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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유럽의 가장 세련된 유행이 흐르는 1970년대의 터키. 서양과 동양이 강 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마를 맞대고 있는 나라 터키는 동양이면서 서양이되, 서양이면서 동양인, 그러나 둘 중 아무것도 아닌 그냥 터키이기도 한, 묘한 나라다.
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좋은 칼럼과 사랑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랑도 칼럼도, 물론 우리를 지금 행복하게 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의 아름다음과 힘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깊이 인상을 남겼는냐에 따라 평가되지요.”
페227
“우리 기술자들은 유럽 제품을 정말 잘 모방하지요. 하지만 당신처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봐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순간 침을 삼키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녀가 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집에서 꼼꼼하게 준비해 온 듯한 말을 시작했다.
“나한테는 어떤 것이 유럽산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방한 물건을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싸게 샀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정말 나쁜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상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있잖아요.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오랬동안, 이 가방으로 오늘 밤을 기억할 거예요. 축하합니다, 잊지 못할 밤이었어요.”
페236
그녀가 자를 사용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서 자를 가지고 놀면서 두 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이것은 나를 너무나 편하게 해주었고, 나는 마치 퓌순을 본 것처럼 행복했다.
페268