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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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 중에서 이십 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들을 서술한 책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긴 침전의 과정을 통해서만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지요.

시간과 기억과 노스탤지어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무게 말입니다.”

p160

 

책을 펴고 몇 장 읽지 않았는데 나는 기함했다. 가정부와 난교를 가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정도의 성의식을 가진 이 남자는 대체 뭔가? 대체 창녀들과 노느라 결혼도 내팽개치는 이 괴씸하고 난잡한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의 90살 생일에 숫처녀인 미성년자와 하룻밤을 보내야겠다고 의뢰하는 장면에서는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를 믿어야 했다. 독자의 미덕은 이것이다. 특히 문학을 읽을 때는 더욱 절대적이어야 한다. 저자에 대한 믿음.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저자가 말한 “경험이 긴 침전의 과정을 거쳐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된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참아야 했다. 그리고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한마디로 나는 창녀들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아흔 살이 되던 날까지, 그러니까 더 이상 운명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로사 카바르카스의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p55

 

90살 생일을 맞은 이 남자는 사랑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가족을 꾸리길 원했지만 그는 그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다 어느새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없이 아흔살 생일을 맞아버렸다. 노인은 이 초라하고 건조한, 남기고 갈 것이 없어 이토록 부담스럽고 텁텁한 삶의 의미를 숫처녀와의 하룻밤을 통해 찾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16살 소녀 델가디나는 그러나, 그에게 육체적 능력에 대한 확인 대신 열대의 진하고 습한 사랑을 끼얹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흔살 노인에게는 사랑이 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당신 나이가 되면 쓸 만한지 아닌지가 늘 관건인데, 당신은 아직 쓸 만하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

하고 말했다.

p93

 

잠시 후 사육장에서 전화를 걸어와서는, 희생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데,

그러려면 내 허락이 필요하다고 했다.

왜 그렇다던가? 내 물음에 다미아나는 너무 늙었대요, 라고 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리라고 할 만큼 냉정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설명서 어디에 나와 있는 것가?

p104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 대신 좌절과 절망을 저도 모르게 꾸역꾸역 그 빈자리에 채워넣는다. 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 가라앉지 않기 위해 어떤 이는 섹스, 어떤 이는 돈, 어떤 이는 명예, 권력 등등 저마다의 기호에 맞는 어떤 것으로 다시 사랑의 빈자리를 메꾼다.

창녀와 자기 위해 결혼까지도 물린 남자의 90살 생일에서야, 입 한번 맞춰보지 못한 16살 소녀로 말미암아 사랑의 경이롭고 평화로운 그러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세계를 발견했다. 이 대단한 발견을 통해 그의 경험은 정제되고 침전해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고 그렇게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석쇠에 굽는 생선을 뒤집어 다른 면을 익히게 되는 것처럼, 그의 인생을 뒤집어 새로운 국면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녀도 고양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즉,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시들을 번역하려고 십오 년 이상을 허비했지만,

그날 오후에야 비로소 그중 한 대목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오, 가련한 나, 이것이 사랑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p112~113

 

“그 불쌍한 아이는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거리로 나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나의 첫 번째 세기의 희미한 수평선에 이르러 있음을 알았다.

아침 6시 15분경 고요하고 정돈된 나의 집은 행복한 여명의 색깔을 즐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 엔딩.....

 

고통은 삶의 방증이다. 평생에 단 한번도 고통스럽지 않았던 그는 델가디나 때문에 걱정하고 울고 분노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렇게 인생을 완성한 것이다. 평생 느낄 수 없었던 시의 한 대목이 그의 심장을 뚫고 지나는 순간, 그의 인생은 거기서 결정되었다. 남은 그의 삶은 사랑이 주는 행복한 고통 속에서 어느날 미련없이 눈을 감도록. 이 아름다운 마지막을 읽고 나면 마음에는 둥실, 사랑이 날아오른다. 노화의 서글픔, 인생의 허무함.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공유하는 절박한 한계의 무게라는 추를 달고 사랑은 놀이공원의 풍선처럼 찬란하고 평화롭게 날아오른다.

