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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지의 부엌
니콜 모니스 지음, 최애리 옮김 / 푸른숲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하는 인간, 사회적 인간, 도구적 인간 등 인간을 규정하는 여러 특성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자연스럽고 오래된 것이 ‘먹는 인간’일 것이다. 생각을 하든 몸을 움직이든 어쨌든 인간은 먹어야 한다. 인간의 춤과 그림, 말조차 시작되지 않았던 그 때에도 인간은 분명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어왔다. 그래서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을 만든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의 말은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한 문장일지 모른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이 시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고도로 발전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엄청난 과학과 예술의 수준 생각해 보라. 요리마저 과학과 예술이 된지 오래인 지금, 사람들은 이 발전된 요리를 매일같이 먹는다. 요리법 자체의 발전, 건강식이 대중화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재료와 엄청난 노력을 들여 세심하게 조리한 요리를 (경제적 환경 등에 따라 매우 크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맘만 먹으면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람들은 요리(먹는 것)를 ‘사랑’의 매개로 혹은 도구로 때로는 사랑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식해 왔다. 이제 요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먹는 행위(음식)뿐 아니라 즐기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를 정서적으로도 살아있게 만드는 영혼의 에너지원까지 된다. 사람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에게 ‘요리’는 그런 것이다.
“먹는다는 건 요리의 시작일 뿐이지! 맛과 질감과 냄새와 그 모든 즐거움이 그저 관문에 불과한 거야.
진짜 훌륭한 요리는 그런 것을 넘어 마음과 정신에 호소하는 거란다. 예술과 자연과 철학에 대해 명상하게 하는 거야.
미식가의 마음에 힘을 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거지. 그저 먹기 위한 음식은 결코 만들지 말게.”
p201 요리가 시가 될 때
여기 혼자 먹고 혼자 사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다. 친구도 있고 일도 있고 집도 있는 이 여자는 다만 음식을 혼자 먹을 뿐이다. 남편이 살아 있었던 시기에조차 그들 부부는 늘 따로 따로 밥을 먹었다. 특별히 감정적인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환경이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을 뿐. 그런데 남편이 죽고 우여곡절 끝에 향하게 된 중국에서 만난 중국 요리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했잖습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일 겁니다. 함께 먹는다는 거요.”
“저는 혼자 먹어도 상관없어요. 여행 중에는 늘 혼자 먹었고, 매트가 죽은 후로는 언제나 혼자 먹는데요.”
“안됐군요. 제가 좀 바꿔봐야겠습니다.”
“당신은 바꿀 수 없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p204 요리가 시가 될 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요리가, 그저 몸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일 뿐이라면 요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외롭지만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두 남녀가 중국 전통 요리를 매개로 만나고 서로 보듬는 과정을 그린 [칸지의 부엌]이 중국 전통 요리 철학에 대해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책은 중국 요리 철학을 중심으로 요리와 사랑, 그 둘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그렸지만 사실 스타일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나라의 전통 요리란 다 그럴 것이다. 요리란 인간과 함께 살아온, 인간 그 자체.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고, 또한 사모하는 왕과 스승, 친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들이 그들 전통 요리마다 녹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중국인과 유대인 혼혈이면서도 중국 전통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샘과 사고로 죽은 남편이 다른 여자로부터 낳은 아이를 찾아 중국에 도착한 매기를 내세워 요리에 녹아있는 가족과 사랑, 전통과 역사를 한 권으로 엮어냈다. [칸지의 부엌] 이 한 권 속에서, 편협한 시선과 소외 속에 외로움을 밥처럼 먹고 살아온 남자와 가장 깊은 곳에 상처를 밀어넣고 고독을 가족으로 여기며 사는 여자는 그렇게 중국에서 만나고 요리와 음식, 전통과 역사, 가족과 사랑을 함께 배운다. 이 책은 그 둘이 모든 의미에서의 ‘칸지의 부엌’에 이르며 끝난다.
“난 영 꿈만 같네요.” 그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꿈만 같아요."
그녀는 쌀이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뭘 만드는 거예요?”
“칸지에요. 제일 간단하고 기본적인 거지요. 하지만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마치 사랑처럼요." 그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의 눈길이 옷을 뚫고 몸을 뚫고 마음속을 곧장 들여다보는 듯했다.
p403 칸지의 부엌 중에서
혼자 먹는 습관을 바꿀 수 없다고 선언했던 여자는 어느 새 한 식탁에서 온 가족이 둘러 밥을 먹는 풍경에 익숙해지고 누군가가 곁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남자는 가장 중요한 결전의 그날, 여자에게 자기 곁으로 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 둘의 변화는 더불어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부르고 밥 짓는 푸근한 향내가 몸과 마음을 감싸 안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그 가족 전부를 훈훈하게 끌어안는다.
여행길에서 느끼는 매기의 심리나 전남편이 남긴 아이에 대한 매기의 감정 변화가 무척 아쉽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국 요리에 효과적으로 담았다는 면에서는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자칫 ‘요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 잡스러워지기 쉬운 소설이 요리 소설인데 오히려 덤덤한 어조의 분위기가 중국 요리 그리고 요리 소설의 매력을 잘 살렸다. 화려한 느낌의 중국 요리를 ‘소박’하고 가정적인 전통 요리로 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잔잔한 매력적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