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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보르포루스는 유럽과 동양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동양을 잇는 다리이자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를 하나로 품는 매개다. 케말과 퓌순이라는 두 세계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44일을 마치 깊고 푸른 강처럼 삼아 하나가 되어 흐른다. 오르한 파묵은 이 깊고 푸른, 남자의 강 같은 사랑을 순수라고 불렀다.그의 순수는 그녀를 박물관(책 속에서 주인공은 퓌순의 흔적을 추적해가며 그녀의 물건들 혹은 그녀를 연상시키는 물건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지었다)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해 허상과 현상을 잇는, 또 다른 보르포루스(오르한 파묵은 순수 박물관 원고를 떠올리던 십년 전부터 책에 등장한 박물관을 지을 것을 구상하고 십년 동안 준비해 실제로 올해 책속의 박물관을 건립했다)를 지었다.
케말과 퓌순의 순수한 사랑이 응축된 [순수박물관](책). 그들의 사랑에 실체를 부여한 작가의 순수한 집념이 세운 [순수박물관](책을 바탕으로 실제로 터키에 지어진 박물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스란히 그 생명력을 품고 있는 박물관이다. 책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순수박물관은, 마치 동서양의 옛것과 새것이 공존해 동서양의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터키처럼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