 

인생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진부한 결론이 이토록 명징하게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연륜에서 비롯한다. 그의 경험이 정제되고 침전하길 기다린 지혜로운 작가는 섹스에 탐닉해온 노인의 노년을 마치 오래된 소나무의 솔잎처럼 고상하고 향기로운 이야기로 빚어냈다. 90살 노인이 16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 향기롭다고 하면 이상한가? 노인의 불쾌하고 망측한 치정사를 미화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고양이의 안락사를 놓고 당황할 정도로 여전히 인생에 서툰 한 남자가, 마음으로 느끼는 사랑만으로 그의 인생을 완성해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루 지나면 하루만큼, 1년이 지나면 다시 한살을 먹는, 그가 늙어온 시간처럼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기 때문이 한없이 아름답고 평온하다.

 

삶은 길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그 어떤 노인이라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인생을 완성하고, 인생은 사랑이 주는 생명력 안에서 재생된다. 그렇게 삶은 때로 영원까지 바라볼 만큼 길다.

당신의 긴 삶에서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저 노인이 소유한 아침 햇살 같은 황혼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누군가 즉시 떠오른다면 당신의 인생도 이미 완성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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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권하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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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누구도 철학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성공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땅, 부, 명성, 철학은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약속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이 외적인 부가 아니라 내면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는 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철학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 책에서 첫 번째로 배운 교훈, 즉 우주에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187

 

 

플라톤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런 책은 왜 읽습니까?’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잘나가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업적이나 (툭 까놓고, 독서가가 남길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위대할 수 있겠나?)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특별한 성과를 위한 것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규명할 방법을 책에서 찾고 있는 것뿐인데, 이런 말을 그 상대에게 건넸을 때 그가 어디까지 내 의견을 존중해줄지 알 수 없었고 굳이 존중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대답할 말도 없었다. (이런 의견을 존중해줄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저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

 

 

‘20대에 반드시 해야 할 00가지’ 따위의 자기계발서보다도 못한 처지에 놓인 지금의 철학서(적어도 저런 자기계발서를 들고 있으면 그런 건 왜 읽니?라는 질문은 받지 않는다)가 딱하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사람이 채소의 생즙을 역겨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쉽고 피상적이고 간단한 텍스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다. 물론, 철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데에는 철학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철학은 도서관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다. 유명한 자기계발서들에 실린 메인 아이디어들의 원형도 철학이고 수많은 심리치료사, 상담사들의 이론과 테라피 저변에 깔려 있는 것도 철학이건만 실상 그걸 접하는 대중이나 심지어 저자와 상담사 본인들도 그게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르고 있는 이 현실은 철학이 스스로를 종잇장에만 봉인해 온 결과다.

 

 

분명 그렇다. 철학은 삶은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거나, 불운한 사건을 행운의 사건으로 바꾼다든가, 암환자의 암세포를 궤멸시킨다든가 하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철학은 종이 위에서는 아주 무능력하다. 하지만 이 철학이 거리로 나와 삶으로 스며들면 상황은 반전된다. 돈의 힘, 죽음의 위협까지도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철학으로부터 흐른다. 이건 시너지다. 사람이 철학을 살아있게 하는 동시에 철학이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삶은 삶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떨어져 있다면 결코 나타나지 않는 이 에너지 때문에 [철학을 권하다]의 저자 줄스 에반스는 철학을 권한다. 성공해야만 하고, 돈을 끝도없이 벌어야만 하는 우리 세대를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가들의 가르침을 권한다. 홧병에 시달리고 정신질환을 앓고 잔인한 순간들에 할퀸 트라우마에 잠식된 우리들에게 절실한 삶의 기술을 권한다.

