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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ㅣ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충격적인 경험이었는데, 예전에 미싱용 윤활유를 보리차인줄 알고 마셔버렸던 적이 있었다. 너무 목이 말랐던 한여름 오후, 마침 컵에 말간 보리차가 담겨 있길래 꿀떡 삼켰더니 기름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쯤에야 '아, 이거 기름이구나' 느낌이 왔다. 옆에서 화들짝 놀라신 아버지는 왜 기름을 마시고 있냐며 내 손에 쥔 컵을 빼앗아 가셨다.
기름을 그것도 공업용 기름을 거침없이 들이키고 나서는 물론 가장 먼저, 헉;;; 설마 내장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보다 나중에 조금 더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색이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름 눈썰미가 좋아서 물건을 잘 구분한다고 자신하며 살았던 나였는데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빛깔이 감쪽같이 닮았다는 걸 온몸으로 부딪혀 배우게 될 줄이야.... 물 같은 기름, 기름 같은 물. 마셔보기 전에도 (내가 기름을 물이라고 인식하던 그 순간에도) 기름은 기름이고 물은 물이었으나 내 인식 속에서 기름이 물이었다가 다시 본질인 기름의 모습으로 돌변했던 이 순간의 과정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인식) 속에 파고들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 실재로부터의 충격이자 내 예상과 감각을 뛰어넘는 현실과 실재의 충돌이었다.
[로쟈와 함께읽는 지젝]이 왜 그렇게 어렵고 난해했을까. 로쟈와 함께 지젝을 읽고 나서 나 혼자 지젝을 읽으면 더 좋으리라 짐작했던 나는 틀렸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보다 혼자 읽는 지젝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재밌었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를 진단한 슬라보예 지젝에게 아직 실재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실재를 접하고 난 이후에 느낄 그 삭막함과 황량함을 따서 '실재의 사막'이라는 감각적인 제목을 붙였겠지만 이 책을 '실재의 사막'이라기보다 '실재의 오아시스'에 더 가깝다. 삶을 화려하게 하는 쪽은 가상화된 현실일지 모르나 삶을 생동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척박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사상이, 그의 글과 생각이 마음에 든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니어서가 아니다. 지금 세계의 주류와 그 지배층의 검은 속내를 들추고 그것은 거침없이 드러내서만도 아니다. 세계1차 대전의 잔혹한 시대의 끝에서 젊은이들에게 의식과 사유의 확장을 격려했던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를 연상케하는 울림이 그의 글 속에 있어서이다. 지젝은 911 테러라는 명제를 확고부동하게 놓아두고 그 앞뒤 (과거와 미래)로는 움직이되 그 바닥 혹은 그 허공에 있는 모든 공간을 과감하게 파헤치고 끈질기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라'는 주문을 걸고 있다.
'생각하라'는 화두는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책에서 나아가 광고에서까지 우리는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디어에서 '생각하라'고 주문할수록 우리는 길을 잃는다. 무엇이 생각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만이 우리시대,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생각의 전부일 수 없다. 과거는 어제의 현실이었고 내일은 미래의 현실이므로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뒤집어봐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과연 테러인가.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가. 누구의 전쟁인가. 아니, 이것이 전쟁이라고 할수 있는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의 글와 메시지에 부응해 나의 현실에 어디까지가 실재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재라고 밝힌 전부를 나의 실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밝힌 실재 역시 뒤집어 볼 일이다. 극한의 회의 속에서 실존을 구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몫만은 아니다.
세계가 더 긴밀하게 연결될수록 국가와 기업 뿐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서로 유기적으로 더 가깝고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 흐름은 지구가 그 자체로 부서져 근본적으로 와해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숙명이다. 지구라는 별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들의 숙명이다. '생각하라'는 숙명. 보리차로 인식하고 있던, 저 컵에 담긴 황금빛 액체가 정말 구수한 물인지 아니면 미싱용 기름인지 아닌지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만으로 알 수 없으면 마셔봐야 한다. 분명 보리차일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혀와 생각에 미끄덩하고 기분나쁜 충격이 올지라도, 마셔봐야 확인된다면 마셔봐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주문은 그것이다.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전부라고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무엇이 실재인가 손을 더듬어 컵이라도 손에 쥐어 볼 것인가. 911테러는 그것을 목도한 만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와 곧 우리의 생각 내부에서의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었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젝의 말처럼 궁극적 위협으로부터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 위협에 동조하는 일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