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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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세종의 며느리 순빈 봉씨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 측은지심조차 제한적이어서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정도의 안타까움에 그치고 말았다. [채홍]의 주인공이자 역사와 사랑에 대한 작가의 메신저인 순빈 봉씨. 그 아이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감정에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은 너무 거창하다. 그런 고백은 그녀가 아니라 곤장 마흔 대를 맞으며 죽어가는 정인을 두고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형장으로 달려와 자복한 궁녀에게야말로 어울린다. 열 여덟 살의 달뜬 춘심, 오만하고 철없는 그 갈구와 열망을 사랑, 그것도 역사가 낳은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 나의 실패는 내가 '어리석은 본능을 옹호하고 덧없는 욕망을 지지하는, 오직 인간의 편인 문학'의 사람이 아닌 까닭인가 보다.

순빈 봉씨는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빈이었다. 휘빈 김씨가 요술에 의지하여 지엄한 왕궁의 법도를 어지럽힌다 하여 폐위한 뒤 세종은 천하일색이라는 순빈 봉씨를 두번째 며느리로 맞았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본래 학업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아버지와 두 오라비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고명딸이었다. 당연히 그 버릇이 어련했을까. 열 여덟의 그녀는 세자빈이 대체 무얼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채 궁으로 들어와 앉게 된다. 말을 타고 저잣거리에 나가 오라비들과 돌아다니며 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누리며 갖은 사랑을 다 받았던 그녀에게 애당초 궁중 생활이 잘 맞을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하나뿐인 남편인 세자는 어려서부터 세종의 엄격한 훈육 아래 하늘 아래 오직 '인의예지'가 전부인 인간형이라 순빈 봉씨가 바라는 감정적인 소통이 불가한 사람이었다. [채홍]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의례가 지엄한 궁중의 법도 아래 궁녀들과 내시들은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모두 거세당한 채 한평생 살아야 했던 곳이 조선의 궁궐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후 조차 너무 귀하신 몸이라 날을 정해두고 합방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정서적인 모든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단단한 율례 속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순빈 봉씨는 이러한 숨막히는 궁 생활 속에서 외로움에 시들어가다 어느 궁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몸이 되어 서로 정을 통하고 이에 소문이 퍼져 세종은 결국 순빈 봉씨를 심문 끝에 그녀를 폐위시킨다.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 빈으로 하여금 아내의 예를 저버리고 불경지설을 함부로 토로하게 했고? 이미 친영의 격식을 갖추었으니 육례에 어긋남이 없거늘, 그토록 친정의 가솔이 그리우면 귀녕의 절차를 논하면 될 것을, 무엇이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를 만큼 큰 문제란 말이오?"

"그걸 저하께서 정녕 모르셔서 소첩께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지금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격식, 의례, 절차..... 정말로 그것으로 사람이 살아진다 하더이까? 그것만으로 살 수 있다 하더이까?"

봉빈의 눈에 문득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흡사 담벼락을 향해 헛된 팔매질을 하는 듯한 답답함에서 비롯된 분루이기도 했지만 정녕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목석같은 사내를 향한 간절한 읍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고 몰인정했다.

p105

세자가 바쁜 만큼 봉빈은 외로웠다. 빈궁에 머물 때는 그나마 질투도 하고 애도 태우고 사랑을 얻을 곰곰궁리도 했는데, 그 모두가 사라져 텅 빈 마음에 깃드는 것은 오직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 종학으로 나오면 격식을 따지지 않고 끼니 때마다 겸상도 하고 의례적인 것들은 작파하고 필부필부처럼 스스럼없이 오가며 복잡한 절차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웃고 울고 사랑하려 했는데.... 간절히 그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렸기에 기대가 깨어진 뒷마음은 더욱 쓰리고 아팠다.

p195

성동(열다섯 살 된 사내아이)이 되도록 세자는 여인을 알지 못했다. 음양의 이치에 대해 배우기는 했으나 그것도 학문적인 흥미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는 다만 피로했다. 제아무리 즐거이 감당하는 책임과 의무라도 잠시 놓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도피처가 세 명의 승휘, 후궁들이었다. 그들은 김씨만큼 집안이 좋지 않았고 봉씨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총명하거나 강건하거나 지혜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책임질 것도 의무감을 느낄 일도 없었다. 명분을 따지고 격식을 차리며 규범과 규율을 들먹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승휘들을 만나러 갈 때면 세자는 어린 날 숨바꼭질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요구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저항 없이 순정하며 경계 없이 수용하였다. 그 뭉근한 평온이야말로 완벽했다. 사랑이라는 불완전하고 변덕스런 마음 따위로는 절대 흠집 낼 수 없는 옥구슬의 세계였다.

p275



사랑이 과연 독인가? 나를 괴롭고 고통에 못이겨 쓰러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과연 내 목숨까지 달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내 옛사랑을 돌이켜 볼때 사랑은 독이 아니다. 사랑이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할 때는 결단코 독이 될 수 없다.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랑은 어느 시대에건, 누군가에게건 삶이 된다. 사랑이 독이 되는 때는 오직, 그 사랑에 이해와 희생이 결여되었을 때 뿐이다.

나는 순빈 봉씨의 사랑이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녀를 죽인 게 아니다. 사랑이 죄라서 그녀가 죄인인 것이 아니다. 이해와 희생을 모르는 철없는 춘심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극중에 궁녀들의 형을 관리하는 내시 김태감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까지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눈 먼 사랑의 열정을 들어 내시인 김태감은 자신의 불능에 대한 두려움과 젊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왕의 물건을 훔쳐 정을 통하던 내시에게 전하다 발각된 궁녀가 등장한다. 이런 행실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기가 사랑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작가는 순빈 봉씨의 입을 통해 말한다. 사랑은 순간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음에 내어주었지만 생을 뜨겁게 관통했던 사랑만은 고스란하다고. 한순간 뜨겁게 사랑하고 뒤돌아서면 끝인 찰나의 열망일지언정 고스란히 남는다라....... 다 태워버리고 까맣게 재만 남아도 그것이 고스란히 남았다고 할수 있을까. 소설의 제목이 '채홍 - 무지개'인 까닭은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고 작가는 적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태양을 받아 반짝인다. 태양이 없이는 무지개도 없다. 태양(법도와 질서)이 반짝일 때에야 비로소 그 앞에서 무지개(감정)도 반짝인다.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순빈 봉씨가 가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은 실로 대단한 남존여비의 세계였고 특히나 궁은 그 대단한 사상의 핵이었다. 궁녀들 간의 동성애가 유행한 것은 그 잔인한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그네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또한 순빈 봉씨가 그렇게 굴레 밖으로 대탈주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린 마음과 외로움을 헤아려주지 않은 문종의 부덕이다. 그러나 욕망 앞에 솔직한 것과 사랑에 솔직한 것은 다르다. 사랑하는 이와 한 이불 속에서 정을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내 정인이 다른 사람의 이부자리에서 노닥이는 것에 활화산같은 분노가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나만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나를 사랑해야 이치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천륜(부부와 부자)에 어긋나지 않은 때에야 '사랑'이라는 영원하고 항시적인 것이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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