 

 

주목해야할 것은 이 ‘삶의 기술’이다. 학교에서도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는 이 삶의 기술을, 저자는 철학에서 찾았다. ‘철학에서 해법을 찾았어요’라고 하면 먼지 냄새 폴폴나는 오래된 철학서들을 뒤적였을 것 같은 느낌이 나지만, [철학을 권하다]가 권하고 있는 철학은 매우 신선하고 선명한 거리의 공기가 배인 철학이다.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인문학을 주도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운동가와 학자들을 오가며, 에반스는 철학 이론이 아닌 각 철학가들의 가장 무게 있는 메시지들을 삶에 적용하는 기술을 정리했다. 특히 믿을만한 것은 철학을 마법 주문처럼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각 철학 종파와 계류를 분류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아주 냉철하고 때로는 위트있게 각각의 맹점과 허점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절대적인 철학가도 없고 완전히 효과적인 현대 철학 운동이란 것도 없다. 이 책은 그 제목처럼 다만 ‘철학을 권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고민해 온 것이란 대동소이하고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가들의 고민과 가르침도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 적용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변화를 삶에 불러오므로 철학을 알기를 권한다. 철학을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곧 삶의 기술이 되기 때문에 삶의 여정이 남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철학을 권하고 있다.

 

 

사람들이 철학을 실천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녀온 믿음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받아들인 철학에 진정으로 몰두하고, 그것을 정신에 각인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철학은 피상적인 것에 머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스스로에게 말했듯, “너의 정신은 네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을 닮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지닌 생각의 색으로 물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혼을 지혜로운 생각들 속에 담그도록 하라.”

p192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의 범위가 서양철학, 고대나 현대나 결국 서구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해 서구에서 주로 다뤄지고 있는 철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쉽다. 삶을 사랑하는 기술을 가지게 하는 철학은 어쩌면 동양 철학에서 더 깊고 강력한 근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나의 기대일 뿐. 이 책에서 삶을 사랑하는 기술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충분하다. 남겨진 것은 저자인 줄스 에반스가 그러했듯, 이 철학들을 삶에 새기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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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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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의 실망감은 2권으로 오면 애틋한 감동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 전에도 윤동주의 시를 여러번 읽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들을 읽곤 한다.

그런데 30년동안 살면서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들을 너무 쉽게 읽고 있는 것 아닌가.

시는 영감이 아니다. 시는 삶이다. 우주를 밝히는 태양같은, 발을 보듬는 든든한 흙같은, 뜨듯한 손 건네는 사람같은 이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조선어를 빼앗긴 시인이 느낀 극한의 결핍과 처참한 고립의 삶이 그의 시를 낳았다. 그의 삶이 이렇게나 어려웠는데 그의 시가 이토록 쉼없이 가슴을 미어지게 할 정도로 눈물을 터뜨리며 쉽게 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몇 편의 훌륭한 역사 팩션을 발표해 한국형 팩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정명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세심하게 사건과 인물에 공을 들였다. 특히 스기야마와 유이치라는 두 일본인 간수를 실제 인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모든 사건들이 (비록 느리게 흐르더라도) 충분히 설득적이다. 단순히 감옥에 수감된 조선인의 심정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자는 '문학'을 사랑하는 일본인에게 전쟁이란 무엇인지, 이 아비규환 속에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세밀하게 그렸다. 조선의 시인과 그의 시를 향한 이 두 일본인 간수의 애정과 인간적 양심은 이 책이 그린 '인간애'를 더욱 진하게 완성한다. 소재는 '윤동주'일지라도 그의 궤적을 통해 이야기는 '말과 글' 즉 문학이 인류 공통에게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힘을 발휘하는지로 귀화한다. 문학이 시인, 간수, 평범한 청년의 인생에 얼마나 강렬한 변화를 선사하는지 페이지마다 그들이 부딪혀 일으키는 파도가 넘실거린다. 그 파도는 1권에는 미처 느낄 수 없었는데 2권을 열면서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더니 결국 '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의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2권 중반이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별같은 시인을 일찍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너무 많은 시들을 너무 쉽게 읽어온 부끄러움이 결국 눈물을 왈칵 쏟는다.

