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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기를 두던 중이다. 몹시 진지한 표정의 상대는 나름 무척이나 예리한 계산을 펴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장기판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차를 대각선 다섯 칸 앞으로 움직이더니 '장이야!' 외친다. 득의양양한 표정. 아놔..... 이런 경우 보통 사람들은 '야, 차를 그렇게 움직이면 어떡해.'라며 다소 황당하고 불쾌한 낯을 하거나 '이건 뭐, 장기의 장도 모르는 녀석일세.'하며 피식 웃을터다. 그러나 가사사기의 중고매장 부지점장으로 있는 히구라시는 맞장구를 치며 짐짓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턱을 괼 것이다. '와... 대단한 한 수네. 완전히 당해버렸는걸.'
소년만화에서나 만났을 법한 이런 인물들이 중고매장을 열었다. 가게 이름은 가사사기의 중고매장. 근데 역시나 예상대로 장사는 잘 안된다고. 개업 2년 동안 꾸준하고 적자를 유지해왔다니 이렇게 성실할 수가 없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아니 어떻게 적자를 면치 못해도 추리를 계속할 수가 있어?' 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사실 중고매장의 사장 가사사기와 그의 꼬임에 홀랑 빠져 동업자가 된 부지점장 히구라시는 적자 따위 겁내지 않는다. 소면과 계란에 비빈 밥으로 연명하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탐정본능을 외면할수 없었다. 뭐, 중고매장 운영은 그냥 부업이고 사실 본업은 추리다. 각종 추리소설과 만화에서 영감을 얻은 듯 정확도 0의 추리를 신들린 듯 펼치는 가사사기와 그의 옆에 왓슨처럼 동행하며 그가 저지른 대책없는 추리의 뒷감당을 해주고 있는 히구라시는 그래서 앞으로 얼마가 더 적자가 나더라도 아마 중고매장을 닫을 계획이 없을 거다. 근데 이봐들, 계속 적자만 났다는데 밥에 비벼 먹을 계란은 제대로 사 먹을수나 있는거야?
미치오 슈스케의 신간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이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원제는 '가사사기 일행의 사계절'이라고 한다. 물론 일본에는 일본만의 정서가 있어서 저런 제목도 나쁘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다ㅜㅜ 하지만 '일행의 사계절'에는 '수상한 중고매장'이 담고 있는 매력이 없다. 센스 넘치게도, 이 발랄한 이야기와 인물들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발현한 새로운 제목을 지은 북폴리오에게 박수를!!!) 그간 미치오 슈스케는, 환히 드러나는 외형에 가려져 있는 어둡고 음침한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었기에 우리 독자들은 미처 몰랐다. 이 사람 이렇게 발랄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어? 역자조차 새로운 미치오 슈스케를 읽으며 열광했을 정도라고 하니 이제는 진지하고 무거운 이미지의 그에게 비비드 그린, 민트 블루, 핫 옐로 정도의 상큼하고 귀여운 색채를 입혀주어도 좋겠다.
왠 이상한 놈이 무지막지한 핑크 메기를 끌어안고 있는 표지 이미지부터가 일단 수상하고 파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나는 풍경이나 적자를 면치 못해도 추리를 멈추지 않는다는 카피도 허 참 수상하다. 이래저래 수상한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은 참 수상한데 그래서 참 재미있다. 원래 모호하고 정체가 불분명한 것들은 궁금증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궁금증이 타당하고 발랄한 진상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오~ 재미있어!'라고 외치게 된다.
가사사기와 히구라시, 그리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쉬크한 여중생 나미가 있는 그들의 중고매장이 적자인 이유는 국가 경제가 어려워서도 아니고 가게 입지가 좋지 않아서도 아니다. (뭐 어느 정도 그런 영향도 있겠지만;;) 문제는 고객들이나 거래처와의 사이에 반드시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청동상 방화 사건, 저금통 파손 사건 등 각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한번씩은 꼭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그 때마다 반드시우주같이 넓은 가사사기의 오지랖 레이더가 작동한다. '앞으로 한 수면 체크메이트.'를 외치며 사건 해결에 고심하는 가사사기. 근데 이 체크메이트가 다른 별로 출장을 간 모양인지, 가사사기의 추리는 과녁을 제대로 맞히는 일이 단 한번도 없다. 거침없이 펼쳐지는 그의 상상의 나래를 현실화시켜 가사사기의 행복과 나미의 섬세한 성장기 감수성을 지켜주는 것은 히구라시의 몫이다. 고생이 참 많다.
요상하고 수상한 가사사기 일행이 말려드는 사건들은 모두 '가족'에 대한 일들이다. 남편을 잃은 뒤 아들을 키우며 무척이나 까칠하고 못된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바짝 여위어 가는 가여운 스미에(봄 에피소드), 전통있는 목공소에 들어가 제자로 입문하지만 여자로서는 힘든 작업 때문에 '가족'을 핑계로 공방'가족'을 저버릴 수 밖에 없는 사치코(여름 에피소드), 이혼과 함께 집을 나간 아빠와 무정해진 엄마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미(가을 에피소드), 양아버지와 진심으로 가족이 되어가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소친(겨울 에피소드). 모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맺어진 작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모든 사건마다 고민하고 고뇌하는 주인공들이 있고 다른 가족들의 사랑과 이해 그리고 가사사기와 히구라시의 활약 속에 그들은 상처 받은 마음에 위로를 얻고 길을 찾는다. 약간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꽤나 천재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요상한 인물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 속에는 작가가 전하는 위로와 농담이 한겨울 호빵처럼 듬직하고 뜨뜻하게 들어가 있다.
뭐가 좋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사진틀 속의 사진을 쳐다보면서
이 세상의 다양한 일이 가능한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302 _ 히구라시의 독백 중에서
무심하고 아무 생각없는 한량인 듯 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매력남 가사사기, 손재주가 상당하고 지능지수와 감성지수, 잔꾀지수가 가히 월드클래스인 히구라시, 예민하고 당돌하지만 그 당돌함이 사랑스러운 나미. 작가는 이런 녀석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들의 중고매장을 개업했다고 했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이 가사사기 일행들의 팬덤을 형성하려던 것이었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명중했다. 어떡하지. 가사사기 중고매장의 팬이 될 것만 같다. 나도 나미처럼 날이면 날마다 여기로 출근하련다. 미니 트럭의 짐칸에 히구라시와 사이좋게 구겨 앉아 배달도 가고 말도 안되는 물건도 사오면서 가사사기의 오지랖에 편승해 나의 만만치않은 오지랖을 겨뤄보고 싶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자네들 혹시. 해외 영업을 생각해 본 일은 없나? 일본의 유명 프랜차이즈 '가사사기의 중고매장'. 어이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벌써 망조가 보이는구만. 뭐 그래도. 적자면 어때. 추리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