’에 가장 적합한 사고가 무엇인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정치나 국제 관계를 공부하는 대학생뿐 아니라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통일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이 형성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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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작가 - 우리가 사랑했던
조성일 지음 / 지식여행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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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작품 외에 어떤 활동이나 업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이 작가로서의 얼굴을 지어주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고한 작가들을 떠올릴 때 그의 얼굴이나 그의 생활이나 그의 습관 같은 인간적인 어떤 모습이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의 제목으로 혹은 그 속에 담긴 한 구절로 그들을 떠올린다. 


 서평 전문지인 <삶과책>에 연재되었던 ‘그리운 그 작가’시리즈가 책 [그리운 그 작가]가 되어 나왔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동화 작가 등 작고한 한국작가 28인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간 한국문학계의 별들. 그들의 얼굴과 생활, 그들이 살다간 모습은 어떠했고 그것이 그들이 작품과는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차분한 어조로 이 책 [그리운 그 작가]는 전한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는 참으로 고단하고 위태로웠다. 여러 사회학자나 연구자 혹은 의사들이 한국이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집단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음을 수년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이 트라우마에 요동치는 한민족의 정서를 보듬고 지탱하고 다져온 것은 문학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는 시와 소설, 동화와 수필 등 한국의 지난 역사 속에서 빛을 냈던 이 작가들의 작품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운 그 작가]는 그런 작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려준다. 박경리, 이효석, 백석, 이상 등 중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아는 작가들뿐 아니라 권정생, 마해송, 홍명희 등 한국 문학과 문학사에 낯선 사람에게는 생소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모두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최명희 작가님의 얼굴을 몰랐는데 이 책에서 보고는 너무 미인이시라 놀랐다든가, 황순원 작가님이 무척이나 심지가 굳은 선비이셨구나 싶어 <소나기>가 더욱 좋아졌다든가, 이런 감상들이 28개의 꼭지를 읽을 때마다 이어진다. 작가들의 생애를 반추하면서 그들의 육필원고나 생가 등 사진 자료들도 적지 않게 수록하여 읽는 재미가 더하다. 신문용이었던 원고를 서적용으로 다듬어 내셨다는 저자의 수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한국 문학사의 세세한 맥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한국 문학계의 바탕이 된 문학계의 별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작품이 어떤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 책 [그리운 그 작가]를 통해서 알게 된다. 애초에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작고한 작가들을 추억하고 그리며 그들을 떠올려보는 데에 있었는데, 책이 되어 나온 지금 이 책은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잔잔한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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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
강혜은 지음 / 하영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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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학이 연기되면서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들어하실 분들은 유아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되면 그냥 저들끼리 노니까 돌봐주거나 간섭할 일이 적어 보이는데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은 경우가 좀 다르다. 일단 손이 많이 간다. 예전 회사 선배가 대전에서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는데 요즘 올라오는 언니의 인스타를 보면 대부분이 고된 육아에 대한 하소연이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오밤중 놀이터에서 남매가 뛰노는 사진을 찍어 올린 언니의 인스타에는 #집에들어갈생각이없음주의 #낮에는어떻게참았니 #그래놀아라놀아 같은 태그가 붙어있다. 나야 구경하는 입장이니 웃음이 나지만 현실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부모님들의 입장에서는 차마 울 수는 없기에 나는 쓴웃음으로 이 시기를 지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개학까지는 열흘도 더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영 잡히지 않고 있어 온라인 개학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를 보내기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안 보내자니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모님들의 한숨을 덜기 위한 놀이 책이 있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의 관심을 창의적인 놀이로 돌려보자는 취지의 놀이 가이드책이다. 재작년부터 교육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난독증, 낮은 문해력이다. 글보다 영상에, 사람보다 스마트폰에 친화적인 세대일수록 난독증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경우 문해력 수준이 심각하게 낮다. 너무 어려서부터 스마트폰에 몰입한 탓이다. 이미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고발된 이 위험한 현상에 뚜렷한 해법은 없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점진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개선이 필요할 뿐이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의 일환이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를 지은 강혜은 저자는 방송 작가로, 자유기고가로 일해왔다. 아들을 기르면서 그는 ‘아이들은 차가운 스마트폰이 아닌 사람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놀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우리 시대 아이들이 진짜 놀이를 즐기기를 바라며 이 책을 엮었다.

 

 책은 재활용품으로 새로운 걸 만드는 놀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놀이, 온몸으로 체험하는 놀이, 생활 소품들을 직접 만들어보는 놀이, 책과 연계한 놀이 등 다섯 개의 파트로 구성했다. 하루종일 스마트폰이나 TV, 컴퓨터 모니터 등으로 영상을 보는 것에만 꽂혀 있는 아이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거나 몸으로 뒹굴거나 상상해볼 수 있는 다채로운 놀이 방법들이다. 별다른 도구 없이도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만들기와 놀이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들끼리 직접 해볼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대부분 부모와 같이 하는 놀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품이 들어가니 힘이 들 수도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좋다. 엄마나 아빠와 같은 걸 하면서 느끼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유대감은 이런 때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엄마와 같이 지점토로 꾸몄던 보석함, 아빠와 함께 만들었던 풍차나 어린이용 의자 같은 것들. 그때 부모님과 같이 만들었던 장난감이나 소품들은 이미 부서지거나 망가져서 버린 지 오래지만 기억들은 힘이 세다. 굉장히 오랫동안 그리고 꽤 자주,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이 소환된다. 어릴 적 놀이의 추억은 아주 사소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런 사소한 시간들의 가치는 성인이 된 후에 비로소 빛이 난다. 스마트폰에게 붙들린 아이들이 이 책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에 실린 놀이들로 빛이 나는 기억들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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