 

' (동주의) 시를 적은 연을 간직한 소녀를 찾고 싶습니다. 그 연은 찬 감방에서 써낸 시인의 영혼이고, 그 시를 살리려다 죽은 한 간수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망가뜨린 순결한 시인의 시를 지켜낸 그녀는 잃어버린 우리들의 양심이기도 합니다.'

 

감방 밖으로 연이 떨어지고 거기엔 동주의 시가 적혔다. 순결한 시인의 시를 가진 이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의 책장 한 켠, 좁은 책 등에 써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순결한 시인의 시를 가진 것은 우리다. 이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 별빛에 매료되어 그의 시를 사랑해 온 우리다. 감방 밖으로 떨어진 연을 주워든 것은 우리다. 떨어진 연을 우리는 너무 쉽게 얻은 것은 아닐까. 삶이 곤할수록 시도 어렵고 그 시를 읽는 것도 어려워야 한다. 지천에 그의 시가 있어도 그 한 조각 한 조각 씹을 때마다 숙연해져야 한다.

별이 된 시인, 이미 세상에 없는 그 시인이 남긴 별빛 아래 그 빛을 만끽하는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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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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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나는 낡은 냄새, 바스러질듯 가벼우면서도 육중한 존재감이 뚜렷한 그 냄새.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가지 기억들 중의 하나다. 그 냄새는 나란히 앉아 어깨를 바짝 마주하고 읽는 이를 기다리는 책들의 냄새이기도 하고 그 책들이 담고 있는 사람과 삶과 생에 대한 기록에서 풍겨나는 냄새이기도 하다. 그 냄새는 자연스레 몇 개의 책과 작가들로 이어진다. 토지, 태백산맥,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

사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의 시보다 더 깊이,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반듯한 이목구비가 선명한 그의 얼굴이었다.

 

정말 딱, 그의 시와 같은 생김의 얼굴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되어 젊은 날에 인생을 마친 비극적인 생애와 함께 '윤동주 시인'에 대한 환상을 품게 했다. 그의 시에서 딱히 감동이나 절절한 동감을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주로 이육사에 열광하던 쪽이었다. 그땐 윤동주 시인의 시는 너무 서정적이고 심심하고 가냘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시가 아니라 윤동주라는 사람에 매료된 나는 오랫동안 '한국의 시인'하면 김소월이나 김수영 (심지어 내가 좋아했던 이육사)보다 윤동주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윤동주'는 이름만 떠올려도 어딘가 아련하고 가슴이 아린, 나에겐 그런 시인이었다.

 

이 책을 보자마자 고민도 하지않고 바로 구매해 책이 도착한 그날 읽어버린 것도 순전히 '윤동주'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이 애정은 책표지의 우울하고 으슥한 느낌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을 유도한 책표지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표지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이 주는 다소간의 촌스러움도, 첫권의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는 따분한 호흡도 극복하고 결국 끝까지 다 읽게 만들었다. 그가 남긴 몇 편의 시와 그에 대한 증언과 기록들이 채 전하지 못한 윤동주를 알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끝까지 책을 읽어야 했다. 때로 이러한 역사 소설은 실제 기록보다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당시를 가르쳐주지 않던가.

 

혹시라도 나와 다르게, 이 책이 역사 팩션이자 추리소설의 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긴장감을 기대하며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지루해하지 말고 이 참에 한국이 낳은 별과 같은 시인 '윤동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기를 조언한다. 그리고 혹시, 나처럼 '윤동주', 이 이름만으로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축하한다. 이 책은 분명 팩션이라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윤동주의 시 한 편 한 편이 어떤 심정으로부터 만들어졌는지 절절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로는 별로다. 만약 소재가 윤동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 특유의 서스펜스 (비슷한 표현과 문장들이 계속 등장해 지루함이 더하다.) 대신 이 책은 윤동주의 싯구처럼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문장과 '문학' 안에서 소통하는 아름다운 인간애를 진하게 담았다. 읽는 내내 영화 피아니스트와 쇼생크탈출이 번갈아 떠올랐는데 이야기의 배경은 전쟁과 감옥이요 인물들은 그 안에 갇힌 예술가(양심있는 순전한 영혼)들이기 때문인가 한다. 1권 중반 이후부터 이야기가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동주와 및 그를 비롯한 그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제야 책은 기다렸다는듯이 재미와 눈물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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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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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다. 정말.

어쩜 이렇게 노골적이고 가혹할 수 있을까. 독자는 독자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사정없이 잘근잘근 다져 '그런 식으로 책을 읽지도, 쓰지도 마.'라며 매몰차게 등짝 스매싱을 갈기는 이 책은 참 야무지다. 20대의 당돌함과 천재 작가의 명철함이 치열하게 공존하는 [살인자의 건강법], 이 한 권으로 저자는 그녀와 같은 당돌함과 명철함을 가진 20~30대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름도 무지하게 길고 어려운 특이병으로 얼마 있다 숨이 넘어갈 예정이신 고령의 작가 선생은 그의 비서를 통해 일부러 기자 인터뷰를 하겠다고 판을 벌려놓고는 기자를 한명씩 그의 앞으로 끌어들인다. 흡사 한니발 교수가 그를 면회하러 온 프로파일러들을 가지고 놀며 따분함을 달래는 섬뜩한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자들 집단 능욕' 대목에서는 일단, 이 고령의 작가 선생이 대체 어떤 작자인지를 알게 된다. 치과에 신경치료일을 예약해 놓고 차례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마냥, 이 작가 선생님은 기자를 한명씩 그야말로 '멘붕'시키며 매우 큰 만족감을 얻는다.

 

 

“그럴 수밖에. 중상 모략가들한테 책잡힐 거리를 제공하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기자 양반은 상상도 못하실 거요.”

“아하! 그렇다면 그건 친절이 아닙니다, 타슈 선생님. 마조히즘과 과대망상증의 어정쩡한 결합일 뿐이지요.”

“됐소, 됐다고! 뜻도 모르는 말 좀 그만 쓰시오. 문제는 순수한 선의란 말이오, 젊은 양반! 당신 생각으로는 어떤 책들이 순수한 선의를 담고 있을 것 같소? 톰 아저씨네 오두막? 레미제라블? 물론 아니지. 그 책들은 말이오, 사교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담고 있소. 암, 정말이지 순수한 선의를 담고 있는 책은 극히 드물다오. 그런 책들은 말이오, 고독과 비천함 속에서 탄생한다오. 작가는 잘 알고 있지. 그것들을 세상에 던져놓고 나면 더 외로워지고 더 비천해진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럴 수밖에. 사심 없는 친절의 본질은 알아보기 힘들다든가 알아볼 수 없다든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예상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것이거든... 드러내놓고 베푸는 선행은 사심 없는 선행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 방금 하신 말씀에서 모순이 보이는데요. 진정한 친절이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께선 자신이 친절하다고 목청껏 외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어, 난 내 맘대로 해도 되오. 어쨌든 아무도 날 믿지 않을테니까.”

p65

 

“사실대로 말씀 드릴까? 정말로 지적이고 총명한 사람들은 이 이렇게 설명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소. 변변찮은 자들이 뭐든 설명해주길 바라지. 설명되지 않는 것까지도. 어차피 설명해봐야 멍청한 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영리한 사람들은 설명해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내가 뭐하러 설명 같은 걸 하겠소?”

“저더러 못나고 둔하고 어리석다고 하시더니, 이젠 변변찮다고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 양반한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니까.”

p68

 

 

좋은 말로 괴팍한 할아버지고 나쁜 말로는 그냥 미친 영감이다. 나는 처음에 이 작가 선생께서 인생의 지루함을 달래시느라 일부러 그러시는 줄 알았다. 일부러 기자들의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놀려주는 것 아닌가 했다. 아, 그런데 이 분은 진심이셨다. 진심으로 기자들 나아가 독자들의 가식과 위선을 요기조기 쪽쪽 후벼판 것이다. 뭐, 작가 선생님이시니 무지한 독자들을 사정없이 꼬집는 거야 그렇군, 할 수도 있는데, 작가들도 깐다. 대놓고 깐다. 어느새 나도 기자의 입장이 되어 뭐 이런 노인네가 다 있어, 할 즈음에 (나의 약점을 이렇게 대놓고 꼬집는데 기분이 산뜻하고 경쾌할리 없다) 내 또래의 여기자 하나가 그를 방문한다. 5번째 인터뷰어, 니나. 헐, 이 기자는 초반부터 그 남다른 아우라를 서슴없이 풀어놓고는 차츰차츰 이 노작가를 압박한다. "이봐요,. 당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짓들을 나는 알고 있단 말이요." 꼬장꼬장하고 성질 사나운 노작가가 칭찬할 정도의 명철함으로 그를 압박한 결과, 5번째 인터뷰는 니나의 승리....... 인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엔딩에 가서 승자는 불분명해 진다. 니나를 그의 화신으로 삼고 운명한 노작가를 최후 승리자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지.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오, 니나.”

“제발 사랑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살인 충동이 치밀어 오르거든요.”

“그럴 리가? 그것 보시오, 니나, 그건 그렇세 시작되는 거라오.”

“그건 이라니요?”

“사랑 말이오. 내가 당신한테 그 황홀경을 일깨워주었단 말이오. 나 자신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구려, 니나. 그 살인 충동은 나로 죽어 다시 당신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라오. 당신은 이제 막 살기 시작한 거요. 그게 느껴지오?”

“지금 느껴지는 거라곤 엄청난 분노뿐입니다.”

“난 지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있소. 나도 여느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이란 사후에나 일어나는 현상인 줄 알았소. 그런데 내가 살아서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이 내가 되어 가다니!”

“그렇게 심한 욕은 처음 듣습니다.”

“그렇게 격분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살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오, 니나. 이제부터 당신은 계속해서 격노하게 될 거요. 예전의 나처럼 말이오. 허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저주를 퍼부으며 황홀경에 빠지겠지. 당신은 분노의 귀재가 될 거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라오.”

p247

 

 

이토록 다정하게 '니나'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래 이 양반 누군가를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없다. 그냥 기자양반, 비서, 당신 뭐 이런 식이었지. 마치 첫사랑 레오폴딘을 대하는 것 마냥 말랑말랑한 태도로 니나를 대하는 작가 선생을 보고 있자니 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양반, 자기 소설 완성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아닌가? 죽음을 앞두고 이 미련하고 무지하고 파렴치한 세상에 자신의 분신으로 두고 가기에 딱 적합한 인재가 나타난 상황에서 작가 선생님은 그의 죽음을 자처함으로써 니나를 타슈화시키기에 성공한다. BBC 드라마 셜록의 2시즌 마지막 편에서, 셜록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리아티가 셜록의 눈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해 그의 범죄를 완벽한 성공으로 승화시키는 장면이 던진 충격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엔딩. 그러니까 최후 승리자는 결국 이 작가 선생이라고.

 

어쩌면 최후 승리자는 레오폴딘일 수 있다. 일평생 이 작가를 지배하면서 작가 머릿속에서 내내 살아있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니나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 속에서 살아 있을 테니. 어쩌면 독자들일수 있다. 여전히 공기하나 통하지 않는 우주복을 입고 피칠갑의 책장 사이를 공기처럼 날아가며 '아, 다 읽었다. 이 책도 재밌네.'하고 잊어버릴 수 있다면. 뭐 승리자가 누구인들 어떠랴. 이것은 책의 일인 것을.

다만, 저자가 책의 인물들 특히 작가 선생의 입을 빌어 독자와 작가들에게 던진 대포같은 일침들이 무척이나 따갑다. 이 따끔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저자 아멜리 노통브만이 유일한 승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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